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저주 딜리버리 프로젝트
이 냄새, 낯설다. 낯선 것은 좋지 않다. 늘 익숙한 풍경과 소리, 냄새가 나를 안심하게 만들어주는 게 집의 역할이 아니었나. 혹시 내가 지금 우리 집이 아니라 다른 곳에 누워 있는 건가. 그렇지 않고선 이 낯선 냄새를 설명할 길이 없는데. 눈을 슬며시 떴다. 오. 풍경도 낯설다. 정말로 우리 집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자리에 누운 지 분명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으니 어두컴컴한 천장이 보여야 하는데 뭔가 생각보다 더 밝다. 저 붉은빛은 뭐지. 가로등 불빛인가. 눈곱이 잔뜩 낀 건지 눈앞이 상당히 흐리다. 손을 들어 눈을 비비려는데 무언가에 부딪혔다. '산'이다. 아슬아슬하게 잔뜩 쌓여 있는 물건들의 '산' 사이에 난 누워있다. 어... 그렇담 우리 집이란 말인데. 그때 또 하나의 낯선 감각을 인지한다. 어디선가 슈우우우 탁타닥 탁 하는 작고 연속적인 소리가 들려온다. 들어본 적이 있는 소리다. 어디서 였지. 다시 눈을 감고 생각을 집중해본다. 기억나지 않는다. 귀찮다. 그냥 이대로 다시 잠들어버리고 싶다. 몸도 점점 무거워지는 것 같다. 꿈이었나. 이상한 꿈이다. 내 방 창으론 가로등이 보이지 않는다. 눈곱이 가득 낀 채로 가로등이 보이는 방에 누워 장작 타는 소리를 듣는 꿈은 무슨 의미가...
엇. 다시 눈을 번쩍 떴다. 이젠 확실히 알겠다. 이건 꿈이 아니다. 붉고 뿌연 풍경, 매캐한 냄새, 장작 타는 것 같은 소리. 그리고 이 한가운데 누워있는 나. 벌떡 일어났다. 아니, 머릿속에선 벌떡 일어나야 했지만 몸이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힘겹게 팔 하나를 들었다. 몸이 무거워지는 것 같다는 느낌은 졸린 탓이 아니었다. 중독 증상이 나타나고 있다.
"포... 폰...."
정보 하나. 말은 아직 할 수 있다. 겨우 든 팔 하나를 힘겹게 휘적거리며 근처에 누워있을 휴대폰을 찾았다. 그 사이 크고 작은 물건들이 내 위로 떨어졌지만 별다른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건 좀 편리하군. 소주병으로 추정되는 물체 아래에서 휴대폰을 찾아 가까스로 눈앞까지 가져왔지만 팔 힘이 없어 휴대폰을 얼굴 위로 떨어뜨렸다. 이건 좀 아프다. 휴대폰이 떨어진 쪽으로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다행히 얼굴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위치에 화면이 켜진 채로 놓여있다.
"시... 시리야."
반응이 없다. 목소리를 내는 게 점점 더 힘들어진다. 나랑 함께한 세월이 얼만데 그냥 '야'라고만 해도 알아들을 때가 되지 않았니.
"시... 콜록. 크흠. 시... 시리야. 시리야."
"네. 말씀하세요."
아 하느님, 시리 님 감사합니다. 눈물이 난다. 연기 때문에 아까부터 줄줄 흐르고 있긴 했지만 이런 상황엔 눈물 좀 흘려줘야지.
"119..."
"잘 못 알아 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해주세요."
경쾌하고 정확한 발음이 나를 약 올리는 것처럼 들린다. '119에 전화해 주세요'라고 이렇게 똑바로 말하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렵냐는 듯이. 화가 나지만 참아야 한다. 지금 나를 구원해줄 이는 이 분뿐이다. 내 마지막 눈물 한 방울이 똑 떨어져 기적처럼 시리 요정이 핸드폰에서 나와 내게 새 숨을 불어넣어 주진 않을 것이다. 내 숨은 내가 알아서 구해야 한다.
"119에 전화해."
정신을 집중해 작은 소리지만 최대한 정확하게 말했다. 몇 초 후 띠리리리 하는 익숙한 신호음이 작게 들려왔다. 됐다! 스피커폰으로 전화하라고 하는 걸 까먹었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냐. 작은 목소리여도 내 긴급성은 충분히 전달될 것이다.
"119입니다."
"불... 불이 났어요."
"네?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오늘따라 나한테 왜들 이러세요.
"집에... 불이 났어요. 못... 움직이겠어요."
"태풍 피해가 아니라 불이 났다는 말씀이십니까? 어... 알겠습니다. 주소가 어떻게 되십니까?"
두세 번 정도 반복해서 겨우 주소를 부르는 동안 핸드폰 너머에서 타자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알겠습니다. 저희 대원들이 출동하는 동안 가능하다면 빨리 집에서 빠져나오십시오. 창문이든 뒷문이든 탈출구라면 뭐든 좋습니다."
"못... 움직이겠어요..."
"그렇다면 최대한 연기 아래쪽에 몸을 피하고 계세요. 아직 거기 계십니까? 가능하면 젖은 옷 등의 천가지로 코와 입을 막으십시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곧 대원들이 도착할 겁니다."
저기요 선생님. 자꾸 불가능한 미션을 주시면 어떡해요. 부엌도 욕실도 물 있는 곳까지 가려면 얼마나 길이 험난하고 먼지 아세요?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해야 할 말은 단 하나뿐이었다.
"네... 빨리 와주세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이제 내게 다시 한번 말하라는 사람도 핸드폰도 없다. 도착한 소방관이나 구급대원이 이름을 다시 한번 똑바로 말하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소방차가 도착하려면 얼마나 걸리지. 다행히 소방서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런데 희미하게 들려오는 바람소리로 짐작컨대 아직 태풍이 완전히 지나가지 않은 것 같다. 오는 길이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때까지 난 뭘 해야 하지.
선택 1. 당장 일어나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서 곧이어 도착한 소방관들에게 집 구조를 알려주고 함께 방화 작업을 안전하게 마친 후 하이파이브를 한다.
그냥 해본 말이다. 난 모르는 사람과 하이파이브 따위 하지 않는다.
선택 2. 몸을 힘겹게 일으켜 창문 쪽으로 가서 '산'을 타고 올라가 밖으로 뛰어내린다.
탈락. '산'을 타는 것부터 불가능하다. 올라타려고 짚는 순간 역대급 산사태가 날 것이다. 그리고 내 방 창문과 담벼락 사이는 내 몸보다 좁다. 뛰어내리는 게 아니라 끼어버릴 것이다. 벽 사이에 끼어서 구조대를 향해 '저 여기 있어요'라고 말하는 장면은 그렇게 아름답지 않을 것이다.
선택 3. 몸을 천천히 굴려 욕실로 가 연기를 피하며 젖은 옷을 코와 입에 대고 얌전히 기다린다.
가장 그럴듯한 방안이다. 물론 내 거대한 몸을 굴릴 만큼 통로가 넓지 않다는 게 걸리지만. 천천히 몸을 당겨서 세로로 앞으로 나간다면 가능할지도. 좋아. 이 선택지로 간다.
일단 해야 할 일이 생기니 어느 정도 힘이 다시 생기는 기분이다. 온 정신을 집중해 기어갈 수 있게 몸을 돌렸다. 영겁의 시간이 흐른 것 같다. 앞이 점점 더 뿌예진다. 방을 겨우 빠져나오자 양 옆으로 난 통로 너머로 흐릿하게 주방과 거실이 보였다. 거실 쪽 방향으로 붉은빛이 더 밝게 비추는 것으로 보아 저쪽 방향에서 불이 난 것이 분명하다. 다시 주방 쪽으로 몸을 돌리려는데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머리를 때렸다.
안방.
불이 안방에까지 번졌다면. 아니, 애초에 불이 난 곳이 안방이라면? 아니야. 아닐 거야. 안돼. 절대 안 돼. 안돼. 안돼. 안돼. 몸을 틀어 거실을 향해 팔을 뻗었다. 주욱주욱 없던 힘도 그러모아 몸을 당긴 후 본 거실의 광경은 내 참담한 예상에 문자 그대로 불을 질렀다. 높이 쌓인 '산' 너머의 안방 쪽에서 분명하게 불길이 튀어 오르고 있었다. 검은 연기가 슈우우우 소리와 함께 열린 방문 위쪽으로 끝없이 뿜어져 나왔다. 안방에서 정체불명의 흑마술 의식이 치러지고 있는 게 아니라면 내가 보고 있는 광경은 내 인생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재난을 말하고 있는 거였다.
"계세요! 괜찮으십니까!"
그때 대문이 쾅하고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다급하게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분주하게 사람들이 뛰어다니는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가 '들어갑니다!' 하고 소리쳤다. 거실 창이 부서지는 소리가 난 후 불빛이 집안 가득 들이닥쳤다.
"이... 이게 뭐야. 젠장. 김 대원, 정 대원. 우선 신고자부터 찾는다. 서둘러. 이것들에 깔리지 않게 조심하고."
제 '산악지대'에 오신 것을 환영해요. 조심해서 얼른 들어와 보세요. 여기 급한 불을 좀 꺼야 하거든요.
"으아아악!"
얼마 지나지 않아 어디선가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한 대원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정 대원! 괜찮나!"
죄송합니다. 정 소방관님. 소방관님 위로 떨어진 '산'이 전집 '산'은 아니길 바라요.
"아윽...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젠장. 이게 도대체 무슨... 아! 여기 사람이 있다! 괜찮으십니까!"
아까부터 내 앞으로 다가오는 소방관의 모습이 보였지만 이젠 크게 소리칠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를 발견하고 잽싸게(다행히 소방관님의 몸집이 통로보다 작아서 재빨리 움직이실 수 있는 듯 보였다) 달려오셨다.
"소... 소방관님..."
"아직 의식이 있다! 데리고 나갈 테니 들 것 준비해!"
"콜록. 저기.. 소방관님... 저기요..."
"네!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말씀하세요! 금방 나갈 겁니다!"
"안방... 안방에..."
순간 소방관님이 숨을 헉하고 들이마시는 것 같았다. 방화 마스크를 쓰고 계셔서 다행이다.
"안방에 누가 있습니까? 여기 선생님 말고 다른 사람이 또 있어요?"
눈이 점점 감겨왔다. 아직 정신을 놓으면 안 돼. 정말 중요한 말을 전달해야 돼.
"안방에... 옷... 옷장은 꼭 구해주세요..."
마지막으로 눈을 감기 전 본 소방관의 얼굴엔 오늘이 그분 인생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날이라고 쓰여있는 것 같았다. 위로가 필요하신 것 같네요, 소방관님. 음... 하이파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