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6시, 파페 카페
오후 한 시 반, 유영은 마감을 준비했다. 창가 테이블에 혼자 앉아 핸드폰을 보고 있던 손님이 나가고 가게엔 유영만이 남았다. 핸드폰을 손으로 살짝 건드리자 고양이들의 사진과 함께 01:32라는 숫자가 떴다. 이제 곧 플레이리스트가 조용한 재즈 음악에서 가사가 있는 팝송으로 바뀔 차례였다. 어제부터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 탓인지 유영은 몸이 자꾸 굽어지는 것 같다고 느꼈다.
'안 되겠다. 좀 움직여야지.'
유영은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낀 후 핸드폰으로 '청소 플리'를 틀었다. 은은하던 카페 공간이 갑자기 번화가 한복판의 매장에서 나올 법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유영은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며 카운터에서 나와 텅 비어 있는 카페 공간으로 들어섰다. 점심시간에 나른한 표정으로 다녀간 직장인들이 남긴 흔적을 유영은 익숙한 듯 정리하기 시작했다. 성큼성큼 테이블 사이를 오가며 재빠르게 마감을 하는 유영의 얼굴은 한 시간 전의 그것보다 조금 더 밝아져 있었다. 손님이 가장 많이 몰리는 점심시간엔 여유 있는 웃음을 짓지 못했다. 오픈한 지 1년이 거의 다 되어가는데도 아직도 긴장하는 자신이 유영은 조금 안쓰러웠다.
'적성에 안 맞는 일을 벌인 것이 분명해. 서비스업은 역시 아니었나.'
유영은 새벽에 출근하며 본 읍사무소의 건물 앞 구인구직 포스터의 내용을 떠올리며 서비스업의 흔적에 다가섰다. 손님들이 떠나가고 난 장소의 모양은 비슷하면서도 매일 달랐다. 유영은 그 흔적들을 유영 만의 공간으로 다시 돌려놓는 일을 좋아했다. 집에서는 어질러진 공간을 다시 치워도 이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매일 청소를 해도 금세 지저분해지는 집이 갑갑하게 느껴졌다.
'분명 이곳은 내게 돈을 벌게 해 주니까 그렇겠지.'
유영은 혼자 끄덕이며 좋아하는 일을 시작했다. 조금씩 틀어져 있는 테이블은 못 본 체하고 우선 떨어져 있는 쓰레기를 손으로 주웠다. 담요나 옷자락에 휙 날려 떨어졌을 것 같은 티슈와 영수증, 슬쩍 의자 밑에 숨겨둔 플라스틱 물병을 주섬주섬 보물찾기 하듯 건져냈다. 장작 난로 주변을 빙 둘러싼 캠핑 의자들 위에 걸쳐있는 담요도 주섬주섬 접어 커다란 라탄 바구니에 집어넣었다. 캠핑 의자도 접을까, 잠깐 고민하는 사이에 문이 열리며 찬바람이 훅 들이닥쳤다.
초등학생과 중학생으로 보이는 아이 셋과 부부가 함께 온 손님이었다. 엄마가 커피와 음료를 주문하는 동안 아이들과 아빠는 본인들이 펼쳐놓은 자리인 양 캠핑 의자에 털썩 앉아 양손을 난로 앞으로 가져다 대었다. 주문받은 아메리카노 두 잔과 유자차 세 잔을 난로 앞 낮은 테이블로 가져다 놓았다. 다섯 가족은 모두 기다렸다는 듯 다급히 따뜻한 잔을 감싸 쥐고 조용히 음료의 향을 맡았다. 마감 시간이 5분 남았지만 가족들은 의자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곳이 '식스 투 투 카페'로 불리는 곳이라는 걸 모르는 관광객 손님인 듯했다. 유영은 주문을 받으며 '저희 2시까지만 영업해요'라고 말을 해볼까 싶었지만, 코와 볼이 발간 손님의 카드를 받아 들며 이내 생각을 바꿨다.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척 밖으로 나가며 문 밖의 메뉴판을 접고 'OPEN' 팻말을 'CLOSE'로 바꾸어 걸었다. 점심시간이 끝난 평일 낮의 골목엔 낙엽이 바람에 휘날리는 소리만 들렸다. 햇살이 비치는 오후에도 입김이 나오는 걸 보니 이제 곧 눈이 쌓이겠구나, 하며 유영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얇은 검은 니트 안으로 바람이 들어왔다. 가볍게 몸을 떨며 다시 차가운 유리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손잡이 커버라도 만들어야 하나. 저번에 정은 손님이 뜨개질이 취미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주문을 드려야겠다.'
유영의 평소 걸음걸이는 발을 툭툭 내던진다는 느낌에 가깝지만, 카페에 손님이 있을 땐 유령처럼 걸으려고 신경을 썼다. 책을 읽고 있는 손님이 있을 땐 더욱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다. 세 아이들은 난로 옆 작은 카펫 바닥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라탄 바구니 옆에 쌓여 있던 보드 게임을 펼치고 있었다. 엄마는 노트북을 무릎에 얹고 하얀 창에 글자를 가득 채워 넣고 있었고, 아빠는 책장에서 꺼내온 것으로 보이는 얇은 시집을 펼쳐 들고 있었다. 문을 다시 열고 들어선 순간 마주한 풍경 앞에 유영은 잠시 멈춰 섰다. '카페를 차리고 싶은 사람들의 로망' 같은 장면을 직접 마주할 때면 작은 직업 자긍심이 생겨났다. 조심스럽게 유영은 다시 카운터로 발을 돌렸다. 카운터 앞 의자에 잠시 발이 걸려 소리를 낸 바람에 아이들 중 한 명이 뒤를 돌아보긴 했지만, 다른 가족들은 카페 주인이 어디에 있든 관심이 없어 보였다.
카운터에 들어서자마자 다시 재즈 플레이리스트를 틀었다. 어차피 오늘 마감은 꽤 늦어질 터였다. 유영은 노트북 크기 만 한 나무 상자를 카운터 테이블에 올렸다. 월넛 색의 뚜껑을 들어 올리자 색색의 종이조각과 테이프, 필기구가 제멋대로 뒤섞여 있었다. 편지를 쓰고 싶거나 간단한 문구류가 필요한 손님에게 빌려드리는 '파페 박스'는 인기가 많았다. 책을 읽다 가방을 뒤적거리는 손님에게 슬쩍 다가가 파페 박스를 건네드리곤 하는데, 그때 상자를 열어본 손님들의 빛나는 얼굴을 보는 게 유영의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가끔 내용물을 가져가시는 손님도 있어서, 마감 시간에 상자를 열어보기 전엔 작은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기도 했다. 대신 작은 쪽지와 선물이 담겨 있던 날도 꽤 많았다.
'기억하고 싶은 문장을 사진을 찍는 대신 종이에 적어 지갑에 넣어두었어요. 덕분에 한동안은 지갑 여는 일이 즐거울 것 같습니다. 감사해요'라고 적혀있었던 노란 포스트잇, 누룽지맛 알사탕, 손님의 가방에서 나왔을 고양이 그림의 작은 스티커 등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기에 유영은 계속해서 파페 박스를 준비해 두었다. 각자의 방식으로 따뜻한 파페 카페를 즐기고 있는 가족 손님을 유영은 잠시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이내 게임이 시시해졌는지 카페 벽을 따라서 죽 늘어선 책장 앞을 기웃거렸다. 엄마도 업무를 마친 모양인지 아이들과 함께 책장 앞에 서서 '아, 이 책'하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영은 상자에 초콜릿 다섯 개, 귀여운 토끼 그림이 그려진 책갈피 한 개, 겨울 풍경이 그려진 엽서 다섯 장을 더 채워 넣었다. 난로 앞에 접이식 테이블을 하나 더 가져가야겠어,라고 생각하며 유영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