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는 안 팔아예.
마을에 하나밖에 없던 여인숙에서 살았다. 아치형의 쇠로 만들어진 간판을 지나 기다란 골목 같은 입구를 지나면 셀로판테이프를 붙여 불투명하게 만든 유리 미닫이문이 있었다. 미닫이문에는 도르레가 달려있어 쉴 새 없이 바람에 흔들렸고 누군가 문을 열면 거창한 소리가 났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작은 창이 집안으로 난 안내실이 있었다. 발소리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그 조그만 창을 열고 고개를 들어 누구인지 확인했고 손님은 고개를 숙여 방이 있는지를 물었다. 대개는 말이다. 간혹 방이 아닌 다른 것을 찾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여인숙은 말 그대로 ‘여행하는 사람들의 숙소’ 역할만 했다. 왜 여인숙에서 아가씨를 찾는지 의문스러웠다. 순자나 미숙이를 찾는다면 숙박계를 뒤져 투숙객들 중에서 찾아 볼 수도 있지만.
집 앞에 있는 중국집이나 그 옆에 있던 이발관에 가서 “아가씨 있어요?” 하면 되게 웃기겠다고 생각했다. 또는 시장에서 생선을 파는 아주망(아주머니)한테 “이거 아가씨인가?”라고 하면 아주망이 “이건 고등어인데요.”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이런 귄닥서니(꼬락서니) 벗어진 놈. 어디서 아가씨 타령이야. 저 야가기(목)에 때광(때가 있다, 더럽다).” 하면서 욕을 한 바가지 먹을지도 모르지.
실제로 방에서 할아버지가 방을 파는 곳에서 아가씨를 찾는 사내의 목소리를 듣고 뛰쳐나와 혼을 내면 사내들은 줄행랑을 치곤 했다. 독하기론 이루 말할 수 없던 할아버지에게 혼줄이 나서 벗어놓은 신발을 손에 든 채 그 기다란 입구를 뛰어가던 모습이라니.
아무튼, 그 창 밑에는 어머니의 잠자리가 있었고 그 맞은편 이불을 쌓아놓는 일종의 붙박이장 밑이 내 자리였다.
항구의 초입에 있던 여인숙에는 저녁이나 새벽이나 아침나절에도 불시에 손님이 들이닥쳤다. 대부분 혼자 오는 선원들이었다. 어머니는 수시로 깨고 온종일 조셨다. 편집증이 있던 외할아버지는 한시도 어머니를 쉬게 놓아두지 않으셨다. 할아버지가 어머니를 불러 무언가를 받아쓰게 하면 책상 밑에서 어머니는 스스로 허벅지를 꼬집곤 하셨다. 술 취한 손님들과 싸우는 것보다 외할아버지의 시중을 드는 게 훨씬 더 힘들게 보였다.
원래는 마을 우체국의 관사였던 곳을 우체국장이셨던 외할아버지가 퇴직금을 대신해 받아 여인숙으로 개조했다고 들었다. 외방(외지)에서 온 사람들을 재울 데가 필요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아주 어린 시절이지만 외삼촌들과 친구들이 트럭을 몰고 이런저런 공사를 하던 기억이 있다. 일 층에는 할아버지가 직접 고안한 구들을 놓고 이 층은 일본식 다다미방이었다.
할아버지는 정원을 가꾸길 좋아하셨고 다른 집에서는 통 키우지 않는 먹지도 못하는 꽃들을 심으셨다. 백합이며 다알리아, 양수국, ······. 그리고 앞뜰의 담은 하얀 장미덩쿨이 덮고 있었다. 병을 깨 담에 꽂아 방범용도로 사용하던 곳이 많았지만, 우리 집 담은 예쁘기도 하고 방범 효과도 더 커서 일거양득이었다. 뒷뜰은 할머니의 전용 공간인 텃밭이었고 빨간 장미를 심었다. 온통 꽃밭인 우리 집은 그렇게 다른 집들과 달랐다.
꽃집이 없던 마을에는 현충일이 되면 하나 있던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교와 여고 학생 대표들이 와서 할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헌화할 꽃을 꺾었다. 마을에서 멀지 않은 현충묘지의 꽃들은 죄다 우리 집 꽃이었다. 절대 꽃을 꺾지 못하게 하던 할아버지가 유일하게 허락하는 날이었다.
외할아버지의 머리는 항상 아주 짧아서 방금 벌초를 마친 봉분 같았다. 집안에는 창고가 여러 곳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할아버지의 우체국 관련 물품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모스부호로 전보를 보내는 송신기나 일본군인지 미군 것인지 모를 탄약통들이나 행랑 자루와 그 수많은 수취인 불명의 편지들. 그런 것들이 창고 안에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몰래 편지들을 한 통씩 열어 읽었다. 모두 아내가 남편에게 보내는, 또는 아비가 아이들에게 보내는, 안부를 묻는 내용이었다. 세상에 문학이 있다면 “사랑하는 아내에게”로 시작하는 그 편지들이 최고다.
누나들과 나는 아침에 어머니와 할머니를 도와 방 청소를 하곤 했다. 청소하다 동전을 줍는 일이 있어서 나쁘지 않았다. 공동 화장실과 욕실이 따로 밖에 있었으므로 방문을 열면 그저 이불이 놓인 공간뿐이고 가구라면 구석에 놓인 작은 탁자가 있었다. 그 위에 동그랗고 작은 쟁반에 주전자와 어른들이 ‘고뿌’라고 부르던 컵 두 개가 놓여있었다.
방에는 지난밤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어느 방은 잠을 잘 이루지 못했는지 이리저리 이불이 흩어져 있고 어떤 방은 잡다한 잡지와 술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간혹 사람이 있었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깨끗한 방도 있었지만 아주 드문 일이었다. 이불은 겉을 벗겨내 햇볕에 널고 어머니와 할머니가 막대기로 두드려 털었다. 방을 쓸고 닦고 나면 할머니는 이불을 다 털고 나서 코를 씽긋거리며 바람 냄새를 맡고 계셨다. 바람의 방향과 냄새로 계절이 바뀌는 것을 내게 말해주셨다.
일 층에는 할아버지가 고안한 온돌방이었지만 이 층에는 일본식 다다미방이어서 겨울에는 난방이 문제였다. 기관총 탄창에 펄펄 끓는 더운물을 붓고 수건으로 돌돌 말아 이불 속에 넣었다. 가끔 손님이 들지 않아 이 유단포(보온 물주머니)는 누구에게도 온기를 전해주지 못했지만, 성능만큼은 좋았다. 아침에 청소할 때까지도 그 따스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전쟁 시 사용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탄창에 물이 스미지 않는다는 것을 누가 알았는지 모르지만, 일제 강점기 때는 일본군 비행장으로, 6·25 때는 국군 제1군 훈련장으로 쓰였던 곳이라서 그런 군대 물건들이 많았다.
추석이나 설날이 돼도 여인숙에는 손님들이 있었다. 어째서 집으로 돌아가서 가족들과 명절을 지내지 않는지 궁금했지만, 명절의 오전은 포구의 식당들도 다 문을 닫고 수궁 다방이나 수선화 찾집도 영업을 하지 않아 빈 거리에 바람이 휭 하고 불면 서부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그런 날이면 할아버지는 가마솥에 떡국을 끓이게 했다. 부엌에서 그릇에 담아내면 나는 그걸 손님이 든 방문 앞에 두고 문을 두드렸다. 방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을 때가 많았지만, 나중에 가면 깨끗하게 비워진 그릇이 문 앞에 놓여 있었다.
밤이 되면 파도 소리가 들렸다. 안내실에는 항상 불이 켜져 있었고 쉽사리 잠들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출입문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도 들렸다. 바람이 세게 부는 날이면 세상 무엇이든 저 바람이 다 날려버리는 게 아닌가, 했다. 모슬포의 바람은 바람 많은 제주에서도 유명하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영화 “귀향[위키링크]”을 보면서 영화의 배경인 바람이 아주 세게 부는 마을에서 아마 저긴 모슬포와 비슷할 거라 생각했다. 바람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