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누룽지조아 Nov 11. 2023

3. 통합적으로 바라보기

제6장 세상과 환경에 대하여

생각하는 방법은 분석적 사고와 통합적 사고로 나눌 수 있다. 분석적 사고를 할 때 시간적,  공간적, 사회적(제도, 법, 구조 등), 윤리적인 측면(도덕적 가치, 양심)으로 쪼개고 지식을 인식틀로 사용한다. 지식은 참과 거짓 등의 이분법으로 쪼개고, 대조하며, 끼리끼리 편을 가른다. 또한, 일부 자기가 아는 것에 갇혀 기중심적인 고정관념에 사로잡힐 수 있다.


이런 단점이 있다고 분석적 사고를 하지 말자는 주장은 아니다. 세상에는 분석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 많다. 오히려 그런 사고를 하는 사람의 의견을 경청해야 여러 측면에서 볼 수 있으며 내 생각을 검증할 수 있다. 또한 그 방법이 가지는 이분법, 비교, 대조, 그룹 짓기 등의 한계를 알아 세상을 잘 이해하고 그런 사람이 공격할 때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다.


쪼갠 것을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능력을 연마하여 균형 잡힌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문제를 해결하자는 주장이다. 쪼개는데 강하고 합치는데 약하다. 평소 인식 습관이나 학교 교육으로 현상을 쪼개 보는 것을 잘할 수 있다. 그러나 쪼갠 것을 한 덩어리로 합치고, 종합적으로 보는 통합능력이나 대립하는 양면을 포괄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창의성에 대한 훈련에 들이는 공은 은 것 같다.


통합적으로 바라보는데 두 가지 중요한 사항이 있다. 왜 통합적으로 보아야 하는지와 어떻게 통합적으로 보는 능력을 키울지다.


먼저 어떻게 통합적으로 보는 능력을 키울지에 대해 생각해 본다.

통합적으로 보는 능력을 키우는 방법으로 간화선(화두선), 사물과 배경을 같이 보기, 다양성 존중과 이해, 본질과 현상을 하나로 느끼는 팔다리에 집중하여 걷기 등이 있다. 0차원(없음, 점)이나 무한 차원으로 생각하는 훈련이다. 전체를 한 덩어리로 보며 부분이 뒤섞여 뭐라고 한마디로 말할 수 없는 세상을 느끼는 수련이다. 마치 빛을 사물에 투사하면 흡수와 반사에 따라 색깔이 드러나지만, 뭉쳐 있을 때 투명해 안 보이는 빛을 느끼는 훈련과 유사하다.


간화선(화두선)에서 모순을 이용하여 질문한다. A인 경우 틀리고, A가 아닌 경우도 틀리다고 화두를 던진다. 생각은 갈 곳을 잃고 꼼짝달싹하지 못한다. 모순의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잡생각을 못하게 하여 한곳에 집중시키고, 모순을 통해 진리를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리는 대립하는 것을 모두 포괄해야 하므로 모순의 형태를 띤다. 모순된 상황을 예로 들면 인간은 홀로 있으면서 같이 있을 때 행복을 느낀다. 혼자도 아니고 같이 있을 때도 아니다. 즉 자기중심을 잡아 독립적이면서 남과 관계가 좋을 때다. A인 경우 틀리고, A가 아닌 경우도 틀리다는 질문에 이런 대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그런 것은 없거나 전체다. 전체는 A일 수도 A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물을 볼 때 사물의 구성요소로 배경도 같이 보며 형태가 있는 것은 변하므로 겉모습보다 변화에 집중한다. 또한 존재가 어떤 반응을 하든, 어떤 결과가 나오든 온갖 가능성을 존중하고 이해한다. 인간은 자기가 경험하고 관찰하여 알고 있는 대로 세상을 본다. 경험하지 못한 게 많으며 시야가 좁아 지구에 서서 우주를 보는 꼴이다. 다 알지 못하고 다른 사람도 신성을 가진 존재이므로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고 이해하여 시야를 넓히고 객관화한다.


걸을 때 팔다리의 움직임에 집중한다. 본성이나 신성 등으로 불리는 본질은 인식 대상이 아닌 인식 주체이고 0과 같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없다. 본질이 작동하는 팔다리의 움직임을 통해 간접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다. 누가 시켰는지 걷거나 흔들라고 명령하지 않아도 저절로 걸어지며 팔이 휘젓어진다. 시킨 자가 생각은 아닌 것 같다. 며칠 전 술 먹고 걷는데 졸았다. 넘어지지 않았고 생각이 없는데도 걸었다. 깨어 걸으면서 팔다리의 움직임에 집중하는 것은 인식할 수 없는 본질이 작용하여 나타나는 현상을 느끼고, 현상을 통해 본질을 간접적으로 느끼는 훈련이다.


왜 통합적으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본다. 실제 세상이 통합된 형태로 존재하고 움직이기 때문에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훈련이다. 인간은 시공간, 감정, 나와 남에 대해 잘못 인식하고, 인식 오류 속에 사는 것 같다. 현재의 한 면에서 살고 있고, 내가 아닌 외부에 휘둘려 온갖 생각을 하며, 좋고 싫은 감정에 휩싸여 산다. 또한 부분이 개별적으로 작동한다고 생각을 하지만 사실 서로 의지하는 부분이 통합되어 한 덩어리로만 작동한다는 생각이 든다. 컴퓨터를 중앙처리장치, 입출력장치 등으로 이름을 붙일 수 있으나 개별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것과 유사하다. 쪼개 이름 붙이는 것은 편리하게 인식하기 위해 임의적으로 구분한 것이고 실재가 아닌 것 같다.


어쩌면 실재하는 현실은 과거, 현재와 미래의 한 덩어리고, 애증의 한 덩어리이며, 나, 남과 환경의 한 덩어리인지도 모르겠다. 시공간과 애증의 감정에 섞여 있고 나와 남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다. 기존 통념대로 생각하면 완전히 얼토당토않은 소리다. 그래도 이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과거, 미래의 시간과 공간은 현재에 섞여 있다.’ 사람은 현재만 느끼고 과거나 미래를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하나 사실 과거, 미래가 섞인 현재의 길을 걷고 있다. 내가 걷는 길은 현재의 길이다. 눈으로 보는 앞 길은 빛이 반사되어 시신경에 도달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므로 과거의 길이다. 현재의 길은 지나온 길을 기준으로 하면 빛이 아직 시신경에 도달하지 않은 미래의 길이다. 꿈속처럼 과거, 현재, 미래가 분리되어 있지 않은 길이다. 또한 그믐밤 들판 논길을 거닐어 보자. 하늘이나 껌껌한 길에 가로, 세로, 상하 등 그런 것은 없다. 머리에 그리면서 걷는 사람도 없다. 가로, 세로, 상하 등으로 나누어 확정한 위치는 실재가 아니며, 임의적으로 구분하여 이름을 붙인 것에 불과하다.


‘애증의 감정은 오가고 섞여 있다.’ 여러 감정이 원래 없다면 갑자기 튀어나오고 변할 수 없다. 온갖 감정이 섞여 있고 수시로 인연에 따라 어떤 하나의 감정이 튀어나온다고 추측할 수 있다. 감정은 변한다. 좋아하는 감정이 일어났다가 마음에 안 들면 미워하고 이해하니 가련해 보인다. 살아있는 동안 상황에 따라 이런저런 감정이 드는 건 피할 수 없는 파도다.


'인식한 남과 환경은 내 머릿속에 나와 섞여 있다.' 인식한 남과 환경은 별도로 존재하지 않고 내 머릿속에 있다. 남과 환경이 구분되어 보이는데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할 수 있다. 내가 알 수 있는 세상은 머리로 인식하여 창조한 세상이라는 말이다. 인식의 한계로 실재는 다를 수 있다. 머릿속에는 나만 존재하지 않고 나, 남과 환경이 존재하고 그것들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꿈꾸는 상황을 떠올리면 그 느낌을 이해하기 쉽다. 꿈속에서 나, 남과 환경이 분리되어 생생히 움직이지만 꿈을 깨 보면 나, 남과 환경 모두 내 마음속에서 일어난 현상이고 모두가 나다. 우리가 보는 세상은 마음에서 인식한 세상이다. 마음으로 인식하는 세상의 모습은 눈으로 보는 세상과 똑같을 것 같다. 생동감 있게 펼쳐져 있으며, 세상이 마음속으로 들어와 있거나 마음이 몸을 나가 세상을 껴앉고 있는 것 같다.


나와 남을 한 덩어리로 느끼는지, 분리하여 인식하는지 남에게 욕해 보자. 나와 남이 분리되어 있다면 내 부정적 자극이 나에게서 빠져나가 남에게 갔으므로 내 기분이 좋아져야 한다. 그러나 내 기분이 나빠진다. 인식한 남이 내 머릿속에 있어 나에게 부정적 자극을 준 것과 동일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남을 인식하며 나와 한 덩어리로 느끼고 있다.



현재는 과거나 미래가 섞인 한 덩어리이므로 현재를 희생하지 않는다. 현재에 과거와 미래가 다 포함되어 있으므로 과거 후회하거나 미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현재 그냥 성실히 노력한다.


그냥 놔두면 외부 사물의 자극에 온갖 내 생각과 감정이 날뛰므로 외부자극에 휘둘리지 않고 현재의 나에 집중한다. 또한 감정은 한 감정만 있는 게 아니라 여러 감정이 섞여 있는 한 덩어리이므로 오가는 감정에 집착하지 않고 바라본다. 지기 싫어 고집부리는 애를 다루 듯 무관심한 척 딴 일에 집중하고 그저 바라만 본다.


나는 남이나 환경과 뒤섞인 한 덩어리이므로 나도 좋고 남도 좋은 일을 선택한다. 존재는 단독이 아니고, 서로 의존한다. 존재의 행동도 단독행위가 아니고, 반작용을 하는 다른 사물과 함께하는 합동행위다.


신나게 쪼개고 상호의존 관계를 고려하여 통합적으로 바라본다. 시공간, 애증의 감정과 나를 넘어선다. 아주 곯아떨어져 시공간, 애증의 감정이나 나와 남에 집착 없이 잠을 푹 자는 것과 같은 삶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2. 지혜: 세상의 작동원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