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담박 Jan 15. 2017

에로스의 종말을 막는 방법

영화 <달팽이의 별>을 본 후, 한병철의 <에로스의 종말>을 읽고...

다큐멘터리 영화 <달팽이의 별>의 모든 순간은 경이롭고 아름다웠다. 그중에서도 친구들에게 저녁식사를 대접한 후 설거지를 하고 있는 아내와 그녀를 깊이 안아주는 남편의 뒷모습은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이는 내가 알고 있던 일반적인 부부의 모습과는 달랐다. 친구들에게 대접하느라 힘들었다는 아내의 투정이나 생색도 없었고, 그런 아내를 향한 남편의 위로나 미안함도 없었다. 그저 서로를 향한 조용하고 투명한 애정만이 반짝반짝 빛났다. 누가 누구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상대방의 삶을 경험하며 사랑한다는 것이란 이런 것일까?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제기한 오늘날의 사회현상에 대한 비판을 <에로스의 종말>에서 이어가고 있었다.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을 자본증식과 축적을 위해 끊임없이 내달리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회가 이전의 산업사회보다 더 잔인한 이유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구분 없이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착취하도록 유도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더 생산할 것이 없는 자본주의 세계는 자본증식과 축적의 한계를 없애기 위해 "더 할 수 있다"는 관념을 만들었다. 따라서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지 못하는 것은 나의 부족과 잘못 때문인 것으로 귀결된다. 그러므로 나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성과를 내기 위한 삶을 살아야만 한다.


이러한 사회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노동과 소비의 악순환이 반복된다. 더 많은 가산과 축적을 위해 스스로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그렇게 축적한 자본으로 상품과 매체를 소비하는 삶이 반복된다. 이러한 삶 속에서 인간은 상품과 매체가 제공하는 이미지가 자신의 소망과 감정이라 착각하고, 그것을 갖기 위한 삶을 지속한다.

둘째, 과학과 기술을 기반으로 한 정보와 데이터, 특히 시각적 정보가 흘러넘친다. 너무 많은 데이터, 그 분석 결과, 시각적인 정보는 엔트로피와 소음의 수위를 높여 고요를 필요로 하는 상상, 사유, 사색, 안식을 불가능하게 한다.

셋째, 모든 인간을 동일하고 투명하게 만든다. 나와 타인 간의 차이와 경계는 필요 없어지고, 모든 인간은 자본이라는 획일적인 기준에 따라 비교되고 다듬어진다. 이로 인해 다른 사람에 대한 비밀이나 환상은 사라지고, 나를 위해 타인을 소유하고 재단하는 관계가 일반화된다. 이렇게 각자의 나르시시즘이 만연한 사회에서 다른 사람에 대한 환상이나 비밀이 존재할 리 없고,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삶을 알아가고 경험하려는 욕구가 존재할 리 없다.


저자는 이러한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위기를 에로스를 통해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에로스 즉, 사랑의 개념도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 하에서 이미 많이 왜곡되었다. 오늘날의 사랑은 소비의 공식에 따라 여성적이고 긍정적이기만 하다. 오늘날의 사랑은 상냥하고 달콤하고 부드러워야지, 결코 열정적이고 고통스러워서는 안 된다. 오늘날의 사랑은 상품이나 구경거리로 전락되어, 신성하고 성실함이 빠진 섹스 즉, 형식에만 집착하는 포르노로 비속화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사랑이란 둘의 무대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둘이란 반드시 연인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플라톤과 소크라테스가 각자의 철학 인생에서 상대방을 존경하고 사랑했던 것처럼 친구 간에도 에로스는 존재한다고 한다. 각자의 시점을 탈피하고, 타자의 관점, 특 차이의 관점에서 세계를 새롭게 생성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한다. 자기만의 습관, 자신을 향한 나르시시즘을 벗어나서 타인의 삶을 경험하는 것만이 사랑, 즉 에로스라는 것이다. 그래서 친구나 연인이었던 사람만이 진정한 사유가 가능하다고도 한다.


영화 <달팽이의 별>에서, 자신의 관점을 벗어나 타인의 삶을 경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았다. 척추를 다쳐 키가 자라지 않은 여자와 시청각 장애가 있는 남자의 사랑. 이들의 관계는 서로를 보완해주는 요철 같은 관계와는 달랐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남편의 손등 위해 점자를 치면서 같은 말을 반복하는 아내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남편의 언어를 자신의 일부로 꼭꼭 씹어 삼키는 것만 같았다. 키가 작은 아내 대신에 천장 조명을 바꿔 끼우는 남편의 손은 아내가 만져보지 않은 높다란 천장의 느낌이 어떤 것인지 몸소 느껴보려는 것만 같았다.


서로가 자신의 삶을 위해 상대방을 취한 것이 아니라, 그저 상대방의 삶을 함께 살아가고자 만난 부부에게는, 그래서인지 도통 싸울 일이 없다. 상대방을 알아가는 삶을 살다 보니 상대방이 나를 싫어하거나 버릴까 봐 걱정할 일도 없고, 상대의 부족함을 대신 채워주려 애쓰지 않으니 힘들 일도, 좌절할 일도 없다. 키가 작아서 보이지 않는 높이가 많아서인지, 선천적인 시각장애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아서인지 그들의 생활 속에는 유독 고요함이 많다. 어느 누가에게 삶과 사랑에 대한 사색과 안식이 이들 부부보다 더 많을 수 있겠는가?


자본주의 사회란 "나"라는 상품을 사회가 제시하는 기준보다 더 낫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라고 강요한다. 이 사회는 "나"의 더 나은 삶을 위해, 필요에 의해 파트너를 찾고 결혼을 하라고 재촉한다. 자녀마저도 자본주의의 기준에 맞춰 기획하고 길들여 나가는 시대이다. 그렇게 앞만 바라보며 살다 보니 죽음이 두렵고, 죽는 날을 연장하기 위해 몸뚱이의 건강에만 신경 쓰고 살아온 지가 오래이다. 그러나 "자본적으로" 더 나은 삶이 곧 좋은 삶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와 타인의 차이를 인식하고, 자신을 버리고 타인을 알아가며, 함께 살아가는 "좋은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때이다. 자본주의에서 제시하는 공식에 함몰되지 않고, 각자의 삶에 맞는 관계, 사랑, 결혼을 이루어 나갸야 한다. 나와 타인, 타인과 타인 간의 이질성이 이 세상에 이룩해 놓은 것들이 매우 많다. 특히 수많은 문학과 예술들이 그 이질성의 토대 위에서 형성되었다. 각자의 삶이 공장에서 생산된 기성품으로 전락되지 않고, 역동적이고 감동적인 삶으로 거듭나기 위해, 에로스의 종말을 막아야만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로봇과 함께 하는 오래된 미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