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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지완 Dec 15. 2015

추렴

맛집의 비애

어느날 아버지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 나를 데리고 돼지 추렴하는 데에 데리고 가셨다. 미리 골라놓은 돼지는 전문가 하르방이 손질해서 동네 어느 할망네에 두었다. 하르방은 내장을 대가로 받았다. 


할망네 집 야트막한 부엌에 커다란 솥을 걸어놓고 장작불을 피워 듬성듬성 잘라놓은 고기를 삶고 있었다. 아버지와 친구들은 마당에 있는 평상에 앉아 고기가 삶아지기를 기다렸다. 아직 오전이었다. 때로 아이를 데리고 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날은 어린아이라고는 나 혼자여서 심심했다. 마당에서 나뭇가지를 가지고 이리저리 그리거나 쓰거나 하면서 놀았다.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펴면서.


그러다 할망이 첫 번째 고기를 내왔다. 도마 위에 올려진 채로 썰어 내 온 두툼한 돼지고기. 부엌은 해무가 깔린 바다처럼 하얀 김이 자욱했고 내어 온 도마에도 그랬다. 돔베고기다. 제주의 작은 부엌은 안방 아궁이로 난방 기능을 겸했지만 큰 부엌은 부엌 중앙에 아궁이가 있었다. 이 중앙에 있는 아궁이에 보릿짚으로 불을 지피면 시커먼 연기가 온통 천장으로 올라가서 뻥 뚫려있는 집 전체의 천장을 채웠다. 이걸 미개해서 그렇다고 했지만 어른들 말은 다르다. 그 연기는 천장으로 올라가서 소독도 하고 쥐도 쫓았다. 

그래서 제주 집 천장은 검은색이었다. 


다만 한가지. 천장에는 뱀이 있었는데, 커다란 한 마리의 뱀은 집을 지킨다고 했다. 마루에서 놀고 있던 나는 무심코 천장 서까래에 걸린 커다란 구렁이를 보고 얼어붙었다. 할머니는 그런 나를 보고 집 지키는 뱀이니 쳐다보지 말라고 하셨다. 옛날 문헌에는 제주 사람들이 뱀을 신성시한다는 내용이 있다. [제주풍토록, 김정, 1636, pp 2-3]


아버지와 친구분들은 커다란 소주병을 옆에다 두고 유리 컵이나 국 사발로 낮술을 마셨다. 도마 위의 고기를 큼지막하게 썰어 굵은 소금에 찍어 드셨다. 어린 동물이 어미 곁을 떠나지 못하는 것처럼 나도 아버지 곁에 딱 붙어 받아먹었다.


술을 드시다 담배를 물었고 노래를 한 가락 하시기도 하고 윷놀이를 할 때도 있고 화투를 치기도 하셨다. 어느 변사가 읊던 대사도 나왔다. “김중배의 다이아 반지가 그리도 좋더란 말이냐! 놓아라. 바지 찢어진다.”라고 하셨던 것 같다. 원래는 “놓아라. 더러운 것아.”라고 해야 하는 것 같던데 “바지 찢어진다.”라고 하시고는 친구분들과 낄낄대며 웃으셨다. “누가 이미자를 못 생겼다 하는가!”라고도 자주 하셨다. ‘동백아가씨’라는 노래를 불렀고 담벼락에 동백은 정말 뚝뚝 떨어졌다.


동백나무는 제주의 방풍목으로 쓰였다. 밭이나 집에 바람을 막는 역할을 했다. ‘숙대낭’이라고 불리는 삼나무로 교체되기 전에는 마을마다 동백나무가 많았다. 길을 넓히느라 아름드리 동백나무들은 잘려나갔고 삼나무가 심겼다. 삼나무는 동백나무보다 더 빠르고 높게 자랐다.


그렇게 어스름 저녁이 되어 갈 때까지 놀다가 남은 고기를 배분해서 새끼줄로 묶고 집으로 돌아갔다. 한 손에는 큼지막한 고기 한 덩이를, 다른 쪽에는 내가 들려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면 부엌에서 일하는 어머니께 고기를 건넸다. 마치 사냥에서 수확한 것을 자랑이라도 하는 것처럼.


제주에서는 지금도 추렴을 많이 한다. 어엿한 표준어인 추렴으로 소도 잡고 개도 잡고 사슴도 잡는다.  뭐든 혼자 하기 힘든 것은 나누어서 했던 것 같다. 요즘도 아버지는 일 년에 한 번은 소 추렴에 참가하신다. 고향의 아버지 친구분들은 여전하다. 연세가 많으시니 몇몇 친구분들은 일찌감치 돌아가셔서 남은 분들은 걱정하시지만(추렴할 사람이 없을까 봐?). 내가 보기에는 끄떡없어 보인다. 어찌나 정정하신 지.


그래서 부모님 댁에 가면 소고기도 있고 여름이 다가오면 단고기도 있고 어쩌다 노루나 말고기도 있다.


돔베고기는 식당 메뉴로 발전했고 자주 가던 식당은 역사를 뒤로하고 하나둘 사라져가고 그 자리에는 삼겹살이나 근고깃집으로 바뀌더니 이제는 몇 남지 않았다.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갔던, 누나들은 따라갈 엄두도 못 내던 추렴한 돼지고기가 생각날 때마다 가는 식당이 있다. 그곳에는 몸국이나 돔베고기, 제주 순대 같은 걸 판다. 그나마 아내가 열심히 돼지고기 삶는 걸 배워서 이제는 잘 가지 않게 되었다. 


그대신 근처 중국인들이 잘 가는 식당을 검색해서 찾아낸 양꼬치 식당이나 관광 필수코스가 된 치킨(우리나라에서 '치킨'은 '튀긴 통닭'을 뜻한다)집에 간다. 중국에서 히트한 우리나라 드라마 여주인공이 치맥을 즐기는 장면이 자주 나왔나 보다. 동네 치킨집에서 배달시키지 않고 자리에 앉아서 먹는 사람들은 백발백중 중국 사람들이다.


유명 연예인이 촬영 와서 먹고 아주 맛있어서 싸서 갔다는 돼지고깃집은 그 이후로도 여러 유명인이 다녀갔다. 그런데 그 집의 고기는 길 건너편 동네 식육점 고기다. 특별한 고기는 아니라는 거다. 다른 게 있다면 고기를 두껍게 썰었다는 것이고 한쪽 면을 충분히 익히고 한 번만 뒤집어 굽는다. 


맛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뜻이다. 더 넓은 곳으로 옮긴 그 식당 앞에는 커다란 주차장에 빼곡하게 렌터카들이 서 있고 손님들은 사열 종대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지나치게 미션 오리엔티드 하지 않은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따지자면, 제주에서는 구워 먹는 일이 거의 없었다. 삶거나 국물을 내는 게 대부분이다. 흑돼지는 제주 토종이기는 하지만 털을 그슬렸기 때문에 아주 깨끗하게 털이 제거되지 않았다. 친구가 하는 고깃집에 가니 일부러 털을 조금 남겨놓는다고 했다. 그래야 흑돼지라고 믿기 때문에. 


그렇다면 흑돼지는 그냥 돼지(흑돼지가 아닌 것)와 맛으로 구별할 수 있을까? 집앞 식당에도 흑돼지는 그냥 돼지보다 훨씬 비싸다. 나는 구별 못 한다. 돼지 농장 두 군데를 가지고 있고 식당을 하는 친구도 동의했다. 게다가 털이 보이는 고기 몇 점을 섞어놓으면 영락없다. 


어느 여행자의 여행지 선택 기준이 생각난다. “우선 가장 인기 있는 여행지를 고른 후에 그곳만 빼고 간다.” 가장 인기 있는 맛집을 조사한 후 거기만 빼고 가보면 어떨까? 대부분의 정육점을 겸하는 식당은 고기가 신선하다.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고깃집은 항상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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