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누룽지조아 May 16. 2024

그 후 껌종이

예똥이의 일기 6

2024년 5월 15일


사람들은 그 후 껌종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했다. 아빠도 껌종이의 열렬한 팬이다. 오늘 쉬는 날인데 아빠는 껌종이에 대해 글 한 편 써달라고 졸랐다.


나는 이미 중학교 2학년이 되어버려 초등학교 2학년 때와 같은 껌종이를 그릴 수 없지만 아빠의 요청을 귀찮은 척하며 옛날 그 시절로 돌아갔. 


… 며칠째일까? 이 도로에 버려져 슁슁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차들을 하염없이 보며 이곳에 딱 붙어 보낸 나날들이.


나는 여기에 있으면서 꽤나 많은 것을 배웠다. 

인간들의 언어를 대부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그동안 들은 여러 가지 정보들로 이곳이 대한민국의 고속도로 한복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많은 잡다한 사건들이 있었지만 난 아직도 그날을 잊지 못한다.


그날 달린던 차가 어디 고장이 났는지 도로가멈췼다. 두 명의 남성이 차에서 내려 나와 그리 멀지 떨어지지 않은 에서 얘기했다.

“아이씨 왜 이 타이밍에 차가 또 말썽이냐?”

“제가 보험사 부르겠습니다. 김 과장님”

“하.. 재수가 없으려니. 이 대리, 담배 한 대 필래?”

“아, 괜찮습니다. 금연 중이라 금연껌 먹겠습니다.”


김 과장이라 불리는 늙은 남성은 담배를 피우며 허공을 응시했다. 이 대리라 불리는 젊은 남성은 껌을 씹으며 멋쩍게 웃었다. 


둘 사이 어색한 침묵을 깨뜨린 것은 이 대리의 한마디였다.

“… 껌 포장은 왜 이렇게 두꺼운 까요?

다 먹으면 한 겹, 두 겹 껌종이 쓰레기가 한 뭉텅이 나온다니까요, 하하. 버리는 것도 일이에요.”


턱, 시간이 멈추는 느낌이었다. 그 남성의 ‘껌종이 쓰레기’라는 그 한마디가 그동안 잊고 있었던 내 존재의 본질을 일깨워 주는 것 같았다. 내가 처음 버려진 그날부터 지금까지 궁금해했던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그렇구나. 나는 그저 껌을 둘러싸고 있었던, 버리기도 귀찮은, 하찮은 껌 종이 쓰레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구나.

나는… 그냥 이런 생이 당연한 거구나.


나는 그날 이후로 생각하는 것,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을 멈췄다. 인간들의 언어를 배우는 것도, 인간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일기를 쓰는 것도 껌종이에겐 사치였다.


세월의 풍파를 정통으로 맞아 더 이상 이게 초록색인지 형태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분해된 내게 누군가가 말했다.

“우와, 안녕하세요? 저는 과자봉지라고 해요! 그쪽은 누구세요?”

“…”


과자봉지는 내 대답 여부와 상관없이 그저 그의 질문만 와다다다 쏟아냈다.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저기요? 계세요? 안녕하세요? 여기는 뭐 하는 데에요? 어, 저건 뭐예요? 저 커다란 건 뭐예요?”


계속되는 질문에 지친 나는 마지못해 대답을 했다.

“… 여긴 고속도로. 저건 인간. 저건 차.”


그러나 그는 예상과 달리 내 대답에 더 신이 났는지 더 많은 말을 걸었다.

“헉! 거기 계셨네요? 대답이 없으셔서. 거기 없는 줄 알았어요. 언제부터 거기 계셨어요? 고속도로가 뭐예요? 근데 저거는…”


대답을 해줘도 끊임없는 그의 말에 나는 짜증이 나 소리쳤다.

“그 딴 거 알아서 뭐 하게! 너나 나 같은 포장지들은 그냥 쓰레기에 불과해!

너 같은 비닐 쪼가리를 누가 필요로나 할 것 같아?

인간들은 원래 알맹이만 쏙 빼먹고 지들 음식 열심히 보호해 준 우리 같은 포장지는 쓰레기 취급하며 아무 데나 버려버리는 비겁한 족속들이라고! 누가 누구더러 쓰레기래?”

“…”


그가 입을 뗀 건 조금 뒤였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


“왜 그렇게 부정적으로 단정 지으시냐고요?

“그야.. 한 인간이 그랬어. 우리더러 쓰레기라고.”


“아저씨, 이 도로, 무슨 색이라고 생각해요?”

“뭐? 뜬금없이 뭔 소리..”


“무슨 색이라고 생각하시냐고요?”

“.. 검은색”


“전 햇빛에 비쳐 황토색으로 보여요. 그리고 저 선은 흰색으로 보이고요.”

“그거랑 무슨 상관이야?”


“아저씨랑 저랑 도로색을 보는 거에도 차이가 있어요. 세상 모든 인간들이 다 그렇게 생각한다고 확신할 수 있어요?

그리고 설령 쓰레기라 해도 검은 도로 위 작은 노란선처럼 작은 장점도 있을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말문이 막혔다. 내가 그 긴 시간 동안 생각지도 못한 것을 이 과자봉지는 알고 있었다. 생각은 무거웠지만 몸뚱아리는 너무나도 가벼웠던 과자봉지는, 바람에 날렸는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매거진의 이전글 껌종이의 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