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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H Choi May 29. 2018

Sabbatical Year on the road

-길 위의 안식년

Day 24  50년 지기

    (캐리온에서 테라디요스까지 26.3km)


  밤새 깊은 잠에 들지 못한 이유가 코골이들 탓인 줄 알고 미워했는데, 좀 더 더듬어보니 도착했던 오후 1시에 수녀님들이 준비해주신 그린 티와 초콜릿 때문이었던 것도 같다. 녹차에도 상당량의 카페인이 있고 초콜릿도 그렇고. 코골이를 따로 격리해야 다른 순례자들이 푹 쉬고 또 길을 떠날 텐데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차피 선잠을 잔 터라 일찍 준비해서 문을 나서니 비가 뚝뚝. 다시 들어가 가방에 커버를 씌우고 판초를 입고 나왔다. 어젯밤 수녀님이 주신 별을 품고 괜한 자신감으로 혼자 나섰다. 이 별이 나를 데려가 줄 거라 굳게 믿으면서. 그런데 비가 내리면서 날은 더욱 깜깜해져 있었다. 그 바람에 알베르게 문을 나서면서부터 어디로 가야 할지, 노란 화살표도 뵈지 않았다. 두리번거리는 사이에 나처럼 헤매는 듯 보이는 한 순례자 아저씨가 보였다. 그와 둘이 방향 표시를 찾으며 골목을 빠져나왔다. 영어를 모르는 스페인 아저씨와 스페인어를 모르는 나는 손짓 발짓 다 해가며 서로를 이해해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알아낸 건 이름, 국적, 시간당 걷는 속도뿐이었다. 스페인어로 숫자 세기는 5까지 배웠고 어디 사냐고 묻는 말에 그는 축구하는 킥 자세를 연신 흉내 냈다. 내가 쉬울 거라 예상하고 ‘마드리드 사세요?’,‘ 바르셀로나 사세요?’를 영어로 물어서 그런가 보다. 결국, 우리 대화는 거기서 끝나고 침묵. 어둠 속에 걷기만 했다. 결과적으로 내 노력보다는 남의 도움으로 헤매지 않고 방향을 잡았다. 신의 상상력은 기대 이상 상상 불가다. 사람별을 보내시다니.


  17킬로미터가 스트레이트로 이어지는 벌판 사이 외길은 지평선을 향해 걷는 길이다. 지평선에 맞닿을 때까지 걷고 나면 또 저만큼 지평선이 멀어진다. 끝없이 물러나는 지평선을 향해 가는 길.


  새들의 지저귐보다, 한껏 가까이 다가간 지평선 너머에 대한 기대보다, 발뒤꿈치의 찌릿함이 점차 강하게 느껴지면서 언제 마을이 나타날까에 마음의 중심이 이동한다.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나는 발 운동을 시작한다. 발가락 하나하나를 매만져서 풀어주고 발목을 돌리고 발바닥까지 꼼꼼히 주물러주면서 오늘 하루도 잘 걸어보자고 속삭인다. 20여 킬로미터 이상을 걷고 나면 늘 발병이 나면서도 그 다음날 또 길로 나서게 하니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절로 생긴다. 그렇게 50년 인생길을 걸어온 나의 발에게 고맙다, 장하다 고백한다.


  그리고 또 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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