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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호 Feb 02. 2024

제1관 보험의 목적

  그곳은 눈이 아플 정도로 새하얀 바닥이 끝없이 이어져있었다. 왼쪽, 오른쪽, 앞쪽, 뒤쪽을 쳐다봐도 끝없이 이어져있었다. 하늘은 그저 하얀빛으로만 가득했다. 사방이 새하얀 방을 무한으로 넓히면 아마 그런 모습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오로지 하얀색으로만 가득한 곳이었다.

  그 끝없는 공간 어느 곳에 한 사람이 서있었다. 정확히는 '사람'의 형상을 한 다른 '무언가'였다. 새까만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었고, 얼굴은 갸름하고 창백했다. 옅은 쌍꺼풀이 있는 눈은 약간 졸린 듯이 게슴츠레하게 떠져있었고, 오뚝한 코와 작은 입술은 그야말로 조각 같은 얼굴의 표본이라 할 수 있었다. 그 '무언가'는 하얀색 바탕에 초록색 야자나무가 그려진 하와이안 반팔 셔츠를 입고 있었고, 아래에는 옅은 색의 착 달라붙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으며,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디자인의 하얀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가녀린 모습이긴 했으나, 그렇다고 여자라 보기에는 너무 다부졌고, 남자라 보기에는 너무 가늘었다.

  새하얀 공간에 오도카니 서있는 그 '무언가'의 앞에는 지름이 120cm 정도 되는 파란 구체가 떠있었다. 파란 구체의 위에는 갈색과 초록색으로 기하학적인 모양이 얼룩덜룩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 모양들은 지구의 대륙들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 '무언가' 앞에 떠있는 구체는 바로 지구 그 자체를 작게 축소시켜 놓은 모양이었다.

  '무언가'는 그저 가만히 서서 지구를 축소한 구체를 지그시 쳐다보고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인지, 그리고 대체 언제까지 쳐다볼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시간 동안 계속해서 구체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가 작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3호."

  그러자 '무언가'의 왼쪽 편에 노란빛의 작은 구체가 나타났다. 빛이 너무 밝은 나머지 그 구체의 표면을 확인할 수 없을 정도였다. 흡사 그 모습은 전구를 눈이 멀기 직전까지 밝게 키운듯한 모습이었다.

  "얘기 좀 하자."

  '무언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작은 구체의 빛은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급속도로 밝기가 어두워졌으나, 일정 수준이상으로 밝기가 떨어지자, 점점 어두워지는 속도가 줄어들었다. 밝기가 우리가 아는 전구 정도의 밝기로 줄어들었을 무렵, 구체의 모양이 변하기 시작했다. 다섯 방향으로 작은 돌기들이 생겼고, 그 돌기들 중 위의 돌기는 점점 크게 부풀었으며 나머지 돌기들은 각자 다른 방향으로 길어졌고, 원래의 구체도 원통형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구체는 점점 사람의 형상으로 변해갔다.

  어느덧 사람의 모양을 한 구체의 빛이 급속도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빛이 사라지는 것과 비례해서 사람형상은 더욱 선명해져만 갔다.

  잠시 후, 빛은 완전히 사라졌고, 구체는 어느덧 온전한 사람의 형상으로 변해있었다. 적당히 긴 갈색 머리는 이마를 덮고 있었고, 옆으로 길고 위아래로는 짧은 가느다란 눈을 가지고 있었다. 오각형을 거꾸로 돌려놓은 듯 각진 얼굴형을 가지고 있었고, 검붉은 입술은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옷깃을 세운 검은 블레이저의 안에는 목이 V자로 파인 하얀 티셔츠를 입고 있었으며, 블레이저와 같은 색상의 바지를 입고 갈색 로퍼를 신고 있었다.

  그 사람형상의 구체가 입을 열었다.

  "무슨 얘기요?"

  '무언가'는 지구 모양의 구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3호야. 네가 보기엔 이 지구라는 행성이 어떤 것 같니?"

  3호는 미소를 거둬들이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지구 모양의 구체를 쳐다보기는커녕, '무언가'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아무런 관심이 없는 얼굴을 하고는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죠?"

  "내가 지구를 엄청 공들여서 키웠잖아. 알지?"

  '무언가'의 말에 3호는 기계적으로 대꾸했다.

  "네, 잘 알죠. 심심하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행성들 중에 하나를 찍어서, 공룡인지 뭔지 하는 걸 만들어놓고는 변화가 없어 지루하다며 운석으로 깡그리 날려버리고, 인간인지 뭔지를 만들었다가, 너무 평화로운 애들이라 재미없다며 다른 종류의 인간을 만들어서 멸종시켜 버리고, 그렇게 번성한 인간들을 심심할 때마다 재해다 질병이다 뿌려대면서 괴롭혀댔으니, 아주 공들여서 키우시긴 했네요."

  3호의 비꼬는 말에도 '무언가'는 계속해서 지구 모양의 구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너는 애가 말만 하면 나한테 대들더라."

  "그렇다고 내가 대들면 언제는 내 말을 들었습니까? 대체 이번에는 무슨 변덕을 부리려고요?"

  그제야 '무언가'는 지구 모양의 구체에서 시선을 떼서 3호를 똑바로 쳐다봤다. '무언가'는 오른팔로 지구 모양의 구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공들여 키운 것까지는 좋았는데,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인간들이 너무 많아졌단 말이지. 내가 생각한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말이야."

  "생각하신건 어떤 거였는데요?"

  '무언가'는 '짝'소리가 나게 박수를 한 번 치며 환한 미소를 띠고는 말했다.

  "파란색과 초록색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려고 했지. 그리고 그 안에 인간들이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그 정원을 조금씩 바꿔나가고 자기들끼리 사건, 사고도 일으키면서 계속해서 변화하는, 보기만 해도 심심하지 않은 정원으로 말이야."

  "근데요?"

  여전히 3호는 가만히 선 상태로 관심이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무언가'를 쳐다보았다. 흥미가 없다 못해, 조금만 힘을 풀면 눈에서 초점마저 사라질 것처럼 보였다.

  "근데, 인간이 너무 많아졌단 말이야. 심지어는 골고루 퍼지지도 않고 편향되어서, 어디에는 바글바글 하고 어디에는 너무 없고."

  '무언가'는 한숨을 쉬며 왼손을 오른팔 팔꿈치에 대고, 오른손으로는 입을 가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다 보니까, 저 지구라는 정원이, 이제는 그다지 이쁘지도 않고 망가질 것만 같단 말이지."

  "그럼 부수고 새로 만들면 되잖아요. 겨우 그런 일로 나를 부른 겁니까?"

  '무언가'는 미간을 한껏 찌푸리며 3호를 쳐다보았다.

  "너는 내가 만들었지만 참 까칠하단 말이야. 어쩌다 내가 이런 애를 만들었을까?"

  "그럼 저도 없애버리시던가요. 당신은 그야말로 '전지전능'한 신 아닙니까."

  3호의 말에 신은 정신을 차리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아니~ 3호야. 너는 어째 성격이 늘 그 모양이냐. 진짜. 내가 만들 때 뭐 잘못했나?"

  신의 말에 3호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비아냥댔다.

  "'전지전능'한 신도 그런 실수를 하나 봅니다."

  신은 3호의 말에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됐고. 어쨌든 내가 지금 모습의 지구를 만들기까지 엄청 고생했는데, 저걸 그냥 부수기는 아깝다고. 알겠어? 최대한 부수지 않고 어떻게든 잘 가꿔서 계속 키우고 싶다고."

  "겨우 그런 넋두리나 하려고 절 부른 겁니까?"

  "말 좀 끝까지 들어라 진짜. 성질머리 더럽게 급하네."

  신은 목청을 가다듬고 말했다.

  "어쨌든 지금의 지구가 엉망이 된 건 아마도 인간이 내 생각보다 터무니없이 많이 불어나서 그런 것 같단 말이지. 그래서 일단은 인간의 숫자를 좀 줄여서 다시 조정해 보려고."

  신의 말에 3호가 입을 열려는 찰나, 신이 3호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 말했다.

  "너 또 그냥 다 쓸어버리라고 할라 그랬지? 그러긴 싫다고 짜샤. 굉장히 자연스럽게 조금씩 인간의 숫자를 줄여서 세밀하게 조정하고 싶단 말이다. 그래서 널 부른 거고. 너 이런 거 잘하잖아. 뭐 좋은 방법이 있을지 생각이나 좀 해봐."

  신이 손을 떼자 3호는 코로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그런 건, 1호 누나나, 2호 형에게 물어보지 왜 굳이 저에게 물어보십니까?"

  "걔네는 좀 고지식한 면이 있잖아. 이런 거는 매사에 반항적인 니가 더 잘할 것 같은데. 어때? 뭐 좀 떠오르는 거 있어?"

  3호는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신은 그런 3호를 초조하게 쳐다보며, 3호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3호의 입이 삐쭉거리는 것을 보며 신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뭐 생각이 났나 봐?"

  3호는 인상을 구기며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굉장히 성가신 방법이라 그다지 말하고 싶진 않네요."

  "누구에게 성가신 거야? 너? 나?"

  "아뇨. 우리 모두요."

  그러자 신은 개구쟁이처럼 이빨을 드러내 웃으며 말했다.

  "뭔지 모르지만 재밌겠는데. 빨리 말해봐."

  3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보험이라고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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