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현이 입사한 곳은 그리 크지 않은 무역회사였다. 그래도 어느 정도 규모가 있기는 해서 여러 가지 업무들이 있었고, 그중에서도 상현은 재무업무를 맡게 되었다. 하지만 말이 좋아 재무업무지, 어지간한 잡일은 다 해내야 하는 곳이었다. 덕분에 들어온 첫 일주일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제때 퇴근할 수 없었다. 야근은 기본이거니와 회식도 꽤나 잦은 곳이었다. 명백하게 몸이 좋지 않아 보이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회식에 참석하지 않으려 하면 은근한 눈치를 받았다. 그럼에도 상현은 아르바이트를 할 때에 비하면 꽤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힘든 줄도 모르고 열심히 일했다. 선영과 만나는 횟수는 급속도로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얼른 자리를 잡아서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에 더더욱 열심히 일했다. 입사 초반에는 주말에 만나서 밀린 회포를 풀었지만, 매달 말과 매달 초에는 주말에도 출근해야만 했기에, 선영과는 매일 저녁에 통화하는 것으로 아쉬운 마음을 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상현의 아버지가 부쩍 살이 빠지기 시작했다. 상현은 나이가 들어 그런 것이라 생각해 최대한 영양가 높은 음식들로 식사를 차렸다. 하지만 아버지는 전에 비해 더욱 피로감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이전에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셨기에, 상현은 피곤하다는 아버지를 일으켜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그렇게 병원에서 이것저것 검사를 한 뒤 나온 진단은 당뇨였다.
모를 때야 그렇다 치지만 아버지가 당뇨에 걸렸다는 걸 알게 된 상현은, 아버지에게 폐지를 주으러 다니는 건 그만하시라 말씀드렸다. 혹여 상처라도 생기면 낫기도 힘들고, 그러다가 쓰러지면 큰일이 날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하지만 상현의 아버지는 약값이라도 벌어야 하고, 집안에만 있으면 사람이 더 병들 것이며, 집안에 있다가 쓰러지는 게 더 위험할 거라는 이유를 들어 그만두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상현은 아쉬운 대로 아버지께 스마트 워치를 채워드리고는 자나 깨나 씻을 때를 제외하고는 몸에서 절대로 떼지 마시라 당부드렸다.
회사에서는 그즈음 무렵 상현을 보살펴주는 친한 선배가 생겼다. 부서에서는 좋지 않은 소문이 도는 선배였지만, 그럼에도 상현에게는 안부도 물어봐주고 가끔은 힘내라며 커피도 사주는 좋은 선배였다. 그래서인지 상현은 그 선배에게 많은 고마움을 느꼈다.
그래서 상현은 그 선배에게 이것저것 많은 것들을 물어보기도 하고 고민 상담도 많이 하곤 했다. 특히나 아버지가 당뇨에까지 걸리셨을 때는 담배를 피우지 않음에도 굳이 담배를 피우러 가는 선배를 따라 흡연장으로 가 이것저것 넋두리를 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나 싶더라고요. 약값도 더 벌어야 할 텐데 말이죠. 아직 그 정도까진 아니라는데, 인슐린을 주사하셔야 되면 그것도 일이잖아요."
선배는 담배를 내뿜으며 말했다.
"네가 아버지까지 보살피기엔 우리 회사 월급으로는 적지 않아? 시간도 없고."
"…"
"다른데 신입으로 들어가거나 이직하는 건 어때? 네 스펙정도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낫겠죠?"
"그렇지. 근데 회사일 하면서 준비할 수 있겠어?"
상현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바빠서 힘들겠지만 어쩔 수 없죠. 지금 일을 그만둘 수는 없으니까요. 제가 일을 그만두면 당장 저도 아버지도 굶어야 하는걸요."
선배는 상현의 어깨를 두드리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날 상현이 출근했을 때, 사무실 분위기가 많이 이상했다. 왠지 모르게 사람들이 상현을 보고 수군거리는 것만 같았다. 상현은 기분 탓이려니 하고 자기 할 일에 전념했다. 하지만 그날따라 부장이 몇 번이나 상현을 불러 혼내었고 그 강도도 예전보다는 강했다. 원래도 폭언을 일삼은 사람이었지만, 인신공격까지도 스스럼없이 했다.
"그딴 대가리를 가지고 뭘 하겠다는 거야? 어? 대가리는 장식이야?"
"죄송합니다."
"어디서 이런 꼴통새끼가 굴러들어 와 가지고… 빨리 다시 해와!"
고개를 숙여 부장에게 목례를 하고 돌아서는 상현의 뒤로 부장의 혼잣말이 들렸다.
"건방진 새끼. 지가 스펙이 좋으면 뭐 얼마나 좋다고…"
부장의 말을 듣는 순간 상현은 전날 선배와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분명 누군가 부장에게 선배와 상현의 대화를 일러바친 게 틀림없었다. 일단은 당장 떨어진 일이 있으니 일부터 쳐내고선 어떻게 된 일인지 자초지종을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부장은 상현이 조금도 쉴 수 없을 정도로 계속해서 일을 주었고, 상현이 부장이 시킨 일을 다 마무리했을 때는 이미 저녁 8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드디어 상현이 일을 다 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날 무렵, 대각선 자리의 별로 친하지 않은 선배가 상현을 불렀다.
"상현 씨, 대체 무슨 말을 한 거야?"
"무슨 말씀이시죠?"
상현은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물었다.
"상현 씨 스펙에 비하면 우리 회사는 수준이 낮아서 옮겨야겠다고 했다며?"
"제가요? 전 그렇게 말한 적 없어요!"
그러자 선배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상현 씨 어제 박대리랑 무슨 얘기했어?"
"네?"
"딱 봐도 알겠네. 상현 씨 요새 박대리랑 친하게 지냈잖아. 박대리한테 뭔 말을 했구나?"
"그걸 어떻게 아세요?"
선배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박대리 별명이 뭔 줄 알아? 박살대리야. 회사생활 박살 내놓는다고 해서 박살대리. 뭐 하나 꼬투리 잡을 것만 있으면 그걸 크게 부풀리고 왜곡해서 윗사람들 귀에 들어가게 만든 다음 회사생활 꼬이게 만들거든. 그렇게 내쫓은 신입만 몇 명인지 어휴. 그래서 다들 박대리랑 멀리 지내잖아. 상현 씨 처음에 왔을 때 얘기 못 들었어?"
상현은 당황하며 말했다.
"저는 그냥 박대리님이랑 친하게는 지내지 말아라 라는 정도로만 들었어요…. 그럴 줄은 전혀 몰랐고요."
"으이그…. 큰일이다 큰일이야. 저 꼰대 부장 놈은 박대리 말이라면 껌뻑죽는데, 그런 박대리가 그렇게 말했으니 이제 와서 상현 씨가 아니라고 해도 믿지도 않을 텐데. 심지어 상현 씨 스펙이 좋은 건 사실이잖아. 나도 상현씨정도면 더 좋은 데 갈 수 있는데 왜 우리 회사를 왔나 싶었으니까."
"그럼 어떡해야 하죠?"
"어떡하긴 뭘 어떡해. 방법이 없지. 부장 놈이 많이 꼬장꼬장해서 한번 찍으면 진짜 계속 괴롭힌다구. 그래서 애초에 찍히지 않는 게 중요한데. 어쩌나 이제."
상현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마도 박대리는 상현이 쉽사리 회사를 그만두지 못할 것까지 계산한 듯했다. 결국 상현이 스스로를 박대리에게 희생양으로 던져준 셈이었다.
상현은 집으로 가는 길에 그날 하루를 돌이켜보고는 회사생활을 더 해나갈 자신이 없어졌다. 당장에라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당장에 그만두면 자기 한 몸은 어떻게든 건사한다 치더라도 아픈 아버지가 눈에 밟혔다. 그리고 다리도 다치고 아픈 와중에도 자신이 번듯한 성인이 되길 바라며 뒷바라지를 해준 아버지의 노고를 생각하면, 회사를 그만두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상현은 어떠한 괴롭힘이 계속되더라도 최대한 버티면서 몇 년은 경력을 쌓고 이직을 하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했다.
다음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부장의 괴롭힘은 계속되었다. 별것 아닌 걸로 꼬투리를 잡아서 욕을 하는 것은 기본이고, 실제로 조금 실수라도 했다 치면 당장에 그만두라며 소리치고 펜을 집어던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상현은 최대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본인이 모자라니 많이 가르쳐달라는 말과 함께 죄송하다는 인사로 일관했다. 예전 같으면 박대리가 그런 상현을 데리고 나가 위로라도 해주었겠지만, 이제는 박대리마저도 상현을 없는 사람 취급했기에 상현은 그저 자리에 앉아 혼자 마음을 다스리며 일하는 수 밖에는 없었다.
가끔 다들 퇴근하고 남아있는 사무실에 앉아서 밤 10시, 11시까지 일을 하고 있노라면 정말이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견디기 힘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상현은 자신을 키워준 아버지와 여자친구인 선영을 생각하며 어떻게든 버텼다. 퇴근길에 5분, 10분 정도 선영과 통화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어떻게든 다 견딜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반년이 되어갈 무렵, 선영은 조심스레 상현에게 결혼 얘기를 꺼냈다. 만난 지도 오래되었고, 이제 상현도 취직을 해서 자리를 잡았으니 어서 식을 올렸으면 좋겠다고 했다. 또 늦으면 늦을수록 아이를 갖기 힘들 테니 빨리 아이를 낳아 기르자는 얘기도 했다.
상현도 선영의 얘기가 맞는 얘기라고 생각했다. 지금 일이 너무 힘들고 바빠서 선영과는 통화만 겨우 하는 정도인데, 결혼을 하면 그래도 집에 가서 선영을 볼 수 있고, 서로 의지하며 살면 그래도 이 힘든 삶을 잘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쇠뿔도 단김에 뺄 겸, 선영의 얘기가 나오고 2주 뒤 주말로 날을 잡아서 바로 선영의 집으로 인사를 드리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