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조직의 가장 뚜렷한 특징을 꼽으라면 '들어온 순서대로'(아닌 경우도 있음을 밝힌다)급여도 올려주고 승진도 시켜주는 것이다. 일명 '연공서열'. 심지어 일에도 서열이 있어서 부서나 팀에 들어온 순서대로 (무슨 임금님의 하사품마냥) 업무가 맡겨진다.
사람 자체를 보고 무슨 일을 할까 궁금해하지 않는다. 하는 일을 보고 몇 년 차인지 먼저 가늠한다. 물론 아주 일부 그렇지 않은 경우(발탁인사)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끌어온 부서장 그리고 당사자가 한동안 주위의 온갖 눈총을 견딜 각오를 단단히 해야 가능하기에 많이 드물다.
어쩌다가 공직에서 '일의 연공서열'이 이리 고착화된 것일까. 일을 하면서도 "이건 팀장급이 해야지." "이건 실무자가 해야지" 소리를 꽤나 듣는다. 그리고 나도 스스로 그렇게 합리화해 왔다. 그땐 몰랐다. 그게 얼마나 조직의 효율과 (일부지만)직원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것인지. '열심히'가 아닌 '적당히'를 부르는 주문이라고 할까.
공직에서 사람의 연공서열만큼이나 '업무의 연공서열'이 직원을 꽤나 힘 빠지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이다.
보고의 순서는 또 어떤가. 뭔가 다급한 사건이 생겨도 마찬가지다. '골든타임'이 무슨 소용인가. 팀장-과장-국장 순서를 지킨 보고가 더 중요하다고 느꼈던 순간이 또 얼마나 많았던가.
"부서에 온 지 오래되었으니 이 일 맡겨도 되겠지."
"쟤는 여기 온 지 얼마나 됐다고 그거 하려고 설치는 거야?"
"나도 아직 기다리고 있구만."
"저... 그 일하고 싶어요."
"근데 OO(고참)은 뭐래?"
(제가 그걸 알아야 하나요?)
나는 충분히 알고 있다. 이런 조직에서 내가 얼마나 욕먹기 딱 좋은 성격인지. 선임이나 동료에 대한 배려보다는 그 일을 '누가 더 하고 싶어 하는가 또 얼마나 의지가 있는가'를 따져주길 바라니까. 그러니 얼마나 '지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캐릭터로 보이겠는가. 의리도 없고 위아래도 모른다는 소리 정도는 진작에 각오했다.
지금까지는 조직의 이런 만연한 연공서열의 문화에도 공직이 그럭저럭 버텨왔겠지만. 지금은 예전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외부 환경이 많이 달라졌다. 그렇게 순서대로 의지와 적성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돌침대 고르듯 덜컥 집에 들여놓았다간 공직에는 일 좀 하고 싶어 하는 능력자들이 종국엔 죄다 사라지고 말 것이다.
급여는 원래부터 적었고 공무원연금은 하루가 다르게 국민연금과 별 차이가 없어지는 마당에 능력 있는 사람들이 뭐하러 공직에 남아 있을까. 그냥 하향평준화로 똑같아지든지 하루빨리 짐 싸서 민간으로 나가서 능력을 맘껏 펼치는 게 낫다.
그렇게 되면 결국 공직에는 (기다리기만 하면 연차에 맞는 일도 받고 승진도 하기에) 딱 적당한 정도만 일하는 사람들만 득실거리지 않을까. 일을 찾아서 하는 사람을 오히려 뒤에서 욕하고 깎아내리기도 한다. 이런 게 과연 정상인 걸까? 적당히 일하고 시간 보내면서 버티는 것이 최선인 것 말이다.
바깥세상은 시시각각 변하는데. 세상과 싸우며 다들 치열하게 살아가는데. 왜 여긴 여전히 '적당히, 적당히!'일도 승진도 급여도 '순서대로' 받는 것이 꽤나 당연하고 용인되는 분위기인가.
나부터라도 마음을 고쳐먹어야지 종종 고민하지만.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벽들로. 자꾸만 눈치 보게 되고 그냥 포기하고 싶어 진다. 어느 정도가 진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고 또 '내가 해야 하는' 최선인지 자꾸만 혼란스럽다.
아, 그럴수록 중요한 건 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작은 용기가 아닐까. 어차피 누군가의 원망이나 불만을 피할 수는 없으니까. 그냥 침묵하고 용인하면서 느끼는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자괴감보다는. 그럼에도 나는 '작은 용기'라도 내봤다는 것이 어쩌면 내가 몸 담은 조직과 앞으로 남은 긴 인생의 여정에서 더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지.
공직에서 일의 연공서열을 당장 없앨 수는 없다. 다만, 업무의 10~20프로라도 '연차에 상관없이' 적임자에게 의무적으로 맡기도록 하는 건 어떨까. 요즘에는 신규 공직자가 오히려 (공직문화에 물들지 않아) 보다 열린 시각과 디지털 기술에 익숙해서 일을 더 잘 해내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업무의 연공서열부터 조금씩 바꿔 가다 보면 공무원을 단지 '철밥통'이라는 이미지만으로 선택하는 사람이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언제까지 공무원이란 직업이 '철밥통'이란 이상한 단어로 대변되어야 하는가. 진정한 '일잘러'들이 가고 싶고 또 되고 싶은 직업이 공무원이 되는 그날까지 나는 계속 작은 용기를 발판 삼아 계속 나아가야 한다.
'공무원의 품위'를 유지하는 방법은 과연 무엇이 되어야 할까. 자정기능을 상실한 조직과 그 속에서 안주하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품위 있어 보이는가? 내가 정의하는 가장 품위 있는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고치려고 계속 노력하고 또 성장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공무원의 업무'에도 나름의 품위가 있다. '선착순 대기표' 대신 업무에도 진짜 '품위'를 주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