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회사 선후배들과 저녁식사 겸 반주를 한 적이 있었다. 어쩌다 보니 그중에 미혼은 나를 포함해 고작 세명이었는데, 모두가 자리를 조금씩 바꿔 앉으며 즐기다 보니 어느새 그 미혼 셋이 한 테이블에 모여 앉게 되었다. 그러자 셋 중에 최연장자 선배는 나를 포함한 나머지 둘에게 이런저런 얘기들을 하기 시작했다.
"너네는 뭐 하냐~ 나처럼 되기 전에 얼른 연애하고 결혼해. 시간이 아깝다 아까워. 내가 니들이었으면 엄청 연애하고 바로 결혼한다."
그러자 그 얘기를 듣던 다른 미혼 선배가 말을 꺼냈다.
"저는 이제 별로 생각 없습니다."
"왜?"
"최근에 좀 현타가 와서요."
그리고 그 선배는 최근에 현타가 온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미 한 번 다른 자리에서 들었던 얘기라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대강 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얘기하던 선배가 마지막에 나지막이 한마디 했다.
"지난 10년간 대체 뭐 한 건가 싶어요. 그냥 앞으로는 일 열심히 안 하고 그냥저냥 살려고요."
그리고 그 얘기를 들은 나는 그 선배가 어떤 생각을 했었을지, 그리고 어떤 마음을 가지고 그런 얘기를 했는지 백분 이해할 수 있었다. 너무 잘 이해가 된 나머지 내 가슴마저 먹먹해졌고, 그러다 보니 차마 아무 위로도 할 수 없었다. 내가 그 선배였어도 그 어떤 위로의 말도 도움이 되진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 얘기를 옆에서 들은 사람들은 선배의 그런 얘기를 그저 흘려들을 뿐이었다. 늘 그렇듯 일단 차를 사보라는 조언이 튀어나왔다. 일단은 차가 생기면 여자친구도 생길 거라고. 한동안 계속 얘기를 듣고 있던 나는 울컥해서 그들에게 말했다.
"아니, 자기가 사는 거 아니라고 너무 쉽게 던지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그 말 듣고 차를 샀는데 여자친구도 안 생기면 어쩌려고요?"
"차라도 남잖아?"
"그런 무책임한 말들이 어디 있어요. 당사자는 심각한데. 명절만 되면 집안 어르신들이 결혼하라고 보채는 거랑 다를게 뭡니까. 걱정하는 듯 하지만 막상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도와달라고 하면 입 싹 닫는. 걱정하는 척 하지만 실제로는 아니잖아요."
"에이, 다 웃자고 하는 소리지. 뭘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여."
그렇게 대화는 마무리되었지만, 결국 나는 이번에도 진지하기만 하고 유머감각이라곤 없는 그런 놈이 되었다는 생각에 순간 자괴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곧 다시 화가 났다. 저 선배는 정말 얼마 전 그 일로 마음의 상처를 크게 입었고 그래서 심각하게 얘기한 건데 그런 걸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 소재로 삼아 재미를 추구한다는 건 너무 무신경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쨌든 그 자리에서 더 내색을 하지는 않고, 2차 장소로 자리를 옮길 때 나는 따로 빠져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얼마 전, 압구정에서 겪었던 일들이 생각이 났다.
얼마 전, 친구들과 함께 압구정에 술을 마시러 갔다. 한창 술을 마시던 도중에 옆테이블에 여성분들이 몇 분 들어와 술을 마셨다. 그걸 본 친구는 "야, 가서 말 걸어봐. 저기 저쪽 사람 네 타입 같은데."라며 나를 떠밀었다. 나는 한사코 거부하며 "얌전히 술이나 마셔라,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라고 했으나, 친구는 멈추지 않았다. "너 쳐다보는 것 같은데?", "꽤 괜찮을 것 같아", "너랑 잘 맞을 것 같은데?"라고 끊임없이 내 옆에서 떠들었다. 다른 친구들도 이 친구를 말리기는커녕 이 상황을 재밌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참다못한 내가 말했다.
"좀, 조용히 하고 먹어라. 그리고 말을 할 거면 조용히 말하기라도 하던가. 저 사람들이 다 듣겠어. 뭐 하는 짓이야?"
그제야 그 친구는 조용해졌고, 그렇게 1차는 마무리가 되었다. 때마침 그날은 유부남 친구들이 다들 집에서 허락을 받고 온 날이었기 때문에 2차, 3차까지 술자리는 계속되었는데, 3차쯤에 또다시 사건이 발생했다. 3차는 밴드가 공연을 하는 술집이어서 다 같이 몸을 흔들며 한창 신나게 술을 마시는 분위기였고, 그만큼 내부가 꽤나 시끄러웠다. 그래서인지 술이 너무 많이 취한 아까 그 친구가 화장실을 다녀와서는 나에게 엄청 큰 소리로 말했다.
"야!! 옆에 여자가 너 쳐다보는 것 같은데!! 같이 놀자고 해봐!!"
나는 화들짝 놀라서 옆을 쳐다보았고, 친구가 말한 그 여자분도 놀라서 우리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나도 친구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제발!! 좀!! 닥쳐!!"
하지만 친구는 끊임없이 나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빨리 말 걸라고!!"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좀 조용히 하라고!!"
그렇게 한 10여분을 친구와 실랑이를 벌였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친구를 끌고 술집에서 나와 택시를 태워 보냈다. 그렇게 그날은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며칠 뒤, 그 친구에게 카톡이 왔다.
'야, 다음번부터는 쪽지에 인스타 주소를 써서 쓱 들이밀어보던가, 아니면 니 책 들고 가서 책 홍보하러 왔다면서 말 걸어보자 ㅋㅋㅋㅋㅋ'
그 카톡을 본 나는 화가 났다. 요즘 내가 이성문제로 많은 고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친구에게 내 고민거리는 그저 한때 재미를 위한 콘텐츠로만 보이는 듯했다. 너무 과민 반응이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어쨌든 기분이 매우 나빠져서 친구에게 말했다.
'너, 나 놀리는 것 같으니까 그만해라.'
앞선 선후배들과의 술자리에서도 그렇고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도 그렇고 사람들은 참 너무 무신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작 상대는 많은 고민과 걱정을 가지고 있을 텐데 그걸 술자리 안줏거리로 허비해 버린다는 것이 그 상대에게 얼마나 상처가 될지는 전혀 생각을 해보지 않았겠지 싶었다. 심지어는 그게 그들 나름의 위로라고 반박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너무 진지하고 심각하게 있으면 걱정만 늘 뿐이니까 그냥 웃으면서 털어버리는 게 낫다고.
하지만 나는 저 얘기는 반만 맞다고 생각한다. 분명 웃으면서 털어버리는 것도 위로의 방법이 될 수 있겠지만, 그건 그나마 문제가 가벼울 때 얘기니까. 상대의 굉장히 진지하고 심각한 고민과 걱정을 웃음으로 소비해 버리면 그건 그냥 상대에 대한 존중이 없는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상대의 삶에
작지만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켜줄 수 있어야
진짜 위로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상대의 따뜻한 말 한마디로도 변화가 일어날 수 있고, 또 누구는 작은 선물로 변화가 일어날 수도, 또 누구는 같이 산책하며 고민을 들어주는 걸로, 혹은 이런저런 취미를 같이 해보는 것으로도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가장 좋은 건 상대의 걱정과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겠지만, 그게 쉽지는 않을 테니.
그래서 나도 요새는 상대가 걱정이나 고민을 말하면 어쭙잖은 위로를 건네기보다는 어떤 방식의 위로가 상대에게 진짜 도움이 될지를 생각하곤 한다. 단지 그 사람의 아픔을 공감하며 말로 위로를 건네면 되는 것인지, 그냥 그 고민을 별거 아닌 걸로 치부하며 같이 웃고 떠들면서 날려버리면 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많은 도움이 필요한 것인지 등.
그럼 아마 나는 지금보다 훨씬 재미없는 인간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은 든다. 안 그래도 늘 인생을 너무 진지하게 산다는 소리를 들어왔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 고민이나 걱정을 털어놓는 사람에게는 재밌는 사람보다 따뜻한 사람이 되길 바랄 뿐이다.
덧) 회사생활에 현타가 온 선배가 한때 클라이밍 동호회를 했던 것을 알고 있었기에, 주말에 같이 클라이밍을 가자고 제안했다. 같은 고민을 안고 있는 다른 선배까지 불러서 셋이서 가기로 했다. 같이 재밌게 운동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좋은 시간을 보내고 모두에게 조금은 즐거운 주말이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