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잃고 얻은 것들의 대한 고찰
그래도 괜찮은 나이라는 게 있을까?
"너 지금, 그래도 괜찮은 나이라고 생각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모아논 전재산을 들고 여행을 떠나려 할 때 엄마는 내게 이렇게 물었다.
"언제가 괜찮은 나인데?"
어느 정도는 공감하고, 사실은 나도 흔들리고 있었던 터라 괜히 버럭 고함을 지르고 나니 마음이 불편했다.
확실하게도 나는 분수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았을 때 "시원하겠다. 나도 놀아볼까?"보다는, "와, 저 아이를 데리고 집에 갈 부모님은 어떡하냐."를 먼저 떠올릴 나이가 되긴 했다.
그렇다면 이 생각을 바탕으로 미루어봤을 땐, 저 아이들은 분수에서 뛰어놀아도 괜찮을 나이이고, 저 아이들을 지켜보며 벤치에 앉아있는 어른들은, 뛰어놀면 괜찮지 않은 나이라고 구분 지으면 될까?
사실은 괜찮지 않은 것이 아니라, 원치 않는 것이 맞을 거다.
내가 선택한 아주 작은 단 한 가지의 행위에도 늘 얻는 것과, 잃는 것이 존재한다.
어른이 되어가고, 나이가 든다는 것은 얻는 것과 잃는 것에 대한 저울질은 늘어가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커져, 결국은 내 것을 잃지 않는 쪽을 택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제는 그래서는 괜찮지 않은 나이'라고 칭하는 행위들은 대부분 눈에 보이지 않거나 금방 사라지는 것을 얻고, 당장 눈앞에 당연하게 있는 것을 잃게 되는 것들이다.
해가 거듭될수록 '분수에서 뛰어노는 행위'는 더 이상 우리에게 하고 싶고, 행해야 할 일로 "선택"되지 않는다. "아. 더워 죽겠는데, 저 분수에 들어가 뛰어놀면 원이 없겠네."라는 말을 내뱉고도, 시내 한가운데 존재하는 저 분수 속으로 뛰어 들어가지 않는다.
그것은 "그래도 괜찮은 나이"가 아니어서가 아니고 내 앞에 당연히 존재하는 것들 : 이를테면, 감기에 걸리지 않은 몸 컨디션, 집으로 쾌적하게 돌아갈 수 있는 상태, 불특정 다수의 관심 없는 시선을 놓지 않으려는 게 더 크기 때문에, 실로 그 행위를 원치 않는 것이 되어서이다.
여행도 그렇다.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여행을 떠나면 "괜찮지 않은 나이"가 아니라, "좀 더 잃을게 많은 나이"일뿐이다. 추억, 행복 같은 손에 넣을 수 없는 굉장히 추상적인 것을 얻는 대신 돈, 직장 같은 당장 내 눈앞에 당연하게 있던 것들을 잃었다.
나는 그것이 괜찮다. 난 괜찮다. 그래도 괜찮다. 그래도 괜찮은 나이다.
더 잃어도, 난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