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치킨 한 조각을 나눠먹던 외계인 엄마의 기록
(사진작가)"혹시 상의 안에 뭐 입으셨어요?"
(영지)"아, 이 안에요? 검정탑이요"
(사진작가)"그럼 탑만 입고 등 한번 찍어보시겠어요?"
(영지)(잠시 머뭇거리다가)"네...가능해요! 잠시만요"
2025년 2월, 바프 촬영의 날
무대 뒤편으로 잠시 사라졌다가 나는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하얀색 조명을 등뒤로 한채 검은색 렌즈가 반짝거리는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했다. 오른쪽은 커다란 조명이 나를 비추고 왼쪽에는 세로로 길쭉한 큰 모니터 화면이 카메라로 찍히는 내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사진작가의 포즈 주문들. '뒤로 돌아서세요', '발목을 살짝 들어올려요','턱을 조금만 당겨주시겠어요?' 등등. 국내에서 바디프로필 촬영으로 꽤나 유명한 곳이었고, 오랜 경험과 전문가다운 자신감이 깃든 작가의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주의를 집중하면서 전적으로 내 몸의 움직임을 그에게 맡겼다. '찰칵, 찰칵, 찰칵!' 쉴새없이 카메라 소리가 600번 이상 울리고나서야 내 인생 첫 바디프로필 촬영이 끝났다. 촬영시간은 단 90분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을 위해 내가 준비한 시간은 약 10개월이었다.
촬영장 커다란 모니터를 통해 보여지는 내 모습은 꽤나 편안해보인다.
아니 심지어 즐거워보인다!
2024년 4월, 몸에 대한 현타가 온 날
늦은 퇴근 후 9시쯤, 푸짐한 생일상을 배불리 먹고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기분나쁜 포만감에 모든 것이 귀찮은 딱 그 느낌.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안되겠다싶어서 거실로 나갔다. 그리고 소파 옆에 놓인 체중계 위에 올라가서 몸무게를 확인했다. 63kg. 수치를 보는 순간, 마음속으로 이제 더는 미뤄서는 안되겠다, 뭐라도 해야한다는 생각이 급작스럽게 올라왔다. 곧바로 휴대폰 사진첩을 뒤져서 며칠 전 사진을 찍어 둔 아파트 상가 헬스장 연락처를 찾았다. 마음이 바뀌기전에 빨리해야 한다. '혹시 피티 상담 가능하실까요?', '네, 회원님! 지금 바로 오시면 됩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나는 츄리닝 바지를 입고 곧장 헬스장으로 달려갔다. 근무중인 트레이너와 10분정도 상담 후 곧바로 피티 수업을 시작했다. 이것이 내 인생 첫 바디프로필의 출발점이다. '체중 63kg, 체지방율 30% 그리고 몸에 대한 현타 100%'
소박한 첫 목표, "체지방 3kg 감량"
내가 피티를 시작한 이유와 첫 목표는 지극히 소박했다. 체지방 3kg 감량. 아침저녁 공복 체중확인과 주 3회 피티수업, 트레이너에게 매끼니 먹은 음식을 촬영해서 카톡으로 확인받는 고강도 '식단관리'가 시작되었다. 처음이었다. 누군가에게 그날 먹은 음식과 몸무게, 마신 물의 양까지 정리해서 보고하는 경험은. 하지만 내겐 분명한 목표가 있었기에 철저하게 내 생활을 통제당하는 것을 거부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다만, 근력운동을 제대로 한번도 한적이 없었던 나에게 무게를 들기위한 동작들은 낯설고 어렵기만 했다. 그리고 직장생활과 식단관리를 병행하는 것 또한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않았고 나를 위해 짜준 식단에 맞춰 하루하루 버텨냈다. 그리고 3개월쯤 되었을때. 담당 트레이너가 "회원님, 식단관리는 정말 잘하고 계십니다"라는 칭찬까지 들을 수 있었다. 몸무게는 매일 조금씩 빠지고 있었고, 60키로대에서 50키로대로 앞자리가 바뀌던 날은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지금도 그 날의 뿌듯함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렇게 첫 번째 트레이너와 피티와 식단관리를 이어가면서 수업 4개월즈음 나의 몸무게는 54kg까지 내려갔고, 체지방은 20%대로 떨어졌다.
새 트레이너와의 만남 그리고 목표의 상향, "회원님, 바프촬영 해보시면 어때요?"
애초 계획에도 없던 바디프로필 촬영까지 가는데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두 번째 트레이너이자 헬스장의 창업자인 매니저였다. 첫 트레이너와도 운동일지를 작성하긴 했지만 내가 아닌 그가 형식적으로 채우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 시스템을 직접 만든 매니저는 달랐다. 수업과 운동일지의 내용을 연계하여 회원이 직접 그날 수행한 운동을 정리하고 일지에 손수 적게했다. (매니저의 말을 빌자면) 철저하게 '원리와 근거로 수업한다'는 원칙을 고수한 것이다. 작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4개월동안 이어진 매수업에서 보여지는 그의 진정성 있는 모습에 조금은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헬스장을 찾았던 내 모습이 살짝 부끄러워지는 순간이 잦아졌다.
그리고 풀업어시스트 기구에 올라서 광배 근육을 키우는 걸 배우던 날. 수업하다 말고, 그가 건너편의 다른 회원을 가리키면서 며칠전 바프촬영을 하신분이라고 했다. 전문 모델처럼 근육이 잘 붙은 멋진 분이었다. 그러면서 "회원님도 한번 해보시면 어때요?"라고 내게 툭 던졌다. 당황한 나는 손사레를 치면서 "지금은 학기중이기도 하고, 극단적으로 몸무게를 빼는 일. 저는 못할 것 같아요"라고 답했다. 그는 뭔가 더 답을 바라는 듯 계속 기다렸고, 잠시 후 내가 덧붙였다. "(체중을) 극단적으로 빼는게 아니라면 겨울 방학때 한번 생각해 볼께요" 나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매니저는 말없이 다시 수업에 집중했다. 그리고 스치듯 그의 눈빛이 반짝이는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극단적으로 몸무게를 빼는 일, 저는 못할 것 같아요. 하지만...
바프전문 트레이너와의 2개월, "회원님, 이렇게 하실꺼면 바프 왜 찍는다고 하셨어요?"
시간은 흘러 내가 약속한 겨울방학이 되었다. 매니저는 오전 트레이너가 바프는 자기보다 경험이 많으니 2달 동안 집중적으로 그와 함께 몸을 한번 만들어보라고 제안했다. 새벽 6시, 주 2회 바프만을 위한 피티가 시작되었다. 식단에서 탄수화물은 더 줄었고 먹을 수 있는건 더욱 단순해졌다. 한 번은 방어회를 먹었다가 트레이너에게 한참을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회원님, 이렇게 마음대로 드실꺼면 왜 바프 찍는다고 하셨어요?"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 후 조용히 그가 시키는대로 식단도 운동도 최선을 다해서 따라갔다. 그렇게 아침마다 고강도의 근력운동이 이어졌다. 특히, 촬영에서 가장 부각되는 복근 근육을 위한 다양한 동작이 추가되었다. 54kg에서 시작된 나의 체중은 점점 줄어들어 촬영 1주일전에 50kg까지 내려갔다.
어느 날 저녁. 개인운동을 위해 헬스장을 찾은 내 모습을 오랜만에 본 매니저. 그는 놀라움과 만족스러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아니, 회원님. 얼굴이 반쪽이 되셨어요!"라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몸에 지방이 계속 빠지면서 근육은 더욱 도드라졌지만 얼굴은 그야말로 '해골'이 되었다. 바프를 며칠 안남긴 어느 날. 운동 후 집에 와서 요거트를 꺼내려고 힘없이 냉장고 문을 여는 나를 본 아들이 건넨 말은 "엄마, 꼭 외계인 같아". 그러면서 자기가 먹던 치킨 한 조각을 불쑥 내민다. 그리고 조금은 안쓰럽게 덧붙인다. "엄마, 제발 좀 먹어" 사실 아들이 자기가 먹던 치킨을 내게 손수 내민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아들의 행동에 감동이 밀려오면서도 빨리 이걸 끝내야 겠다는 생각이 교차되었다. 그래, 며칠만 견디자.
내 몸은 외계인이 되었고, 아들은 나에게 처음으로 치킨 한 조각을 건넸다!
드디어, 인생 첫 바프촬영날! "내 인생 가장 맛있는 떡볶이를 영접한 날!"
얼굴은 해골, 아니 외계인의 모습으로 더욱 변해갔고, 출근하고 마주치는 직장 동료들의 걱정스런 시선에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을 이용하는 것이 꽤 익숙해질때쯤. 드디어 촬영이 하루앞으로 다가왔다. 아침 공복 몸무게 47.5kg. 몇 달전 극단적인 체중 감량은 못한다고 내 입으로 말했던 나도 어쩔수 없나보다. 한번 시작한 건 제대로 해야지하는 '오기' 비슷한 것인지 '하다보니'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목표한 체중보다 3kg이상 더 뺀 것이다. 그날 저녁 가벼운 유산소 운동으로 몸의 긴장을 풀어주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수분섭취없이 트레이너가 정해준 양의 쌀밥만 먹고 촬영장으로 출발했다. 지하철을 타고 올라가는 시간동안 마음이 묘했다.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오늘 잘할 수 있을까',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한 시간을 기억하자. 그리고 잘하자. 편하게 마음먹고' 이런저런 생각들이 정리가 될 즈음. 메이크업을 예약한 곳에 도착했고 1시간만에 준비가 끝났다. 택시를 타고 스튜디오로 향하는 짧은 시간. 유난히 날이 좋았던 그 날, 창밖에서 비치는 햇살로 밝아진 뒷자리에서 손거울로 잠깐 확인한 얼굴. 긴장감은 '1'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다행이다.
스튜디오 도착 후. 정해진 예약시간으로 2시간 남짓 머문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사진작가와의 컨셉회의를 시작으로 준비해 간 당과 에너지 음료 섭취. 바쁜 일정에도 동행해 준 매니저와 함께 한 웜업 동작. 그리고 준비해 간 옷을 들고 드디어 촬영장으로 입장! 쉴새없이 진행된 의상과 포즈의 변경과 사진작가와의 소통. 촬영 말미에는 내 표정이 자연스러워서 예상보다 일찍 충분한 분량을 찍었다고 작가도 만족스러움을 표현했다. 다행이었다. "아, 생각보다 떨리진 않네요"라고 내가 민망한듯 웃으며 답한것도 그 날 내 기억의 한 줄에 남았다.
그렇게 만족스럽게 촬영을 마치고 곧장 향한 곳은 '떡볶이와 치킨 맥주'가 있는 동네 음식점이었다. 내게 바프를 권하고 나날이 매말라가는 내 모습에 기분이 좋으면서도(?) 많이 미안했는지 매니저는 바프 후 가장 먹고싶은 음식을 미리 내게 물었다. 그리고 내가 말한 음식을 촬영 끝나자마자 바로 사준 것이다. 그날 저녁 바로 배탈이 나서 며칠 고생은 좀 했지만, 정말 맛있게 먹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맛있는 떡볶이를 '영접'한 날이 바로 그 날이다.
내 인생 가장 맛있는 떡볶이를 영접한 날!
바프 촬영 그후 4개월 "나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된 이후"
(아들)"엄마, 왜 이리 많이 걸어놨어?"
(영지)"왜, 보기 좋잖아"(웃음)
(아들)"딱 하나만 걸지. 암튼. 엄마, 나 운동 간다!"
(그러면서 자신의 상체를 엄마에게 한번 '으쓱' 뽐내면서 방을 휙 나간다)
내 방 침대헤드와 화장대 앞, 그리고 벽면 아래에는 4개월 전 찍은 바디프로필 액자가 얌전하게 놓여있다. 아들이 왜이리 많이 두었냐고 핀잔을 주긴 했지만, 요즘 아들도 헬스장에 혼자 가서 몸 만들기에 진심이다. 가끔 나와 같이 파트너운동을 할 정도로 엄마와 함께 근육을 만드는 것에 아이도 익숙해진 것이다.
그렇다. 이제 사진으로 박제된 채 나의 가장 비밀스러운 공간을 채우고 있는 바디프로필은 과연 어떤 의미로 남았을까? 촬영 후 4개월이 지나, 이제야 정리해본 10개월여에 걸친 바디프로필 서사에서 가장 먼저 떠올린 내 안의 변화는 무엇일까. 나 스스로도 믿기지 않고 또 아직 이런 표현이 조금은 낯설지만...
내 몸을 통해
나는 내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
진심으로 내가 존재하는 그 순간을 즐기는 내 모습.
이것이 인생 첫 바디프로필의 가장 큰 성과이자 발견이다. 스튜디오 한 켠에 마련된 커다란 모니터를 통해 진짜 내 모습을 우연히 마주하면서, 내 안에 낯설지만 새로운 모습이 있음에. 그 순간이 새삼 놀라웠고 또 반가웠다. 꽤 오랜기간 잊고있었던 '진짜 나'를 그 날 마음 깊숙한 곳에서 두 손 꼭 잡고 세상밖으로 이끈 것이다. 그랬다!
(며칠 전 헬스장, 운동을 끝내고 나가는 길)
(영지)"매니저님, 잠깐 시간되세요?"
(매니저)"지금요? 네, 가능합니다!"
(영지)"이것 좀 봐주세요. 지난 3개월 피티없어 혼자운동 한 결과입니다"
(방금 측정한 인바디 출력물을 그에게 내민다. 체중 53kg, 체지방율 15%. 골격근량 24.7kg)
(매니저)"훌륭하네요! 일반인이신데 이 정도면 정말 잘 유지하신거에요. 제 평가 점수는 A입니다!"
(영지)(당황한 표정으로 다급하게)"아니, 왜 A플러스가 아니에요?"
(매니저)"아, 지난번 데드리프트를 제가 가르쳐드린대로 하지않으셨어요. 그래서 '+'는 뺐습니다"
(영지)"아, 네. 그건 좀... 네, 뭐. 알겠습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바디프로필 #피티 #근력운동 #40대여성운동 #헬스일기
#운동루틴공유 #다이어트후기 #몸변화기록
#자기이해의과정 #몸을통한성장 #외계인엄마
#피트니스에세이 #브런치글쓰기 #헬스에세이
#바디프로필후기 #위오스튜디오 #어센틱짐 #곡반정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