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지희 Sep 30. 2022

3화.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안전한 곳

(장편소설) 저주 딜리버리 프로젝트


도서실 문을 열어젖히자 익숙한 냄새가 훅 풍겨왔다. 이제 좀 살 것 같네. 늦은 오후의 진한 빛에 비친 먼지가 가볍게 떠다니는 모습이 아름답다. 이 시간의 불 꺼진 도서실은 꼭 우주 속에 떠 있는 기분이 들게 한다니까. 화요일의 7교시엔 여기에 오는 게 어느샌가 당연한 일과로 자리 잡았다. 다른 선생님들은 빽빽하게 수업 스케줄이 잡혀있고 거기다 담임일까지 더해져 늘 바쁜 와중에 교무실에서 설렁설렁 쉬고 있기가 눈치 보여 도망 오기 시작한 게 버릇이 되었다. 담임직을 피하고자 사서 선생을 하겠다고 나섰는데, 막상 맡아보니 상당히 나와 잘 맞았다. 뭐, 처음부터는 아니었다.


이전 사서 담당이었던 국사 선생님은 이 일에 진심이었다. 인수인계를 한다며 불려 갔더니 십진분류법이니 뭐니 관련 서적들을 두 팔 가득 안겨주면서 환영해주셨지. 정년퇴직을 하지 않으셨다면 지금도 이 시간 이곳에서 책솔로 책장 구석구석을 쓸고 계실 것만 같다. 손잡이가 반들반들 윤이 나던 그 책솔도 꼭 쥐어주고 가셨는데 어디에 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 두껍던 십진분류법 책이랑 같이 저기 상자 더미 어딘가에 있겠지. 사실 환기도 잘 시키지 않아서 책들을 쓸어준다 해도 얼마 못 가 다시 그 자리에 곱게 내려앉을 것이다. 그리고 책장에 먼지가 좀 소복하게 앉아있어 줘야 도서실다운 도서실 아닌가. 어차피 여기에 들어오는 애들은 정말 책에 관심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숨을 곳을 찾아오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말수가 적고 혼자 있는 게 편한 아이들은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제일 구석 책장 사이로 쓱 들어가 아무 책이나 꺼내 들고 훑는 척을 한다. 저렇게 그냥 매일 주변 눈치를 보며 책장을 뒤적거리기만 할 바에야 재밌는 책이나 읽으며 책 속의 세계에 집중하는 게 나을 텐데 싶지만 모른 척한다. 여길 비밀 데이트 장소로 사용하는 아이들도 있다. 괜히 어려운 책을 고르면서 데이트 상대의 선망의 눈길을 즐기는 요망한 짓도 상당히 자주 마주한다. 책장에 등을 기댄 채 주머니에 손을 넣고 '좋아하는' 작가와 작품을 줄줄 말하는 녀석들에게 다가가 '오, 그러니? 나와 취향이 비슷하구나. 그럼 우리 세계 2차 대전이 당대 유럽 문학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한번 심도 있게 이야기해 볼래?'라고 웃으며 말을 걸어 아직 어린 얼굴의 당황한 눈빛을 즐기는 상상도 한다. 막상 '좋죠!' 라고 답해오면 또 그건 곤란하지만.


그렇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귀찮으니까. 아니, 사실은 겁이 난다. 나의 이 작고 조용한 도피처, 도서실에서의 내 평화가 저 아이들에게 밉보여 산산조각이 날까 겁이 난다. 여기에서 난 그저 책을 빌려주고, 반납한 책을 제자리에 꽂고, 연체되거나 분실된 책의 범인을 담임 선생님에게 알려주는 일만 하면 된다. 외로운 아이에게 책 추천을 해 새로운 미래로 인도하거나 허세를 부리는 아이의 콧대를 꺾은 후 진실된 말을 하게 한다는 둥의 소설 속에 나올 법한 사서 선생님은 될 생각이 없다. 그러다 정말 다른 외로운 아이들과 진정한 독서 토론을 바라는 아이들이 이곳에 몰려오면 어쩌려고. 난 그냥 이 한적한 도서실에서 맡은 일만 적당히 하면서 이렇게 고요한 화요일 오후를 보내는 게 만족스럽다.


처음 도서실에 들어섰을 땐 국사 선생님이 워낙 자주 환기를 시키고 깔끔하게 정리를 해둔 탓에 지금 같은 공기를 머금고 있지 않았다. 내가 도서실을 인계받은 후 몇 개월이 지나서야 겨우 내게 익숙한 냄새와 묵직한 공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익숙한 공기. 우리 집과 비슷한 공기를 머금은 장소가 이 학교에 있다는 게 너무도 안심이 된다.


아무렇게나 쌓인 상자 더미 옆에 열댓 권의 책들도 마구잡이로 쌓여 있었다. 점심시간에 반납된 책들이다. 원래는 내 책상의 왼쪽에 '반납'이라고 코팅된 종이가 붙여진 오래된 나무 상자에 책을 넣어야 하는데, 다른 짐 상자들에 묻힌 지 오래되어 아이들도 어느샌가 그냥 적당한 빈 곳에 올려두고 가버린다. 너무 많이 쌓이지는 않게 내 기준으로는 꽤 자주 책들을 챙겨 제자리에 꽂지만, 올려둔 책이 책상 구석이나 짐 상자들 사이로 떨어지는 경우가 있는지 분명 반납했는데 연체됐다는 꾸중을 들었다고 항의를 하는 학생이 몇 생겨났다. 그래서 요즘은 연체된 책이 뜨면 담임 선생님을 보러 가기 전에 먼저 내 책상 주위를 뒤적거린다. 절반 이상은 그렇게 찾아냈다.


오늘도 아슬아슬하게 쌓인 책 탑을 번쩍 들어 책장 쪽으로 갔다. 체력은 별로지만 체격은 좋아서 힘쓰는 일엔 예전부터 자신 있었다. 평소 나를 그렇게 믿음직스럽게 보지 않던 국사 선생님도 책들을 번쩍 들어 나르는 모습을 보고는 사서 자리를 넘겨주기로 했다고 한다. 다행히 이곳 책장 사이의 간격은 우리 집 복도보다는 넓어서 책들을 가득 들고도 조심스럽게 지나다니지 않아도 된다. 내 책상 근처는 이미 우리 집처럼 '산'이 쌓이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책장 구역은 나름 원상태를 잘 유지하는 중이다. 간혹 교감 선생님이 순찰을 돌다 도서실로 불쑥 들어와 핀잔을 주는 것 외엔 아무도 내게 뭐라고 하지도 않는다. 다람쥐 선생님, 아니 김 선생님도 나를 만나러 몰래 도서실에 올 때 쌓인 짐들을 보고 조금 놀란 눈치이긴 하지만 '내' 짐이 아니라 도서실에 필요한 물품이나 책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지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하나하나 책 등을 확인해가며 책장을 채우는 데 오늘따라 유달리 일본 여행에 관련된 책이나 일본 소설이 많았다. 어제 분명 1학년 애들이 들떠서 잔뜩 빌려갔었지. 아직 한 달이나 남았는데 벌써부터 저렇게 신이 나서들. 뭐가 그렇게 좋을까.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비행기 타고 간다던데 하필 그 비행기가 사고가 날지 누가 알아. 그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가서 한국이랑 별 다를 것 없는 풍경을 보고 별 특별할 것 없는 음식을 먹고 별 이상한 사람들을 만나고 별 쓸데없는 기념품을 사 오겠지. 아니, 일본의 풍경이 보고 싶으면 일본 기행 다큐멘터리를 보면 되고, 일본 음식이 먹고 싶으면 시내에 있는 라멘집에 가면 되고, 일본 사람을 만나고 싶으면 인터넷 채팅방에 접속만 하면 되고, 싸구려 기념품이 갖고 싶으면 하루 만에 택배로 더 저렴한 값에 받아볼 수 있는 것을. 굳이 왜 그런 위험을 각오해 가면서 바다를 건너겠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난 대학교 때를 제외하고 이 동네를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다. 대학도 이 동네와 가장 가까운 도시에 있었기 때문에 매일 통학을 했다. 가깝다고는 하지만 왕복 세 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는 게 함정이지만. 월세방을 구할 돈은 없었고, 어렵게 들어간 기숙사에선 한 달 만에 쫓겨났다. 네 명이서 쓰는 작은 방엔 내 짐이 차고 넘쳐 내 자리는 물론이고 공용 공간에까지 침범하는 바람에 아무도 나와 방을 쓰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가에 있는 짐을 다 끌고 오면 어쩌니. 당장 필요한 것만 챙겨 와야지'라고 혀를 차시던 사감 선생님에겐 차마 '본가엔 이 짐들의 수십 배가 되는 양이 더 있고 나름 당장 필요한 것만 챙겨 온 게 이 정도'라는 말은 덧붙이지 못했다. 그저 묵묵히 네 개의 캐리어를 꾹꾹 채워 택시 기사님의 불평을 들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 이후론 난 단 한 번도  '이사'를 한 적이 없다.


나의 동네, 나의 학교, 나의 집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안전한 곳이라는 생각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견고해졌다. 곧 김 선생님과 살림을 합치면서 다른 집에 살게 되겠지만 언제든 쉬러 올 수 있는 나의 집이 있다는 게 안심이 된다. 그렇잖아도 최근 들어 집 안의 '산'이 점점 위태위태해져 가던 차였기 때문에 짐을 좀 나눌 곳이 생길 테니 오히려 잘 된 일 같기도 하고. 대학생 이후 십 년만의 첫 '이사'가 다가올 것을 생각하면 조금 두렵긴 하지만, 이젠 어른이니 이 정도의 위험은 감수할 수 있어야지. 그래. 위험은 이럴 때 감수하는 거지. 여행 같은 일로 낭비할 시간과 돈이 있다면 집을 관리하고 보호하는 데 쓰는 게 낫지. 그게 어른의 현실적인 고민이 아니겠어.


마지막 책을 꽂고 나니 기다렸다는 듯 수업종이 울렸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평소엔 책 정리를 마치고도 십여 분 정도의 여유시간이 남는데 오늘은 공연히 수학여행 때문에 반납된 책이 많아서 더 오래 걸렸다. 도서실을 좋아하긴 하지만 이곳에 느긋하게 앉아 커피를 마셔본 적은 거의 없다. 대출과 반납 외엔 딱히 할 일이 많은 게 아닌데도 책상 옆을 뒤지고 책장의 책 사이를 겨우 벌려 반납된 책을 겨우 욱여넣다 보면 시간이 금세 지나가 있었다. 그래도 처음 인계받았을 땐 오랜만에 프랑스 고전문학도 좀 꺼내 읽어보고 커피도 타 와서 마시고 할 시간이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요즘 집에서도 책을 읽거나 차 한 잔을 마실만한 여유를 가진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도 그럴게 주로 핸드폰으로 쇼핑을 하느라 그런 것도 있지만 일단 편안히 앉아 독서를 할 만한 공간이 없다. 거실의 소파 위엔 눕지 않고는 자세를 잡을 수 없게 옷과 이불들이 쌓여있고, 내 방엔 앉을만한 작은 공간이 있긴 하지만 사방의 '산'에 기대기라도 했다간 또 산사태가 일어날 것이고, 마당에 야외 테이블 세트가 있긴 하지만 녹이 슬어서 한 무게 하는 내가 앉으면 받침에 구멍이 뚫릴 위험이 있다. 명색이 불어 선생님이지만 불어 신문이나 원서는커녕 번역된 프랑스 문학을 읽어본 지도 한참 된 것 같다. 어차피 고등학교에서 수업하기엔 지금도 별 무리는 없지만. 아, 그렇군. 김 선생님의 아파트엔 공간이 있지. 이참에 각자의 서재를 만드는 건 어떨까. 아파트에 방이 세 개라고 했지. 그럼 방 두 개를 서재로... 옷방도 만들어야 하는데. 그럼 방 하나를 옷방으로 하고 다른 방 하나엔 큰 책상 두 개를 넣자. 암체어도 두고 싶은데 그건 안방엔 자리가 있으려나.


머릿속으로 임시로 도면을 그려 암체어를 베란다에 두는 건 어떨까 상상해보고 있는데 교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밤부터 시작될 태풍에 대비해 오늘 야간 자율 학습은 취소된다는 공지였다.



도서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