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지희 Sep 26. 2022

1화. 물건들이 사방에서 달려들기 시작했다

(장편소설) 저주 딜리버리 프로젝트


뭔가가 배 위로 떨어지면서 잠에서 깼다. 어젠 머리였는데. 다행이다. 그래도 그 뭔가가 각진 물건이었던 모양인지 꽤 아프다. 그렇다고 배를 붙잡고 뒹굴어선 안 된다. 곧이어 더 많은 것이 머리와 등 위로 쏟아져 내릴 수도 있다. 이젠 최대한 가만히 있으면서 고통을 삭히는 법을 터득했다.


"아으..."


소리는 내도 괜찮으니 좀 울어본다. 한낮일 게 분명하지만 어둑어둑한 집안에서 나는 긴 비명소리가 상쾌한 주말을 활기차게 맞이한다. 그런데, 주말 맞겠지? 어제  '다음 주에 봅시다'라는 인사를 들은 기억이 얼핏 나긴 하는데. 핸드폰이 어디에 있더라. 오른팔을 슬쩍 들어 반경 20센티미터 이내를 더듬어보지만 각종 쓰레기만 느껴질 뿐 길고 딱딱한 직사각형의 물체는 잡히지 않는다. 부엌에 두고 왔나? 어젯밤 뭘 했는지 기억을 애써 뒤지고 있는데 갑자기 귓바퀴부터 눈동자 뒤편까지 꽝 하고 충격이 느껴졌다. 머리 밑에 깔려있던 핸드폰이 엄청난 소리를 내며 울어대기 시작한 것이다.


"우왁!"


강한 충격에 놀라 벌떡 일어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이런.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물건들이 사방에서 달려들기 시작했다. 갖가지 부위들에 안겨드는 물건 하나하나가 슬로모션처럼 눈에 들어왔다. 어, 저 잡지가 여기 있었네. 저 액자는 누구 사진이지. 호박은 왜 여깄는 거야. 오, 소면도 있네. 맛있겠다. 점심으로 비빔국수 시켜 먹어야지.  우왁. 저 전집은 맞으면 아프겠... 으와악.


이번 '산사태'는 좀 셌다. 전집을 '정상'에 쌓아두는 실수를 하다니. 한심하군. 원래 전집은 기초를 받쳐줘야 안정적인데. 어제 금요일 밤이라고 신나서 전집을 탁상 삼아 술상을 펼쳤더니 이런 실수를... 아. 그렇군. 어제 그러고 전집 채로 들어서 저 산(이었던 곳)에 용케도 올려두고 잠이 들었었지. 그럼 이 근방에 소주병이랑 땅콩봉지도 깔려있단 얘긴데. 찾아야 하나. 뭐, 둘 다 거의 비었을 테니 굳이 서두를 건 없겠지. 일단 핸드폰이나 찾자.


10분은 지났을까, 겨우 핸드폰으로 추정되는 물체를 집어 들었다. 설마 했지만 역시 액정이 깨져 있었다. 올해 들어 네 번째다. 아니, 다섯 번째인가? 아무튼. 이놈의 회사들은 뭐 이렇게 물건을 부실하게 만드는 건지. 저번에 어디선가 강력 액정보호케이스인가 뭔가를 광고하는 걸 본 것 같은데. 그걸 쓰면 앞으로 이런 '산사태'가 나도 안심할 수 있으려나. 아직 무너진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잠자리(였던) 곳 위에서   '강력 액정보호 케이스'를 검색했다. '과격한 액티비티 활동에도 끄떡없는', '망치로 두드려도 멀쩡한' 같은 광고성 홍보글 사이를 헤엄치며 주말의 첫 쇼핑을 시작했다. 제일 저렴한 걸 찾자. 오 9,900원 이면 거의 공짜인데? 저번에 액정을 가는 데 10만 원 정도 들었으니 10개를 사도 남는 장사잖아. 마침 5개를 사면 3만 원에 준다고? 이거면 한 3년은 든든하겠어. 2세트 주문하자. 그전에 핸드폰을 바꿀 수도 있겠지만... 뭐, 싼데 모자라는 것보다 남는 게 낫지. 저번에 광고 보자마자 바로 주문했어야 하는 건데. 괜히 고민하는 바람에 오늘 결국 이 사달이 났네. 얼른 주문하자.


약 1시간 정도의 짧은 쇼핑을 마치고 나니 배가 고파왔다. 벌써 오후 4시다. 아. 그럼 국숫집 브레이크 타임이잖아. 에이. 한 시간은 더 기다려야 한다. 그나저나 오늘 날씨도 여전히 후덥지근하다. 가을은 아직인가 보다. 일단 에어컨부터 켜자 싶어 그나마 안전해 보이는 지점을 짚고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물건들이 꽤 높이까지 쌓여 있었지만 큰 키 덕분에 왼쪽 창에서 슬며시 들어오는 한여름의 뜨거운 빛과 건넛방 문이 보였다. 중간에 분명 주방의 테이블이 있겠지만 물건들이 가득 쌓인 또 다른 '산'만 보일 뿐이다. 에어컨은 거실 소파 옆에 있다. 내 방에도 벽걸이형을 하나 달고 싶었지만 기사님들이 내 방에 들어오셨(들어오시려고 시도 했)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곤 그냥 가버리셨다.


"아니, 누구 다치는  보고 싶으세요? 여기서 무슨 작업을 합니까. 그리고 이렇게 방이   있으면 공기 순환이 안돼서 설치 하나마나예요. 여기 정리 부터 하시고 그때 다시 부르던지 하세요."


다행히 거실 에어컨은 10년 전부터 설치가 되어있었는데, 오래되어서 성능이 그렇게 좋지는 않다. 바꾸려고 해도 같은 핀잔을 들을 것 같아서 일단 작동하는 것에 만족하며 지낸다.


방문(이 있던 곳)으로 나오자 복도의 오른쪽 끝에 목표물이 보였다. 우리 집은 평범한 오래된 주택이지만 요즘 나오는 신식 아파트처럼 복도가 있다. 그것도 그냥 평범한 복도가 아니라 아주 예술적이다. 산처럼 쌓인 물건들 사이로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비좁은 통로는 우리 집의 시그니처 인테리어라고 할 수 있다. 좀 불편하긴 하지만 예술이 꼭 편의와 이어지는 건 아니니까. 통로는 현관에서부터 소파 앞과 텔레비전 사이를 지나 왼쪽의 욕실, 그 옆의 내 방문, 그리고 오른쪽의 주방 싱크대까지 이어진다. 이 집엔 내 방 맞은 편의 창고 방과 그 옆의 안방이 더 있지만 그곳으로 이어지는 통로는 끊긴 지 오래되었다. 난 저 통로 너머 우주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모른다. 갈 곳 잃은 노숙자가 몰래 들어와 저 방들 중 하나에 숨어 매일 밤 소주를 깐다 하더라도 알 길이 없다. 그래도 이따금 집 바깥에 난 창으로 안을 확인해야 한다. 쌓인 물건들 사이로 꾹 닫혀 있는 자개장을 유심히 들여다본 후 안심하고 집으로 다시 들어오면 그날의 방범 체크 완료.


평범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의 통로지만, 나는 평범한 체구를 갖고 있지 않은 덕분에 게처럼 옆으로 슬금슬금 미끄러져서 겨우 에어컨 앞에 도착했다. 소파 끝으로 추정되는 물체를 왼쪽 무릎으로 딛고 긴 팔을 쭉 뻗어 전원 버튼을 눌렀다. 분명 어딘가에 리모컨이 있을 테지만, 난 그게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그나마 키가 커서 다행이다. 평소엔 큰 키가 별 도움이 되지 않지만 이럴 땐 확실하게 유용하다. 지금보다 키가 15센티미터 정도만 더 작았어도 에어컨도 켜지 못하고 '산'너머의 햇빛도 보지 못했을 테니까. 사람은 신체의 길이만큼 생활 반경이 허용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대신 넓은 어깨와 퉁퉁한 몸매는 어느 때도 유용하지 않다. 점점 좁아지는 복도 때문인지, 몸이 점점 더 붓고 있는 건지, 요즘 들어 더 자꾸 여기저기에 치이는 것 같다. 몸에 멍자국이 늘어난다. 누가 보면 레슬링 선수라도 되는 줄 알겠다. 이 덩치, 수많은 멍자국. 내가 유능한 운동선수가 아니라 그저 체격 좋은 일반인이란 걸 알려주는 건 불룩 튀어나온 배와 퍼석퍼석 가루라도 떨어질 것 같은 내 피부일 것이다.


이번엔 몸을 천천히 돌려 텔레비전 쪽으로 향했다. 이 집에선 모든 동작을 천천히 해야 한다. 텔레비전도 기사님이 포기하고 가시려는 걸 웃돈을 얹어주며 겨우겨우 사정해서 설치했다. 티비장은 어딨냐 시기에, 있는 책들을 정성껏 쌓아드렸다. 작년에 티비장을 사두긴 했지만 어디로 옮겨 두었는지는 모른다. 덕분에 화면이 약간 기울어졌지만 어차피 정자세로 앉아 텔레비전을 보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에 상관없다. 안경집과 면봉 통 사이를 헤쳐 전원을 켰다. 텔레비전 리모컨도 행방불명이다. 마지막으로 썼을 장소를 떠올리면 소파 근처 어딘가에 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소파 위로 천천히 몸을 굴렸다. 소파에도 물건들이 가득했지만 이불이나 옷가지처럼 부드러운 물건들만 쌓여있기 때문에 이 집에서 유일하게 몸을 안전하게 던질 수 있는 장소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버튼을 누르니 깨진 액정 사이로 네 시 이십사 분이라는 숫자가 떴다. 다섯 시까지 텔레비전이나 보면서 시간을 때울 작정이다. 어제 술을 먹다가 흘린 건지 옷 여기저기에 이상한 자국이 가득하고 밤새 흘린 땀으로 시큼한 냄새가 배어있지만 아직 샤워를 할 생각은 없다. 월요일 아침이 되어야 급히 씻고 나갈 것이다. 어차피 집 안에 박혀있는 주말 동안 씻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 씻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집안 곳곳을 항상 배경음악처럼 떠다니는 먼지와 냄새로 다시 더럽혀질 테니까. 샤워는 외출 직전에만. 내 비법이다.


"어젯밤 11시경 00시 00 아파트에서 불이 나 모든 주민이 대피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심각한 인명피해는 없었으나, 몇몇 세대의 집 안은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훼손되어 피해가 클 것으로 보입니다. 000호에 살던 000 씨의 증언에 따르면..."


뉴스 말고 재밌는    하나. 채널을 돌리고 싶지만 그러려면 다시 몸을 일으켜  멀리 있는 화면까지 다시 걸어가야 한다. 귀찮음이 지루함을 이겼다. 그나저나  사람들은 이제 어쩌나. 자가가 아니어야  텐데. 그래도  안에 있는 짐들은    있을까. 쯧쯧. 그래서  곳곳에 소화기를 둬야 한다니까. 저번에 비슷한 뉴스를 보고 얼른 소화기  개를 주문해서 현관과 주방, 소파 , 그리고  방문 앞에 두었다. 이젠 빨간 원통이 슬쩍 보일만큼 다른 물건들에 가려져있긴 하지만 어쨌든 집구석구석에 배치해 두었으니  정도면 안심이다.  애초 요리도 거의  하고 담배도 피우지 않으니 불이  일은 없다고 보면 되지만.


"다음은 날씨입니다. 강하게 발달한 태풍 수우호가 한반도를 향해 빠르게 북상하고 있습니다. 태풍은 수요일인 5 새벽에 경남 남해안에 상륙할 것으로 기상청은 예상했습니다. 태풍이 북상하면서 수요부터 목요일 오전까지는 전국에 거센 비바람이  것으로..."


흠. 이번 태풍은 좀 센 모양이다. 그럼 휴교령이 내려지려나? 수요일엔 늦잠 잘 수도 있겠는걸. 준비는 뭐 보고 하던 대로 하면 되겠지. 아, 테이프 말고 창문 전용 스티커라는 걸 인터넷에서 본 것 같은데. 나중에 주문해야겠다. 하암. 아직 문 열려면 10분이나 더 남았네. 혹시 일찍 열었을지 모르니까 전화해 봐야겠다. 비빔국수~비빔국수~


"... 기상청은 특히 태풍의 이동 경로와 가까운 제주도와 경남 해안에는 순간적으로 초속 40미터가 넘는 돌풍과 최대 400밀리미터 이상의 비가 내릴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피해가 없도록 철저히 대비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