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저주 딜리버리 프로젝트
가끔은 투명인간이 되고 싶다. 특히 퇴근할 때.
"노 씨! 이쪽으로 좀 와 봐요."
퇴근길은 항상 기분이 좋지만 집 근처 골목에 다다를 때면 심호흡을 해야 한다. 투명하긴 커녕 뚜렷하고 거대한 몸집이 어딜 가나 눈에 띄는 바람에 오늘처럼 가던 길을 가로막힐 수 있기 때문이다.
"아, 거 참. 좀 더 제대로 밀어봐요. 그 힘은 뒀다 뭐하게. 해 지기 전에 끝내야 한단 말이오."
어느새 주변에 주민들이 몰려나와 나와 횟집 사장님이 큰 물탱크를 창고 안으로 밀어 넣는 광경을 구경했다. 젠장. 내가 왜 남의 집 물탱크가 망가질까 걱정해야 하는 건데. 회는 좋아하지도 않는데 싸줄 테니 힘 좀 써보라는 소리를 들어야 하냐고. 사장님은 처음엔 나를 노 선생님이라고 하더니 어느샌가 노 선생, 그리고 노 씨로 호칭을 바꿔 불렀다. 분명 이렇게 힘쓸 일 있을 때마다 핑계를 대고 빠져나가는 나를 못마땅하게 봐서일 것이다. 오늘은 아예 작정을 하고 나를 기다렸는지 내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나를 물탱크 앞으로 끌고 가더니 다짜고짜 밀기 시작했다.
"태풍 온다니까 다들 난리네요. 우리 집도 창문에 테이프 붙였어요."
"우리 집은 뒷마당에 큰 나무가 좀 걱정입니다. 작년 태풍 때도 큰 가지가 날아가서 창고 지붕에 떨어졌는데, 올해엔 좀 잘 버텨줘야 할 텐데 말이지요."
그러고 보니 횟집 말고도 다들 분주하다. 차고가 있는 사람들은 차고 안에 차와 야외 용품들을 죄 집어넣고, 가게 사장님들은 가게 간판의 나사를 다시 고정하고 입간판을 모두 안으로 들인 후 철문을 내리고, 공터에 텃밭을 만들어둔 한 할머니는 서둘러 고추를 비닐봉지에 따 넣었다. 물탱크를 창고에 겨우 밀어 넣고 등을 돌리자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주민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았다. 이크. 얼른 도망가야겠다. 분명 트럭에 천막을 씌우는 걸 도와달라느니, 지붕에 올라갈 때 사다리를 잡아달라느니 하는 부탁을 해올 것이다. 공연히 핸드폰을 꺼내 약속이 있는 것처럼 재빨리 그곳을 빠져나왔다. 뒤에서 횟집 아저씨가 회를 가져가라고 소리치고 할머니 한 분이 뭐라 말하시는 것 같았지만 기다란 다리로 성큼성큼 도망가는 나를 아무도 따라잡진 못했다.
대문을 걸어 잠근 후 가쁜 숨을 내쉬었다. 힘은 좋아도 체력은 타고나질 못했다. 어휴. 이게 무슨 고생이야. 자기 집은 자기가 알아서 책임져야지. 나라고 돈이 남아돌아서 사람 불렀나. 거대한 태풍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다음 날 나는 조경 업체에 전화해서 앞마당의 나무를 베어버렸다. 창문은 테이프로는 불안해서 강력 스티커를 넉넉하게 주문해 도배 집 사장님에게 맡겼고, 여기저기 덧댄 흔적이 가득했던 지붕은 재작년에 싹 새로 갈았다. 마당에 널려있던 테이블 세트와 각종 도구들은 조경 업체 사람들에게 웃돈을 얹어주고 창고 안으로 모두 들여놓았다. 창고에 자리가 부족해 생각보다 오래 걸리긴 했지만.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마친 집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성 같아 보였다. 대문 뒤에 서서 한동안 집을 바라보았다. 그래. 대비는 이렇게 하는 거지. 뭐, 인건비가 생각보다 더 들어서 통장은 완전히 텅 비어버렸지만. 나무가 지붕에 떨어지고 창문이 깨지고 물건들이 날아가버리는 것보다는 낫지. 돈과 시간은 이런데 쓰려고 버는 거다.
그때 대문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크게 났다. 바람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폭풍전야에 걸맞게 고요하던 날씨는 이제 슬슬 화를 낼 조짐을 보인다. 학교는 내일 휴교를 하기로 결정했다. 기상청은 이 지역의 태풍은 내일 오전 중에 지나갈 것이라고 예보했지만, 바닷가 동네인 만큼 피해를 입을 수 있는 학생 가족이 많을 것이라고 판단해 각자 집에 머무르는 게 낫다고 본 모양이다. 김 선생님에게 뒤늦게 회의 내용을 전달받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내일 하루 종일 집에 있을 수 있다. 안 씻어도 되고 늦잠도 잘 수 있다. 태풍이 좀 더 길게 지나가도 좋을 텐데. 나의 안전한 성에서 바람소리를 들으면서 밀린 드라마나 봐야지. 주말에 라면과 냉동 볶음밥을 잔뜩 주문 해두길 잘했다. 그리고... 일단 오늘 저녁까지는 배달이 되는 곳이 있을 테니 삼 인분 정도 넉넉하게 주문해서 내일 점심까지 먹을 수 있게 해야겠다. 오늘 밤은 재난 영화 속에서 고립된 상황을 연출할 수 있겠는 걸.
밤 10시가 넘었을 때 즈음 멀리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미처 제대로 고정하지 못한 간판이 날아가 차나 벽에 부딪히는 소리일 것이다. 얼마 뒤 희미하게 엠뷸런스 사이렌이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드라마가 끝나고 핸드폰으로 뉴스를 틀었다.
"... 현재 시각 태풍 수우호는 제주를 지나 경남 해안에 상륙한 것으로 보입니다. 중심 풍속도 초속 40미터 이상, 시속 156km 정도로 아주 강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가로수가 쓰러지고 정박해 있는 배들이 위험하게 요동칠 정도의 위력입니다. 주민들은 현재..."
우리 동네와 비슷해 보이는 한 바닷가 마을이 화면 속에서 검게 요동치고 있었다. 우리 집 근방도 저 모습과 비슷하겠지. 생각보다 더 강력한 모양인데. 내년엔 창문에 강력 스티커만 붙일 게 아니라 덧문 같은 걸 달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우리 집은 창이 하나라도 깨져서 빗물이 새어 들어오기 시작하면 끝장이다. '산'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건 책이고, 나머지 물건들도 상자에 대충 들어가 있어서 물에 젖으면 복구하기 어려운 것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저번에 싱크대에서 작은 물난리가 난 이후로 주방 근처에 있는 짐들은 인터넷에서 세트로 구매한 플라스틱 정리함에 죄다 집어넣었다. 다른 곳에 있는 짐들도 모두 플라스틱 정리함에 넣어보려고 했지만 하나를 건드리면 열이 쏟아져버려서 도무지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수십 개의 정리함은 일단 현관 구석에 쌓아두었다. 언젠가 저금이 좀 더 쌓이면 정리 전문가를 불러서 죄다 정리함에 넣는 작업을 진행해야겠다. 정리도 하고 아파트로 짐들을 좀 옮겨가고 나면 통로도 좀 넓어져서 화장실이 급해도 조심조심 걸어야 하지 않아도 되겠지. 이번 달 월급은 이미 태풍을 대비하는 데 다 써 버렸다. 배달음식도 당분간은 자제해야겠다. 애초에 저금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물려받은 집이지만 이미 내 집이 있고, 아주 오랫동안 학교에서 나오는 월급은 끊기지 않을 것이다. 차를 살 필요성도 못 느끼고 여행 같은 취미를 위해 큰돈을 모아야 할 이유도 없다. 그때그때 필요한 물건을 주문하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너무 덥거나 춥지 않게 관리비만 꼬박꼬박 낼 수 있을 정도의 월급이면 충분하다. 이번 태풍 대비나 지난번 지붕 수리 같은 큰돈이 나가는 일엔 부모님의 보험금을 조금씩 꺼내서 충족하면 된다. 근데 보험금이 얼마나 남았더라...
그때였다. 남은 마라탕의 뚜껑을 덮고 있는데 갑자기 주변이 팍 하고 어두워졌다. 정전이다. 이건 계산 안 했는데. 근처 전봇대 하나가 결국 넘어간 모양이다. 텔레비전 소리가 사라지자 갑자기 집안에 태풍이 들어온 것처럼 바람소리가 통로를 타고 웅웅 울리기 시작했다. 주방 쪽 창에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그쪽 방향에서 더욱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한참을 더듬거린 후 핸드폰을 찾아 플래시를 켰다. 조심스럽게 발 밑을 비추고 소파에서 내려왔다. 정확하게 말하면 미끄러져 내려왔다. 전단지와 과자 봉지 사이의 틈을 찾아 천천히 발을 옮겨 통로 쪽으로 들어섰다. 어둠 속에서의 '산'은 더욱 거대해 보였다. 빛 속에서는 나름대로 잘 보이던 통로의 길이 약한 플래시 빛으로는 바로 앞 말고는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발밑만 비춘 채 슬며시 통로로 지나가는데 뭔가가 눈앞에 훅 다가왔다. 깜짝 놀라 플래시를 비추니 효자손이 아슬아슬하게 걸려 통로로 튀어나와 있었다. 이건 또 뭐야. 한숨을 내쉬곤 효자손을 집어 멀리 안방 쪽으로 집어던진 후 다시 정글, 아니 통로를 헤쳐나가기 시작했다.
십 분정도 지났을까, 겨우 산사태를 일으키지 않고 주방에 도착했다. 플래시 빛 만으로 저 통로를 무너뜨리지 않고 지나오다니. 기적이다. 일단 바람소리의 원인으로 추적되는 주방 창 쪽으로 플래시를 가져다 댔다. 각종 병과 양념으로 가려져 잘 보이지 않지만 주방엔 가로로 길고 폭이 좁은 창이 나 있다. 그리고 그 창이 이십 센티 정도 열려 있었다. 그곳에도 강력 스티커를 붙여달라고 맡겼는데 도배 업자분이 작업을 하곤 창문을 조금 열어둔 채로 가 버리신 것 같다. 스티커를 집 안에 붙여야 한다고 하시는 걸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바깥에서 붙여달라고 했더니 집 안에 뭘 숨겨뒀는지 궁금해서 열어보신 게 분명하다. 금방이라도 혀를 찰 것 같은 표정으로 작업비를 받으시더니, 그래서였구만.
얼른 창문을 닫아 잠그고 플래시로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부엌 바로 앞엔 담이 있어서 비가 많이 들어찬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여기저기 쌓여있던 배달 용기와 페트병들이 마구잡이로 흩어져있는 모습이 그다지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다. 태풍이 지나가고 나면 분리수거는 해줘야겠구먼. 할 일이 눈앞에 나타나자 갑자기 피곤이 몰려왔다. 밤새 태풍 속에서 평화롭게 고립 놀이나 하려던 계획은 취소. 일단 자고 내일 놀자. 전기도 내일이면 들어오겠지. 다시 조심스럽게 플래시 빛을 따라 방으로 들어가 옷도 갈아입지 않고 대충 물건들을 옆으로 밀어 어제보다 조금 더 좁아진 공간에 몸을 눕혔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익숙하지 않은 냄새가 방 안에 들어차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