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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H Choi May 27. 2018

길 위의 안식년

-Sabbatical Year on the road

Day 23 국제 망신

   (프로미스타에서 캐리온까지 19.8km)

  


  오늘은 어제보다 30분 더 빨리 나섰다. 밤같이 어두운 새벽하늘에 별들이 선명했다. 북두칠성이 바로 머리 위에 있었고, 북극성인지 또 하나가 뚜렷이 빛나고 있었다. 이제야 별을 보며 항해하고, 별을 따라갔던 동방박사들, 별을 관찰하다 지구의 자전을 상상한 사람들이 이해되었다. 쏟아질 듯 눈앞에 가까운 별들을 어찌 헤아려 보지 않을 수 있을까. 어찌 내 별 삼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별들의 세상도 떠오르는 태양에 자리를 내어주지 않을 순 없으니.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그러나 별들이 사라진 게 아님을 모르지 않는다. 다만, 각자의 타이밍을 알고 순서를 지켜 전 우주에 순응하고 그 조화 속에 존중하며 존재하는 것.


  새벽별과 함께한 손 시린 아침!


  800킬로미터 카미노 중 두 번째 기간은 명상의 시간이라고들 말한다. 그래서일까. 어둠 속에서 지나간 인생의 앨범을 들추듯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린 시절 한 장면 한 장면이 떠올랐다. 언제나 첫 기억의 사진은 세 살 터울 여동생과 할머니, 고모들, 손님들 앞에서 트로트를 부르며 ‘기쁨조’ 노릇했던 것.

친척들과 부모님이 잘한다 부추기며 노래를 자꾸 시켰다. 그다음, 서울로 상경한 부모님이 생활고 때문에 나만 전라도 장성 고모님 댁으로 내려보낸 것, 아마 여동생이 더 어려서 내가 뽑혔겠지만...... 그리고 초등학교 입학식 날 학교 정문 앞에서 가슴에 하얀 손수건 매달고 조퇴하고 오실 엄마 기다리던 기억. 아마 그 기다리던 시간이 너무나 길었거나 뻘쭘했던 것 같다. 그렇게 스냅사진처럼 기억에 박혀 있는 어릴 적 순간순간이 되살아왔다. 이 낯선 이국의 길 위에서 말이다.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에 도착하고, 언제나처럼 가방을 풀고 샤워하고 빨래해서 널고, 햇볕 아래 나도 부려놓는다. 참으로 편안한 느낌을 주는 알베르 게였다. 산타마리아 성당 뒤쪽에 수녀님들이 관리하는 정갈한 숙소와 주방을 지나면 빨래방이 있다. 빨래방 앞 작은 마당은 빨래를 말리기에 딱 좋게 자리를 잡았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양말, 바지, 웃옷 하나씩 손빨래했다. 대부분 세탁기를 돌려왔는데 옷가지 몇 개를 손으로 조물조물하여서 물에 헹궈 짜고 털어 너는 과정이 참으로 즐거웠다. 마치 아주 어릴 적 엄마한테 빨래를 해보겠다고 굳이 고집부리며 떼썼던 것처럼(빨랫감이 적어서 그랬겠지만). 햇볕마저 감사하다. 빨래를 말릴 수 있어서. 이렇게 자연은 그 자체로 충분하다.


  저녁식사 전 수녀님들의 기타와 노랫소리가 들렸다. 아래 홀에서 네 분의 수녀님이 순례자들에게 노래를 불러주며 축복해주는 시간이었다. 일곱 여덟 명의 순례자가 모여 있었고 각자 소개하고 카미노에 오게 된 이유들을 그냥 자신의 모국어로 말하고 자국 노래를 돌아가며 해보는 시간도 가졌다. 나는 노래하는 맑디맑은 수녀님들을 보는 순간부터 주책없이 눈물이 자꾸 흘러나왔다. 그 어떤 불순한 마음도 없는 순전히 오롯한 헌신의 마음을 그대로 느꼈을까? 너무나 아름다운 목소리의 노래와 연주였다. 흐르는 눈물 때문에 내가 소개할 차례도 다음으로 미루고 젊은 미국 여성들, 벨기에, 이탈리아, 독일 순례자들까지 소개가 다 끝난 뒤에야 간신히 두서없이 얘기했다. 순례자들 모두 자기 모국어로 얘기했지만 전혀 어색함 없이 모두 경청하고 느낌만으로도 공감하고 있는 듯했다. 마음이라는 만국의 공통어에는 통역이 필요 없었다. 노래를 이끌던 수녀님이 내게 우리나라 노래를 하나 해보라 권하셨는데 난 경황이 없어 못 하겠다 했더니 먼저 ‘아리랑’을 시작하셨다. 같이 따라 불렀다.


  마지막으로 수녀님들이 직접 색칠하고 오린 별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선물하시며 머리에 성호를 그어 축복해주셨다. 또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렀다. 이게 무슨 국제적 망신인지.


  수녀님들은 어둠 속에서 빛나는 별처럼 이 작은 종이별이 우리의 카미노 길에 방향이 되고 희망이 되길 기도하신다 했다. 오늘 샛별을 보며 내가 얻은 깨달음을 그분들을 통해 다시 한번 더 듣다니!


  카미노 중반에 다다르며 이런 하이라이트를 경험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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