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안식년
(무히아)
오늘 아침 피스테라(Fisterra) 숙소에서 나오면서 만난 호주 할머니들과 택시로 무히아(Muxia)에 함께 왔다. 일요일이라 직행버스가 없어서 중간까지 버스로 와서 셋이 택시에 동승하고 요금은 나누어 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 었다. 무히아는 피스테라 북쪽으로 29km 떨어진 곳이다. 피스테라와 더불어 산티아고 순례길의 여정을 마치는 또 하나의 서쪽 끝 해안 도시다. 어젯밤, 걷기 순례를 마치기로 결정하고 다음 갈 곳을 무히아로 정했다. 피스테라가 순례의 피날레라고 한다면 무히아는 새롭게 시작하는 곳쯤.
일단 걷기를 끝내고 버스나 택시로 이동하기로 결정한 뒤 버스에 오르고 버스 가 스르르 차도를 따라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내가 걸어서 지나왔던 길들을 단숨에 되돌아가고 있었다. 하루 걸려 걸었던 거리를 단 몇 십분 만에 이동해 버리다니, 내 감각과 의식은 그만큼의 순간 이동을 접수하지 못한 채 한동안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그 사이 도착한 무히아는 좀 더 차분하고 정결한 느낌이랄까? 같은 순례자들이 모이긴 하지만 모두 톤 다운된 분위기다.
전 세계 곳곳에서 모여든 순례자들은 나이, 성별, 인종을 불문하고 서로를 금방 알아채고 필요한 정보들을 공유한다. 가는 길이 하나로 정해져 있던 순례길처럼. 무히아에서도 캐나다 퀘벡 출신이면서 아일랜드에서 싱어송라이터로 일하고 있다는 젊은 여성 데이나를 우연히 만났다. 데이나는 우리 셋을 저렴한 숙소로 안내해주었고 이렇게 넷이서 같은 알베르게에 체크인하고 하루 동행자들이 됐다.
이제부터 걸음을 멈추고 관광객 모드로 변신하려니 도무지 어색했다. 노란 화살표를 찾고 싶고 걸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가만두질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 동네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올라갔다. 데이나는 바다 수영하러 가고 두 할머니는 모래 해변에서 해바라기 하고.
일찌감치 저녁을 해결하고 바다 끝 교회 앞으로 가서 해지기를 기다린다.
여전히 쳐다볼 수 없을 만큼 눈부시게 밝다.
일찍 서두른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어제 피스테라와 다른 분위기다.
같은 대서양이지만 훨씬 깊고 세찬 파도가 바위를 철썩거리는 진청색의 바다다.
오늘은 수평선에 안개 층도, 하늘에는 구름도 별로 없어 보인다. 골든 노을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친구 사이 호주 할머니, 두 분 중 한 분은 키가 자그마하고 흔들흔들 걸으신다. 어찌 순례길을 걸으셨을까 걱정될 만큼 실제 나이보다 훨씬 더 나이 들어 보인다. 그 팸 할머니가 바다 가까이로 파도가 철썩거리는 바위로 다가가셨다.
뒤에 계시던 친구 할머니가 천천히 팸 할머니의 사연을 얘기해주셨다. 얼마 전 아들을 바다에서 갑작스러운 사고로 잃으셨다고. 그래서 아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의 아픔을 내려놓으려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셨다고.
저 황금빛 노을이 자식 잃은 어미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기를 ‘네 잘못이 아니다’라고 속삭여 주기를 기도하며 지는 해를 바다 끝까지 바래다준다.
황홀한 노을을 마음 가득 품고 돌아오는 길에, 팸 할머니가 “비노 틴토! 비노 틴토!”를 외치셨다. 알아들을 수 있는 스페인어 몇 마디 중 하나다. 레드 와인을 뜻한다. 게다가 내게 개들의 화장실(WC)을 봤냐고 물어보신다. 사람들을 위한 공중화장실은 없는데 개 화장실이 있다고 하시면서, 흔들 걸음으로 나를 데려가 보여주시기까지.
숙소 가까이 돌아가니 벌써 깜깜해졌다. 우리 넷은 가까운 바에 들어가 와인, 맥주, 그 지역 사과주를 들고 ‘치얼스!’ 바 안은 이미 동네 분들과 순례자들로 들어차 있고 동네 주민들은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축구경기에 빠져 있었다. 오랜만에 텔레비전으로 보는 두 숙적의 빅 매치는 환상적이었다! 게다가 스페인에서 보다니! 나는 네 여자의 마지막 순례 파티에 끼었다가 경기에 빠졌다가 두 가지를 왔다 갔다 하느라 바빴다.
이보다 완벽할 수 없는 밤이 또, 한 번 지나가고 있었다. 내일이면 각자의 길로 돌아갈 사람들이지만 이 순간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친구들처럼 끈끈하다.
매일 처음인 듯 해가 뜨고
마지막인 듯 진다.
산 위로 떠오르고
바다로 지는 곳
길 위에서 처음 만나고
끝인사를 나눈다.
처음이면서 마지막이고
시작이고도 끝인
인연들이
해 뜨듯
해 지듯
순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