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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호 Feb 09. 2024

제2관 인생보험 - 4

  그날도 상현의 아버지는 힘든 몸을 이끌고 공사장으로 나갔다. 몸이 쑤시기도 했지만, 피로도 누적된 상태라 의사가 봤다면 당장에 쉬라고 했을 몸상태였다. 그럼에도 일을 쉴 수는 없었기에 지친 몸을 이끌고 돈을 벌러 갔다. 어차피 주말에는 쉴 예정이었으니 주말에 몰아서 푹 쉴 작정이었다. 

  그렇게 억지로 출근을 해서 오전 내내 일을 하고 점심식사를 한 후의 일이었다. 상현의 아버지는 자기가 일하고 있던 15층으로 가기 위해 건설용 리프트에 탑승했다. 점심을 먹고 낮잠을 좀 잤음에도 도통 피로가 풀리지 않았기에 리프트 문에 기댄 상태로 눈을 슬며시 감고 쪽잠을 청하며 위로 올라갔다. 15층에 도착해서 리프트의 문이 열리자 몽롱한 상태로 리프트 문을 열었다. 안전 발판을 내리고 건물로 건너가야 했으나, 너무 몽롱한 나머지 무심코 그냥 건너가려다 안전 발판에 걸려 넘어졌다. 그리곤 넘어짐과 동시에 왼쪽 다리가 리프트와 건물의 틈 사이에 빠져버렸다. 상현의 아버지는 한사코 다리를 빼려 했으나 혼자의 힘으로는 다리를 뺄 수 없었다. 근처에 누구라도 있으면 도와줄 수 있었겠지만, 운이 없게도 그 층에는 상현의 아버지 혼자 뿐이었다. 비명소리를 들은 동료들이 다급하게 계단으로 올라가고는 있었지만 4개 층 아래서 올라오느라 약간은 시간이 걸렸다. 불행히도 그사이 1층에선 사람들이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기 위해 리프트를 호출했다. 그렇게 리프트는 아래로 내려가며 끼인 다리를 꺾어버렸다. 

 

  상현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상현의 아버지는 이미 긴급수술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2시간여를 기다린 끝에 수술은 무사히 끝났으나, 왼쪽다리는 완전히 절단되어 다시 붙일 수 없었다고 했다. 그렇게 상현의 아버지는 영원히 왼쪽 다리를 잃고 장애인이 되었다. 

  수술 후 마취에서 깬 아버지는 정신이 없는 그 와중에도 당신의 병원비와 일을 쉬게 되어 수입이 없어진 것을 걱정했다. 상현은 그런 아버지를 달래며, 자신이 모아놓은 돈이 있으니 걱정 말고 몸조리에 신경 쓰시라 말했다.

  수술 다음날 선영이 병문안을 왔고, 상현은 선영을 아버지께 인사시키고는 같이 엘리베이터 앞 휴게실로 가서 얘기를 나눴다. 선영은 상현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한편,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도 물었다. 상현은 일단은 인턴 원서 제출을 멈추고 방학 동안에는 아버지 병간호에 전념하겠다 말했다. 상현에게 매우 중요한 시기임에도 별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어 보였다. 선영은 그런 상현이 안타까워 최대한 돕겠다 말했다. 상현은 그런 선영이 너무나도 고마웠지만,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과 죄책감이 많이 커졌다. 분명 같이 행복해지자고 말했음에도, 자신이 자꾸 선영의 행복을 망치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렇게 상현의 마지막 여름 방학은 병원에서 보내게 되었다. 아버지는 나이가 있어서인지 회복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했던 것보다 일주일은 더 병원에서 보내야만 했다. 상현은 그 기간 동안 잠깐 갈아입을 옷을 가지러 집에 가는 것 외에는 아버지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의 병시중을 들어야만 했다. 간병인은 너무 비쌌기에, 몇 년간 계속해오던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24시간 내내 병원에만 있었다. 잠도 병원에서 잤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난 후에야 겨우 퇴원이 가능했다. 하지만 퇴원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목발을 짚고 다녀야만 했다. 복지센터에서 휠체어를 빌려오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휠체어를 활용하기는 쉽지가 않았다. 아무래도 휠체어를 타면 당장 집 앞에만 나가도 이동에 많은 제약이 발생했다. 그래서 결국에는 의족을 구해 달아야 했지만, 그마저도 주문제작 비용이 만만치 않았기에 결국은 퇴원할 때 지급받은 목발을 계속 쓸 수밖에 없었다. 

  당면한 문제는 생활비였다. 상현이 모아놓은 돈이 적지는 않았지만 결코 많지도 않았다. 아무리 의료보험이 잘 되어있다고 한들, 큰 수술을 치른 데다가 한 달이나 입원을 했기 때문에 병원비가 적지 않게 나왔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통해 모은 돈으로는 병원비를 지불하고 나면 두 명이서 고작 두 달 정도만 살 수 있을 뿐이었다.  더군다나 이제 아버지는 다리가 성치 않기 때문에 전처럼 공사장에 나갈 수도 없게 되었다. 무언가 일을 하기는 해야 한다며 이곳저곳 전화를 돌리며 일자리를 구하기는 했지만, 잘 구해지지도 않았고, 만약 구하게 되더라도 벌이가 엄청 적을 것임은 분명해 보였다. 그래서 상현은 언젠가 인터넷에서 본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간다.'라는 말을 떠올리며 어떻게든 방안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방학이 끝날 무렵 상현은 학교에 나가는 시간을 주 3일로 제한했다. 그것도 월화수로만. 덕분에 하루평균 7시간 연강을 들어야만 했지만, 목금토일 4일을 일하기 위해선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목요일과 금요일 새벽에는 편의점을 나가고 오후에는 학원 보조강사 일을 했다. 저녁에는 대리기사를 뛰며 돈을 벌었다. 주말에는 출장뷔페 알바를 12시간씩 했다. 그렇게 목금토일을 다 돌고 나면 월요일에는 파김치가 되어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선영에게는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양해를 구하고 데이트는 학교에서 점심을 같이 먹는 것으로 대체했다. 이마저도 여의치 않을 때는 그냥 전화 통화만 잠깐 하는 게 다인 날도 있었다. 

  상현의 아버지는 끝끝내 일을 구하지 못해, 폐지를 주우러 다니기 시작했다. 폐지를 줍는데 방해된다며 목발보다는 바퀴가 달린 앉은뱅이 의자를 애용했다. 처음에는 폐지를 줍는 다른 분들과 갈등이 생기기도 했지만, 사정을 설명하면 이내 갈등은 풀리고 오히려 도움을 주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덕분에 폐지를 줍는 게 원활해지기는 했지만 바퀴 달린 의자로 리어카를 밀고 다니기에는 한계가 있어서 하루종일 돌더라도 많은 양을 모을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기어코 살림에 보탬이 되고자 구태여 매일매일 폐지를 주우러 나갔다.

  상현은 그런 아버지를 보며 어떻게든 빨리 취업을 해서 돈을 벌고 싶었다. 그래도 지금처럼 아르바이트를 통해 생계를 유지하기보다는 어떻게든 취업을 하고 남는 시간에 대리를 뛰는 게 좀 더 벌이도 괜찮을 듯 보였다. 그래서 어떻게든 한 번에 취업을 하고 싶은 마음에 사십여 곳에 지원 원서를 제출했다. 어디든 한 곳 정도는 제발 붙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그렇게 학교도 다니면서 일도 나가면서 면접도 보는 생활이 시작됐다. 어쩌다가 서류에 합격한 회사에서 면접이라도 잡히면 어떻게든 일하는 날을 피해서 면접이 잡히길 기도해야만 했다. 일을 빼기는 어렵지만, 학교 수업은 면접을 다녀왔다는 증빙만 제출하면 어떻게든 감안이 되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이 목요일이나 금요일에 면접이 잡히면 아쉬운 대로 편의점은 선영에게 부탁하고선 다급하게 면접을 다녀왔다. 이마저도 선영에게 미안했지만 그래도 일단은 취업해서 다 갚겠다는 생각으로 부탁했다. 그렇게 상현은 사십여 곳 중에 여섯 곳에서 면접을 볼 수 있었고, 최종적으로는 한 곳에 합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선영은 그런 상현을 말렸다. 상현이 합격한 곳은 중견 기업 중에서도 규모가 작은 편에 속한 중견 기업이었기 때문이었다. 선영의 생각에 상현은 얼마든지 더 괜찮은 곳에 취업이 가능해 보였고, 그 회사는 상현이 가기에는 연봉도 적은 데다가 좋지 않은 소문이 많은 회사였다. 하지만 상현은 그렇다고 해서 취업을 더 미룰 수는 없었다. 집에 계신 아버지를 생각해서라도 하루빨리 취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더해 반년을 미룬 뒤 상반기에 취업을 도모하더라도 상반기는 하반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사람들을 뽑았기 때문에, 그때도 취업이 된다는 보장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상현은 선영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덜컥 그 회사에 입사를 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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