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
슬픈 책을 읽고 슬픈 일을 꺼내 슬픈 글로 쓰면 슬픈 채로 산다. 왜 슬픈 책을 읽냐는 항의는, 나는 슬프다는 인정이고, 슬픈 사람은 할 말이 많기 마련이며, 거기서부터 글쓰기는 시작된다.
[쓰기의 말들]중에서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되고 행복을 나누면 두 배가 된다.’
우린 살아가며 행복한 일을 예쁜 사진과 함께 sns에 올린다. 이내 댓글은 축하 메시지로 가득하고 읽는 사람은 행복을 두배로 느낀다. 그렇다면 슬픈 일은 어디에 올릴까? sns에 공유한다면 함께 애도하고 위로와 응원의 댓글이 가득해지겠지, 하지만 sns 피드에 슬픈 이야기가 계속된 가면 어떨까. 과연 사람들은 계속 관심 가져줄까? ‘이 사람은 늘 우울한 이야기만 올려. 보고 있음 나도 우울해지는 것 같아’ 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언제부턴가 슬픔을 이야기한다는 게 나의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대학시절 친하게 지낸 친구에게 술 취해 속마음을 모두 말한 적이 있다. 이후 난 그 친구를 피해 다녔다. 친구가 ‘너 취했을 때 나한테 다 말했어’라는 말이 ‘난 이제 너의 약점을 모두 알아’로 들렸기 때문이다. 중고등학교 땐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고 나누며 잘 견뎌내길 응원했던 것 같은데, 성인이 된 이후론 누가 내 슬픔을 알게 될까 두려웠다.
그렇게 슬픔을 감추며 살던 어느 날, 글쓰기 모임에서 ' 나의 슬픔'을 주제로 쓰기 시작했고 나는 나의 마음을 아주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슬픔을 말한다는 건 약점을 드러내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나의 슬픔을 이야기할수록 내면이 단단해져감을 느꼈다.
이상했다.
글 쓸 준비 하며 울고, 글 쓰며 울고, 내가 쓴 글을 읽으며 울고, 몸에 있던 수분이 남아나지 않을 만큼 울어 몸이 너덜너덜해졌는데 마음만은 돌덩이처럼 단단해졌다.
인어의 눈물은 소리가 없지만 흐르는 순간 진주로 바뀌어 소리내며 떨어진다. 사실 난 나의 슬픔을 누군가 알아주길 바란 게 아닐까.
글쓰기 모임에서 나의 슬픔을 온전히 이해받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슬픔이 약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글감이 많은 감성이 풍부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나의 슬픔을 이해받은 그날,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용기와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앞으로 쓰일 나의 글은 나의 내면을 다듬는 글이자 나의 슬픔을 건강하게 드러내는 말이 되지 않을까 싶다.
만약 20대의 나처럼 슬픔을 드러내는 일이 약점을 드러내는 일이라 생각한다면 말해주고 싶다.
'괜찮아, 그래도 괜찮아. 힘들고 슬프니까 위로해 달라 말해도 괜찮아'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