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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heera Aug 22. 2019

12 : 불안의 색

연애 에세이 : 불안의 모든 종류는 비슷할거라고 생각했다.

너의 색이 번지고 물들어


12. 불안의 색    

연애 에세이 : 불안의 모든 종류는 비슷할거라고 생각했다.



           

 덜컹거리는 지하철. 멈춰 선 지하철 유리창 너머로 적힌 ‘죽전’ 이란 글씨를 바라본다. 보던 책을 접고, 반지 낀 손을 주머니에 넣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손가락이 글자를 쓴다. ‘나, 죽전역이야’ 보내진 문자. 1분 남짓. ‘지금, 나가.’하고 답변이 왔다.     

 

 먹색. 나에게 불안은 까만색도 회색도 아닌 먹색이었다. 투두둑 하고 금 새 빗방울을 떨어트릴 먹구름 같다고 생각했다. 살아감에 불안하고, 비교함에 불안하고, 걱정함에 불안하고, 두려움에 불안하고, 알 수 없는 미래에 불안했다. 사람이라면 느낄 수 있는 불안의 모든 종류는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다. 일이든 연애든. 불안이 최고조였을 때가 회사 다닐 때였다. 직장인이 되고 싶지 않았지만, 부모님의 권유대로 한 번쯤이야 하고 우연한 기회로 편집샵 온라인 엠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쇼핑몰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봤던 경력이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회사 자체는 나름 규모가 있는 회사였지만 내가 배정된 팀은 온라인이란 영역을 위해 처음 꾸려 나가기 시작한 팀이었다. 처음엔 나의 직책이 엠디인 줄도 몰랐고, 그저 추천으로 온라인 관련 일을 한다는 말만 듣고 들어갔다. 팀의 정체성이 오리무중이었다. 모든 잡다한 일은 다 해야 했고 나는 중간에 굴러들어온 돌덩이 같았다. 거기다 갓 들어온 내가 배우기엔 경력이 어린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나보다 나이도 적었다. 그게 문제 되진 않았지만, 초짜들이 모여 힘겹게 버텨가는 팀 같았다. 야근은 필수였으며 여유시간은 주말에나 가능했다. 아르바이트할 때 보다 돈은 두둑했다. 엄청 많이 버는 것은 아니었어도 지갑에 돈이 쌓이니 하고 싶은 걸 더 많이 할 수 있었다. 그래 봐야, 쇼핑하고, 먹고, 놀고, 외모 가꾸는 거였다. 돈 쓰는 즐거움에 힘든 마음도 잊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얼마 가지 못했다. 겉을 위한 돈을 쓰니 허무함만 쌓여갔다. 마음이 여러 번 바뀌었다. 그만둘까. 말까.     


 무겁게 짓눌렸던 저녁, 집에 도착해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푹’하고 걸터앉았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한참을 쳐다보니 동그란 형광등 불 모양이 흔들렸다. 고개를 흔들어 벽을 따라 내리니 거울이 보였다. 침대에서 일어나 거울 앞으로 가 섰다. 비춰 진 너를 보며 물었다. ‘오늘이 네 생의 마지막 날이야, 너 회사 갈래?’ 대답은 바로 나왔다. ‘아니’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날 점심에 팀장을 불러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한 달 뒤, 퇴사했다. 아쉬움은 남아도 후회 없이 살고 싶었다. 돈은 좀 덜 벌더라도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었다. 한결 가벼워진 몸을 편안하게 놓아두고 생각했다. 가슴속에 숨겨두었던 미술을 이용해 돈을 벌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아동 미술학원에 지원서를 넣는 것부터 시작했다. 좋아하는 걸 시작하니 불안도 한걸음 물러났다. 하지만 줄어들었을 뿐, 색깔은 계속 먹색이었다. 대학교 때부터 한 번도 쉬지 않고 일한 탓일까. 얼마간 일을 안 했더니 다시 불안이 꾸물꾸물 거렸다.     


 “넌 그거 모를 거야, 내가 널 데리러 갈 때 어떤 마음인지.”     


 신혼집은 지하철역에서 걸어서 15분 정도의 거리. 천천히 걸으면 20분. 차 없는 내가 일을 마치고 늦은 밤에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면 그는 집에서 기다리다 나를 항상 역으로 데리러 왔다. 


 “어떤 마음인데?”


 가끔 엉뚱한 말을 내뱉는 그.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물었다.


 “빼앗긴 너를 되찾아 오는 느낌.”

 “내가 누구한테 빼앗기겠어. 유부녀인데.”

 “사회한테.”


 그 말에 연애 때 통화하다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나에게 불안한 마음을 보여줬었다. 아마 내가 그와 함께 뛰다 지쳤을 때, 그가 뒤돌아보았을 때, 나의 잔상이 보이지 않았을 때, 그때였던 것 같다.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모래 한 줌을 쥐고 있는데,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 같아.”     


 순간, 나도 모르게 마음이 몽글몽글 해지는 느낌을 받았었다. 그가 나를 그만큼 좋아한다는 의미였으니까. 입가에 소소한 미소가 올라왔다. 지금까지 어떤 연인을 만났어도 불안을 꺼내어 내비치는 사람은 없었다. 나 또한 숨겼던 불안을 그는 스스럼없이 말했다.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그리고 알게되었다. 불안의 색깔이 먹색만은 아니라는 걸. 어디에 스미냐에 따라 색이 달라진다는 걸. 그의 그 불안은 물기에 촉촉해진 맑은 분홍색을 띠었다.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은 행운이다. 여태 내가 느낀 불안의 종류는 어두운 것들이었다. 사랑이든, 일이든 비교해야 하고, 지쳐야 하고, 걱정해야 하고, 두려워해야 하는. 그런데 그가 풍긴 불안은 비교하지도, 지치지도, 걱정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 불안이었다. 아, 웃을 수도 있구나. 옅은 분홍색이 입가로 퍼져나갔고 핸드폰을 귀에 바짝 대고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그 불안, 또 듣고 싶었다.          





<너의 색이 번지고 물들어> 출간된 에세이 책을 바탕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사랑이라는 커다란 주제를 토대로 자아와 인생의 성찰을 보여주는 인문학적인 사랑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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