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저주 딜리버리 프로젝트
귀신은 뭐하나. 저런 애들 안 잡아가고. 딱 봐도 셋이 하나를 둘러싸고 킥킥대는 뒷모습이 평등한 친구 사이로는 보이지 않는다. 등교하는 학생들 뒷모습을 보면서 어슬렁어슬렁 출근하고 있으면 보고 싶지 않아도 이런 장면들을 심심찮게 목격하게 된다. 얼레, 저거 은근슬쩍 어깨동무하는 척하면서 귀 잡아당기는 거 보라지. 그래도 선생이라고 뒤에서 내가 걸어가고 있으니 괜히 더 크게 웃는 모양새가 거슬린다. 사실 내 눈앞에서 대놓고 서로 쥐어팬다한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다행히 내 큰 덩치가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애들이 많은지 알아서들 내 앞에선 조심해주니 편하다. 집에선 배 나온 레슬링 선수의 몸매가 그다지 편하다곤 할 수 없지만 야생 청소년들이 가득한 학교에선 상당히 유용하게 써먹고 있다. 덕분에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않아도 되니 고등학교 선생치고는 꽤 평화롭게 직장 생활을 하는 편이다.
"노 선생님."
교무실 문을 열렸는데 커다란 눈의 김 선생님이 옆에서 불쑥 나타났다.
"주...주말 잘 보내셨어요?"
키도 작고 툭 튀어나온 앞니 때문에 '다람쥐 쌤'이라고 불리는 김 선생님은 내 앞에선 항상 이렇게 말을 조금 더듬는 버릇이 있었다. 내가 내려다보자 두 손을 다소곳이 모으는 모양새가 영락없이 다람쥐다.
"그럼요. 아주 알차게 보냈습니다."
문을 열고 먼저 안으로 들어가 바로 앞에 있는 자리에 큼직한 가방을 쿵 하고 내려놓았다. 난 한 번도 창가 자리를 배정받은 적이 없다. 선생님들이 거의 만장일치로 '노 선생님이 입구 쪽에 계셔야 뭔가 든든한 기분이 든다니까요' 라면서 자꾸만 나를 클럽 문지기 취급을 해온 탓이다. 김 선생님도 바로 내 앞자리에 손바닥만 한 배낭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면서 주위를 재빠르게 둘러본 후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오... 오늘 저녁 잊지 않으셨죠?'
물론 완전히 잊고 있었다.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가방을 정리하는 척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아 예. 그럼요. 저녁 7시 일...일마레 레스토랑.'
보지 않아도 김 선생님의 얼굴이 밝아지는 게 느껴졌다. 만난 지 이제 1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모든 면면을 다 파악한 느낌이다. 김 선생님은 처음부터 내게 관심을 보였다. 같은 고향 출신이지만 같은 학교에 배정이 된 후 처음 만났다. 악수하려고 손을 내밀었을 때, 내 커다란 덩치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얼굴이 붉어지며 '어깨가 멋지시네요'라고 저도 모르게 말한 게 인상적이었다. 이후 우연히 서로 수집이라는 공통 취미를 발견하곤 대화가 잘 통해 몇 번 따로 만나 얘기를 나누며 친해졌다. 그러곤 얼마 후 내게 연애편지를 전해주었다. 처음 받아본 고백이었다. 다람쥐 선생님의 취향은 자신을 잘 지켜줄 것 같은 듬직한 사람인 듯했다. 난 내가 기지개를 켜다가 실수로 이를 부러뜨릴 것 같은 사람보단 서로 등을 맞대고 전투를 할 수 있을만한 사람이 더 취향이었지만 받아들였다. 어차피 지금까지 나를 좋다고 한 사람은 김 선생님이 처음이었고(마지막일 가능성도 고려해야 하고), 같은 고향 출신에다 학교 근처에 자신의 아파트를 얻은 재력가 집안의 자제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사귀고 보니 서로 잘 맞는 점이 꽤 많았다. 방학이라고 어디로 여행을 가자고 조르지 않는 것도, 서로의 집에 초대하길 꺼리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난 여행이라면 질색이고 또 내 집에 손님이 온다고 청소를 해야 하는 건 더 끔찍하니까. 몇 번의 시내 데이트와 고전적인 사내 비밀 연애를 시도한 후 저저번 주말 전화 통화를 하다 술김에 청혼 비슷한 걸 해버렸는데, 의외로 재빨리 오케이라는 답을 받았다. 오늘 저녁 약속은 상견례 자리를 말하는 것이다. 뭐, 내 부모님은 안 계시니 그냥 나 혼자 김 선생님의 부모님을 뵈러 가는 자리이지만.
'그... 그럼 이따가 저녁에 봬요. 화... 화이팅.'
어설픈 동작으로 두 주먹을 꽉 쥐어 보이는 김 선생님이 힘겨워 보였다. 저 응원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니다. 김 선생님에겐 매 순간에 응원과 다짐이 필요해 보였다. 당장 저 문을 열고 나가 정글 같은 교실로 들어가는 것조차 쉽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학생보다 덩치가 작아 보이는 여리여리한 김 선생님은 선생 생활이 잘 맞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냥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뭐 나도 이런 말 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학교는 그저 내게 직장일 뿐이다. 밖에 나가면 사람 구실을 하고 있다고 당당하게 만들어주는 직함과 사고 싶은 걸 사고 먹고 싶은 걸 먹게 해 주는 월급 지급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이곳에서 보람이나 의미 같은 걸 찾을 생각은 없다. 난 평생 이 동네 이 학교에서 늘 같은 불어 문법을 줄줄 읽어주다가 죽을 것이다. 얼마나 편한 인생인가. 어렵게 따로 연구를 이어가지 않아도 되고 이제 결혼해서 신식 아파트에 들어가 살면 앞으로 삶은 더욱 편해질 것이다. 김 선생님과 신혼집에 대해 잠깐 이야기 나눈 적이 있는데 큰 고민 없이 내가 김 선생님의 아파트에 들어가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내가 사는 집은 할머니와 함께 살던 집인데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물려받았다. 부모님은 내가 아주 어릴 때 돌아가셨고 다른 친적들도 없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그런데 점차 집 상태는 신혼집으로 삼기엔 어려워졌고, 김 선생님은 이런 사정을 모르지만 생활하기 편한 본인의 아파트에서 계속 살고 싶어 하는 눈치였기에 쉽게 결정이 났다. 내 집은 그대로 두기로 했다. 김 선생님도 내 집을 탐내거나 하는 눈치는 아니었고, 결혼을 하고 나서도 나만의 공간이 있는 게 나으리란 판단에서였다. 그런데 아파트가 얼마나 크려나. 내 짐을 반의 반 만이라도 넣으려면 적어도 30평대 후반은 되어야 할 텐데. 다음에 은근슬쩍 물어봐야겠다.
"와아아아악"
"야!야! 대애바아악!야!"
교실 문을 열자마자 짐승의 것인지 사람의 것인지 모를 괴성이 먼저 나를 반긴다. 어. 그래. 나도 안녕. 가끔은 내가 사파리에서 일한다는 착각이 든단 말이지. 자리에 앉으라는 말에도 오늘따라 야생동물들... 아니 학생들이 유난히 말만 많고 들을 생각을 하질 않는다. 뭐, 그러든가 말든가. 난 50분만 때우면 된다. 어차피 요즘 고등학생들은 1학년 때부터 제2외국어 따위엔 관심을 주지 않는다. 내 수업 시간에 절반 이상은 다른 과목의 문제집을 펴두거나 잠을 잔다. 3학년은 아예 자습으로 돌려버리지만 1학년은 그래도 수업을 하는 척이라도 해줘야 해서 그냥 모른 척하고 녹화방송 틀 듯 주절주절 혼자 떠들다 나온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지 다들 눈빛이 초롱초롱하다. 갑자기 불어가 필수과목에 포함이라도 된 건가. 큰일인데 그럼.
"노 쌤! 쌤도 수학여행 가요?"
아하. 오늘 원숭이들이 유달리 활기찬 이유가 이거였구만. 하여간에 어디 간다고만 하면 신이 나서들. 가운데 창가 자리에 앉은 토마토가 팔짱을 끼고 나를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아니. 내가 거길 왜 가. 담임도 아닌데."
"예에에에에? 왜요? 우리 이번에 오키나와 간대요! 일본! 쌤은 일본 가보셨어요?"
일본은 무슨. 제주도도 안 가네요. 토마토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피식 웃는 게 보였다. 저 애는 가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표정을 짓는다니까. 그러곤 이내 창밖으로 관심을 돌렸다. 이 아수라장에서 침착함을 유지한 인간으로 보이는 애는 토마토뿐이다.
"거기까지 가서 너네 뒤치다꺼리하라고? 됐네요. 그리고 우리 동네에 해변이며 산이며 좋은 거 다 있는데 거기라고 뭐 그리 다를까. 화산 빼고 다 똑같은데 뭐."
"와, 쌤. 뭐가 똑같아요! 차원이 다른데! 하여튼 쌤은 이 동네 벗어나면 뭐 병이라도 걸려요? 그런 사람이 불어 선생님은 어떻게 됐대요? 프랑스엔 가본 적도 없죠?"
"프랑스 안 가봐도 불어 다 배울 수 있거든요. 자. 이제 그만 떠들고 책 펴. 교감선생님 순찰 다닐 시간 다 돼가. 이따가 쉬는 시간에 떠들어."
학교는 다 편한데 이게 귀찮다. 수학여행이니 체험학습이니 수련회니. 자꾸 어딜 가니 마니 하면서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니까. 매년 여러 핑계를 대면서 담임 대신 도서실 사서직을 맡으려고 하곤 있지만 3년 전 운 나쁘게 1학년 담임을 맡아서 수련회에 끌려간 적이 있었다. 아 정말 끔찍했다. 그걸 또 저 멀리 경주까지 가 가지고 애들은 조련사 같은 교관한테 맡겨두고 선생들끼리 냄새나는 방구석에 모여 술파티를 벌였었다. 그때 진심으로 선생일을 그만둘까 고민했었지만 이후 필사적으로 담임을 맡지 않은 덕분에 아직까진 다닐만하다. 올해도 지원자들에게 사서 일이 아주 복잡하다는 위협을 줘서 겨우 담임을 피했는데, 나더러 알아서 수학여행을 따라가라고? 사양하겠습니다. 자고로 주말과 방학엔 집에 박혀서 웹툰이나 영화 보다가 잠들고 또 깨서 맛난 거 시켜 먹는 게 최고 아니냐고. 여행이야 책이나 영화로 얼마든지 편하게 경험할 수 있는 걸 뭐하러 돈 쓰고 에너지 낭비해 가면서 멀리까지 가나.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그럼, 봉 보야쥬 에 본 셩쓰bon voyage et bonne chance!"
"그게 뭔데요?"
"여행 잘하고 행운을 빈다고."
"행운을 왜 빌어요. 이상해. 보통은 여행 잘하고 재밌게 놀다 와, 뭐 그러잖아요."
하여튼 얘네들은 가르친 보람이 없게 한다니까. 보야제 voyager(여행하다)와 아뮈제amuser(즐기다)는 동사라는 공통점 외엔 카테고리가 완전히 다른 단어라고. 수업시간 내내 지루한 얼굴을 하던 토마토가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나가면서 얼핏 본 얼굴엔 약간 짜증이 배어있는 것 같았는데, 착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