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 할머니가 되면 살고 싶은 집

이왕 혼자된 거 어떻게 하면 재밌게 살 수 있을까

by 하지희

늙어 혼자 살게 되면 살 집. 이렇게 말하면 어딘가 슬프고 무섭지만, 싱글 할머니가 되면 살고 싶은 집이라고 하면 어쩐지 신이 난다. 싱글 할머니. 들어본 적 없는 호칭이지만 찾아보면 내 주변엔 싱글 할머니라고 부를 수 있는 이들이 많다. 특히 프랑스에 와선 싱글 할머니라는 호칭이 아주 잘 어울리는 분들을 자주 보게 된다. 파리에 살았을 적 우연히 가본 싱글 할머니의 집은 내가 지금껏 가본 집 중 가장 멋졌던 집 중 하나로 기억한다.


젊었을 적 이혼하신 후 쭉 혼자 살아오신 마리 할머니는 파리의 핫한 동네, 마레 지구의 아파트에 살고 계셨다. 집 대문을 나서면 바로 코앞엔 늘 북적이는 카페가 있었고, 아파트 창문 너머론 늘 빵 냄새와 팔라펠 샌드위치 냄새가 넘어오는 곳이었다. 아파트는 아담했다. 방도 침실과 서재 하나, 거실 겸 주방이 전부였다. 눈에 띄는 건 거실에 놓인 네 개의 일인용 소파였는데, 동네 친한 할머니들과 금요일 저녁마다 모여 와인 한 잔씩 하기 위해 만든 배치라고. 큰 소파 한두 개 있는 집은 보았어도 1인용 소파만 네 개 놓인 집은 처음이라 신선했다.


내가 마리 할머니 집에 가게 된 계기는 아르바이트 때문이었다. 원래는 친구가 마리 할머니네에 수요일 오전마다 갔었는데, 하루만 대타로 가게 된 것이다. 수요일 오전엔 마리 할머니는 나나 내 친구 같은 학생을 불러 함께 청소도 하고 점심도 만들어 먹었다. 청소 도우미를 부르는 건 기분이 이상하다고, 젊은 친구들 용돈도 줄 겸, 힘이 많이 드는 청소만 같이 할 수 있게 부탁하고 그동안 이야기 나누는 게 즐겁다고 하셨던 기억이 난다.


깨끗하게 손질된 모직 실내화를 신고 차분한 손길로 부엌 찬장의 그릇들을 하나씩 꺼내 닦으시며 라디오를 들으시던 마리 할머니. ‘서재’라고 소개하셨지만, 책보다는 좋아하는 그림이 더 많이 걸려있고 취미로 만드신다는 목각인형들이 더 눈에 들어오던 작은 방에 틀어박혀 시간 보내는 게 즐거우시다던 마리 할머니. 목소리에 힘이 있고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하는 눈빛을 가지셨던 마리 할머니. 내게 싱글 할머니의 로망을 가르쳐주신 마리 할머니.


마리 할머니의 집에 가본 이후 나는 가끔 나의 싱글 할머니 라이프를 상상하곤 한다. 만약 내가 싱글 할머니가 된다면 어떤 집에서 살고 싶을까? 지금의 집에서 남편과 오래오래 함께 산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혼자가 된다면 어떨까? 어떤 슬픈 결말 말고, ‘이왕 혼자된 거 어떻게 하면 재밌게 살 수 있을까’ 하고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가는 그런 결말 속의 집 말이다.



도시건 시골이건 상관없지만, 친구가 가까이 있는 집이었으면 좋겠다. 난 운전을 잘하지 못하니까, 걸어서 30분 이내에 작은 장이 서고 서점이 있고 식당 정도가 있는 동네라면 좋겠다. 세련된 동네가 아니어도 좋지만 편안한 분위기의 동네라면 반기고 싶다. 작은 테라스가 있는 아파트나 아담한 마당이 있는 주택이면 좋겠지만, 어느 곳이든 딱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의 집이면 괜찮을 것이다.


서점이나 도서관이 가까이에 있다면 큰 서재는 없어도 된다. 가능하면 가진 책들을 거의 다 도서관에 기부하고 가끔 다시 읽고 싶어 지면 가서 빌려오고 싶다. 가구도 멋진 서랍장과 그릇장 겸 책장, 테이블과 일인용 소파 서너 개 정도만 두고 상쾌하게 지내면 좋겠다. 창은 크지 않더라도 바깥 경치에서 계절을 느낄 수 있고, 창 근처에 낡은 피아노 한 대를 두고 싶다. 난 술을 잘 못 하니까 와인 말고 홍차로 친구들을 대접할 수 있는 적당한 높이와 넓이의 티테이블을 거실 중앙에 두면 어떨까. 가끔 여행자로 다른 이의 집에 머무른 적이 있는데, 싱글 할머니가 된다면 이번엔 내가 집을 제공해보고 싶으니 접이식 침대나 도톰한 이불 한 채 정도 마련해두는 것도 좋겠다.


이상하게도 싱글 할머니가 되었을 때 살고 싶은 집을 상상하는 데 그 안에 혼자 있는 나보다 다른 이와 함께 하는 내가 그려진다. 가끔 찾아와 바깥 이야기를 들려주는 어린 학생, 싸늘한 저녁 모여 소파에 빙 둘러앉은 친구들, 준비해둔 이불을 꺼내 줄 어쩌다 찾아온 여행객. 그들과 함께 있는 내 집은 크기나 모양 따윈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편히 대화 나눌 공간이 있고 받아온 것들을 나눠줄 수 있을 시간만 있다면 그저 충분하다. 그런 집에서 살아간다면 싱글 할머니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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