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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지희 Oct 13. 2019

따끈한 저녁의 감자 수프

오늘도 비건하신가요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면서 주변이 기침 소리로 가득하다. 날이 그냥 추운 것도 아니고 어느 낮엔 티셔츠만 입고 밖에 나가도 될 만큼 따뜻하니 다들 급격한 온도 차에 감기에 걸린 모양이다. 비건이 되기 이전부터 가공식품을 덜먹어서 그런지, 자주 등산을 해서 그런지 감기에 걸리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음식에 신경 쓰기 시작하면서 각종 병치레가 거의 없어졌다.

고기와 유제품을 좋아하던 시절 각종 소고기 부위와 종류, 그리고 프랑스 베이커리의 눈 돌아가는 빵과 케이크류를 줄줄 꿰었었다. 이젠 관심이 채소와 곡물에게로 옮겨갔다. 시장에서 새로운 채소를 만나면 판매하는 분께 물어보거나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먹는 방법과 효능 등을 알아낸다. 농담 반 진담 반, 숲이나 들로 나가면 다 먹을 걸로 보인다. 실제 대부분의 들풀은 먹을 수 있고. 어떻게 하면 최대한 이 채소의 맛을 살려서 요리할까, 이 채소는 추운 계절에 먹어도 괜찮을까. 나름 이것저것 공부를 하는 게 즐겁다.

오늘 아침 남자 친구의 누나와 조카와 함께 주말 장에 갔다. 마트에 납품하는 것과 같은 채소를 한가득 늘어다 파는 매대를 빠르게 지나, 울퉁불퉁하고 흙이 묻은 계절 채소를 파는 소상공인의 매대 앞에 섰다. 계절 채소는 아니지만 가끔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하는 토마토나 오이가 보이기도 한다. 예전 같았으면 좋아하는 채소라 한가득 골라 담았을 테다. 그런데 이젠 안다. 토마토와 오이는 찬 성질을 가진 채소라는걸. 다들 기침하는 때에 토마토와 오이 샐러드를 상에 내놓는 건 좋지 않지.

대신 통통한 파와 길쭉한 감자를 샀다. 따뜻한 성질의 채소로 따끈한 수프를 끓이자. 몇 년 전 레스토랑 주방에서 일했을 때, ‘수프 = 크림’이라는 공식이 생겼었다. 수프에 크림을 넣으면 아주 부드러워서 정말 맛있어지니까. 감자수프를 하건, 호박 수프를 하건, 크레송 콜드 수프를 하건, 크림이 어마어마하게 들어갔다. 거기에 모자라 움푹한 접시에 담아 서빙할 때 데커레이션으로 크림 한 줄기를 더 뿌려 나갔었다. 원래 전식은 입맛만 돋우어야 하는데 이 수프들을 먹으면 배가 더부룩해져 정작 만드는 나는 자주 먹지 않았다.

감자 자체가 워낙 부드럽고 매끈해서 굳이 크림이 필요 없었다. 오후 내내 산속을 돌아다니며 야생 버섯을 땄다. 차가운 공기 한가득 마시고 왔으니 따끈한 수프가 필요할 때. 낮에 시장에서 사 온 옥수수빵을 수프에 한가득 찍어 먹으며 따끈한 저녁을 보냈다. 이제 더 추워질수록 따뜻한 식사가 늘어나겠지. 기대된다.



‘따끈한 저녁의 감자 수프’


재료 : (4인분) 대파 두세 단, 중간 크기의 감자 다섯 개, 올리브유, 소금, 후추, 채수 혹은 물 + 핸드믹서 혹은 블랜더

가장 먼저 채수를 준비한다. 크림이 들어가지 않는 수프인 만큼 육수로 쓰는 채수가 맛있어야 한다. 시간이 없으면 그냥 물을 넣어도 문제는 없다. 2L 정도의 물을 냄비에 넣고 양파, 파, 당근, 다시마 등 남는 채소를 넣고 중약불에 오래 끓여준다(채소 낭비하는 게 싫으면 대파의 질긴 부분과 양파 껍질, 당근 껍질만 넣어줘도 어느 정도 맛이 우러난다). 최소 20분에서 한 시간 정도. 날이 추워지면 화목 난로나 석유난로가 있는 집은 미리 냄비를 난로 위에 올려 채수를 만들어두면 좋다.

대파는 깨끗하게 손질하고, 감자는 껍질을 벗기고 2cm 큐브 크기 정도로 작게 자른다. 대파가 없으면 양파로 대체해도 괜찮지만 대파가 많이 나는 이 계절엔 대파를 넣자. 파는 많이 넣을수록 좋다. 파 맛을 좋아하면 듬뿍 넣어도 좋다.

넉넉한 크기의 냄비에 올리브오일을 적당히 둘러준 후 파를 넣고 중불에 향을 낸다. 파 향이 올라오면 감자를 넣고 볶아준다. 소금, 후추간을 한다. 파가 타기 전에 채수를 약간만 넣어준 후 뚜껑을 닫고 조금 끓여준다. 뚜껑을 열고 감자를 하나 먹어본 후, 감자가 익었으면 채수를 조금 더 넣어준다(한꺼번에 다 넣지 말고 농도를 봐 가며 넣어야 한다).

이제 핸드믹서나 블랜더로 시원하게 갈아줄 차례다. 감자의 전분 때문에 수프가 꽤 끈적끈적할 것이다. 섞으면서 채수를 조금씩 더해가며 원하는 농도로 조절한다. 마지막으로 간을 본 후 소금, 후추를 더해준다. 움푹한 접시나 국그릇에 담아 서빙한다. 잘게 부순 견과류가 있다면 위에 살짝 뿌려줘도 좋다.

한 입 먹으면 뭔가 정겨운 프랑스 시골 할머니가 앞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의 수프. 포인트는 채수. 만약 채수 없이, 물로만 만들 경우 달지 않은 두유를 조금 넣어줘도 살짝 깊은 맛이 난다. 여기선 전식으로 내는 메뉴지만 먹고 나면 배가 꽤 부르니 느긋한 저녁에 한 그릇으로 만족해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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