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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가지현 Oct 27. 2024

미안합니다

재미난 학교는 6+3 학제이다. 재미난 학교 초등을 다녔더라도 중등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내부전형이 따로 있다. 아이와 양육자 모두 꽤 긴 서술형 원서를 작성하고 면접 과정을 거쳐야 한다.


내부전형 입학 원서는 꽤 다양한 질문들로 구성되어 있다. 아이가 가지고 있는 강점과 약점에서 출발해 재미난 교육 과정에 대한 평가와 기대, 재미난 생활에서 의미 있었던 사건, 사람, 관계 등. 입학 원서를 쓰면서 6년 동안 감사했던 선생님들이 가장 먼저 떠올라 적었다.  

  

-최근 자전거를 즐기는 아이를 보며 작년 통합반 여행에 가서 자전거 타기에 성공하고 돌아온 모습이 떠올라요. 본인은 타지 못하지만 성공할 때까지 자전거를 잡아준 해피의 땀과 마음.

-학기말 상담하면서 아우름이랑 헤어지는 게 너무 아쉽다며 하트 날려주던 연두. 그때 했던 마지막 말을 기억합니다. “중등 가서 만날 수도 있으니까요.” 이렇게 예언은 현실로?!

-본인 피셜 소심, 엄마 피셜 신중해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어려워하는 아이에게 선택의 기회보다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실행을 도와준 하늬와의 시간도 소중했고요.

-재미난은 아우름의 성향과 기질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학교 같아요-라는 다소 과장된 제 말에도 동의해 주며 재미난에서의 아우름과 저희 가정을 응원해 준 백호도 기억에 남습니다.     

     

다소 유쾌발랄 컨셉의 원서를 쓰면서 동시에 미안한 이가 떠올랐다. 그와의 첫 만남은 재미난 학교 입학설명회였다. 짧은 머리에 진지함과 장난을 동시에 담은 커다란 눈. 생활한복을 입고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전해지는 에너지가 맑아 순식간에 좋아져 버린 사람. 그냥 지나가도 되는 상황이었는데 떨어진 살구를 바지에 슥슥 닦아 준다. 그리고 해를 두 번 넘기고 생활 교사와 양육자로 만났다.

  

그 해 재미난은 평화롭지 않았다. 오랜 시간 동안 마을과 학교를 가꿔 오던 산나물이 교장 임기를 끝내고 새로운 교장이 부임한 첫해였다. 하지만 새로운 교장은 미처  한 학기를 채우지 못하고 그만뒀다. 그냥 이유와 진짜 이유가 엉켜서 말로 떠돌았다. 무엇이 진짜인지는 그때도 잘 몰랐고, 지금도 잘 모른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일에 어찌  하나의 진실만 있겠나. 이후 재미난은 1년 동안 교장이 없는 상태에서 지냈다. 호랑이가 새 교장으로 부임하고 나서 선명해졌다. 대안학교 교장은 학교와 마을을 잇는 인간 허브다. 마을통이다. 그 역할의 부재는. 어후야. 두 번은 하지 말자.

    

재미난만 평화롭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나도 쉽지 않은 시기였다. 우리 가정은 아이의 재미난 입학으로 이사를 했다. 출퇴근 시간이 두 배로 늘어났다. 전화 한 통이면 달려오던 할머니, 할아버지와도, 쉬는 날 아이들과 놀아주고, 기사를 해주던 동생들과도 멀어졌다. 재미난의 ‘따뜻한 돌봄, 마을 속 공동체’는 혈연에 기반한 나의 가족 공동체보다 덜 따뜻했다. 결정적으로 난소암 진단, 수술, 항암치료를 마치고 보름도 지나지 않았던 시기. 15분 거리의 학교를 한 숨에 갈 수 없었다. 어디에든 기대 쉬어야 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마음이 깃든다고 했다. 옛말 그른 것도 있던데 이 말은 맞더라. 인사이드 아웃 컨셉을 빌어 이야기하자면 불안과 까칠이가 본부를 장악했던 시기다.


그렇다. 뒷이야기를 위해 비겁한 변명 중이다.

     

여름방학을 마치고 대청소를 하는 날이었다. 대청소를 마치고 반모임을 잠깐 한다 했다. 개학을 준비하는 모임이라 생각했다. 여러 공지를 하던 그가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알 수 없는 긴장감. 말하는 이, 듣는 이 모두 평안을 가장했다. 그는 퇴사를 하게 되었노라고 말했다.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불안과 까칠로 무장한 내가 그동안 그에게 날린 살을 담은 말이 생각났다. 눈물이 쑥 들어간다. 내 탓이다. 학교의 낮은 담장이 무서웠다. 낯선 등산객이 아이들에게 말을 거는 것이 싫었다. 안전망 없이 높은 나무를 타는 아이들이 걱정되었고, 방과 후 돌봄이 정확한 명단 없이 이루어지는 것도 불만이었다. 이런 류의 두려움과 걱정, 불만을 생활교사인 그에게 날을 세워 전했다.


교장 호랑이가 인간 허브로, 마을통으로 자리 잡아가는 사이사이 그가 생각났다. 기대고 의논할 사람없이, 울타리없이 나의 가시돋힌 말과 마음을 받아내야 했을 그에게 미안했다. 또 교사들에게 고맙다는 표현을 할 때도 그가 생각나곤 한다. 그에겐 고맙다는 말에 인색했다. 미안하다.

  

아이에게는 시간을!

교사에게는 신뢰를!

공동체에는 헌신을!    

 

얼마 전 재미난 학교 20주년 포럼에서 간디학교 교장 이병곤 선생이 한 말이다. 적어놓고, 외운다. 재미난에서 내가 만들고 싶은 서사가 무엇인지 분명히 하기 위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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