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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룽지조아 Mar 23. 2024

66. 생각을 비우고, 고요한 세계와 본성을 만난다

도덕경 제16장

비움을 극한 경지에 이르게 하고,

고요함을 두텁고 성실하게 지킨다.

 

나란히 지어진 만물에서

난 순환반복을 바라본다.

저 만물들은 많고 무성하지만,

저마다 그 근원으로 돌아간다.

 

근원으로 돌아감을 고요함이라 하며,

고요함을 본성으로 복귀함이라 한다.

본성으로 복귀함보편적 이치라 하고,

보편적 이치를 아는 것을 밝음이라 한다.

보편적 이치를 모르면 망령이 나 흉하다.

 

보편적 이치를

알면 포용하고,

포용하면 공평하다.

공평하면 온전하고,

온전하면 하늘이다.

하늘이면 도고,

도는 오래간다.

자신을 잊고 남과 다투지

않으므로 위태롭지 않다.

 

致虛極, 守靜篤. 萬物並作, 吾以觀復.

치허극, 수정독. 만물병작, 오이관복.

夫物芸芸, 各復歸其根. 歸根曰靜, 靜曰復命.

부물운운, 각복귀기근. 귀근왈정, 정왈복명.

復命曰常, 知常曰明. 不知常, 妄作凶.

복명왈상, 지상왈명. 불지상, 망작흉.

知常容, 容乃公, 公乃全, 全乃天,

지상용, 용내공, 공내전, 전내천,

天乃道, 道乃久. 沒身不殆.

천내도, 도내구. 몰신불태.

 

마음을 비우고 고요한 세계에서 만물에 공통이고 보편적 에너지본성을 만나며, 밝고, 포용하며, 공평하고, 온전하다. 고요한 세계의 만물이 하늘과 땅이자 다.


'빈 마음(虛心)으로 고요함(靜心)을 지킨다.'

도를 터득하기 위해서 아무 생각이 없는 빈 마음으로 고요함을 굳건히 지킨다. 빈 마음 상태를 가지려면 마음을 다루는 연습이 필요하다. 오가는 감정, 생각이나 의욕을 오가게 내버려 두고 바라본다. 하나에 집중하고 바라본다. 그 하나마저 날려버리고 무 생각이 없상태에 빠져든다.


내 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면 진리가 들어올 틈이 없다. 마음이 외부 존재에 쏠려 끌려다니는 경우 엉뚱한 것에 마음을 뺏겨 현재의 나에 집중할 수 없다. 내 생각을 비우고(虛心), 만물의 순환반복을 관조한다. 만물은 다 근원으로 돌아간다.

 

존재의 근원이자 마음의 고향인 무의 세계는 시공이 없고, 음양이 뒤섞여 균형을 이루고 있으므로 색깔, 냄새, 소리와  모양이 없는 고요한 세계라고 한다(靜). 무(비존재)는 직접 느낄 수 없고, 존재에 작용하는 모습과 존재가 움직이는 모습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노자가 말한 대로 조용히 나에게 집중한다.

 

'고요한 세계에서 본성(命)과 보편적 이치(常)를 만난다.'

변하는 나를 제외하고 또 제외시킨다. 남는 게 보편적인 나다. 보편적 나란 현재에 존재는 하지만, 많은 내가 생기고 사라지며 변해 일정한 형상이 없으며, 환경까지 담은 나인 것 같다.  문장은 보편적인 나에 대한 개념 설명이다. 실재 걸으면 아무 생각 없고 눈을 감아도 저절로 움직이는 현재의 내가 그런 모습의 나다. 고요한 무의 세계다. 공기처럼 존재의 작용이나 움직임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다. 보편적인 자아고, 본성(命)이라고 할 수 있다.

 

만물 모두 도를 품고 있으므로 나도 도를 안고 있다. 내가 본성을 알면 보편적 이치(常)저절로 알아 밝게 볼 수 있다(明). 보편적 이치를 모르는 사람은 세상이 어디로 가는헤갈려 헤매므로 어둠에 빠져 운이 사납고 불길하다.


(命)을 본성으로 해석했다. 존재에 공통적으로 있는 초월적 에너지로 덕성, 신성, 불성, 본성, 천명, 천성, 참나, 진여 등으로 부를 수 있는 것 같다. (常)을 보편적 이치로 해석했다. 변하지 않는 일정함으로 도리, 보편적 이치, 자연의 이치, 참된 이치, 진리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나를 잊고 세상과 하나 된다.'

보편적 이치를 깨달은 사람은 나를 구성하는 요소인 남이나 환경도 차별하지 않고 포용한다(容). 다 나이므로 차별할 게 없어 공평하고(至公) 온전한 합일체다(全). 환경까지 나이므로 하늘과 하나된 모습이다(人乃天).

 

내 범주에 환경까지 확장된 큰 나(大我)다. 온 세상과 하나가 되었다. 만물의 총합인 도(道)의 모습이다. 도는 옛날부터 오랫동안 있었다(久). 몸과 정신만 나로 생각하는 나를 잊고(沒身, 無私) 환경까지 나로 생각하니 내가 싸워서 이겨야 하는 이 없다. 위태롭지 않고(不殆) 도처럼 오래간다.

 


노자가 생각하는 본성

본성이란 만들어지지 않고, 원래 타고난 성질 에너지다. 신이 만물에게 부여한 신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은 착한가? 악한가? 착하다는 입장이 성선설이고, 악하다는 입장이 성악설이다. 인간의 본성을 보는 관점에 따라 정치와 사회문제 해결책이 다르다.

 

먼저 성선설의 입장을 살펴본다. 성선설의 대표적인 학자는 맹자다. 인간은 본래 선한 인(仁), 덕(德)과 의(義)를 가지고 태어나지만, 욕망에 의해 본성이 변질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선한 본성을 변질시키는 욕망을 억제하는 수행과 교육에 집중한다.

 

반면, 성악설에서는 인간은 본래 악하며, 이익을 좇는 존재로 본다. 대표적인 학자는 순자다. 시기, 미움이나 욕망은 타고난 본성이다. 이 때문에 서로 다투고 빼앗는다. 따라서 타고난 악한 마음을 인위적인 예(법률 등)와 교육으로 바로잡고자 한다. 법치의 근거가 되는 사상이다.

 

노자의 주장은 성선설도 성악설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만물의 근원을 도에 두고 있으며, 도의 본체는 음양이 뒤섞인 무(無)다. 따라서 사람의 본성도 무라고 할 수 있다. 무는 선과 악, 나와 남을 나뉘지 않는다. 도가 천지 만물 모두에게 본성을 주었으며, 본성을 임의대로 선과 악이라는 가치로 나눌 수 없다고 주장한다. 만약 선과 악으로 나눈다면 절대적 가치가 아니라 기준에 따라 변하는 상대적 가치다. 또한, 선과 악이 있다고 생각하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서로 꼬여 동거한다(2장).

 

무의 세계는 나와 남이 따로 없으므로 경쟁하지 않고 이롭게 한다(利他心). 사회생활과 학습으로 나와 남을 분별하고, 자기 생각(자의식) 만든다. 자의식이 무를 가린다. 자의식이 발달하여 나를 높이고, 남과 경쟁하며, 자기 이익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노자는 발달된 자의식을 내동댕이 치고 원래 고향인 대도로 돌아가라고 강조한다. 대도로 돌아간 본성은 무지, 무욕과 무의식의 상태다. 이 상태에서 도를 만날 수 있다. 대도로 돌아가기 위한 수단으로 자기 생각을 비우는 수양을 한다. 자기를 낮추고 남을 존중하며(下心), 고정된 자기만의 생각이 없어 한 생각에 집착하지 않는다(無心). 고요한 세계며,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고 전체와 화합한 상태다(無我).


성선설과 노자는 모두 수행에 가치를 둔다. 성선설은 안 좋은 것을 억제함으로써 선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수양의 목적이다. 노자는 선악이 뒤섞여 투명한 상태를 지향하므로 다 포용하거나 그런 생각을 다 지운 빈 마음으로 돌아가 고요한 세계의 본성을 만나는 것이 수양의 목적이다.

 

무심하고 무아한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양심이 있다. 순수한 마음으로 내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시키지 않는다. 전체와 하나된 상태이므로 남도 나처럼 생각한다. 한 편으로 치우치지 않아 우선시해야 할 ‘자아’가 없다. 영국의 도덕 철학자 샤프츠베리, 허치슨 등은 양심을 이타심과 동정심 등 도덕 감각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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