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현이 온다고 해서 선영의 집 거실에는 이미 한상이 그득하게 차려져 있었다. 상현은 준비해 온 한우세트와 홍삼을 부모님께 선물로 드리고는 상 앞에 가서 앉았다. 맞은편에는 선영의 부모님이 앉았고, 선영은 상현의 옆에 앉았다.
"뭐, 얘기는 나중에 하고 집에 손님이 오셨으니, 일단은 좀 들게."
"네, 잘 먹겠습니다."
여러 맛있는 음식들이 한상 가득 차려져 있었지만, 상현은 너무 긴장한 나머지 어떤 음식을 먹어도 아무 맛도 느낄 수가 없었다. 차라리 밥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질문이라도 주시면 좋으련만, 예상외로 선영의 부모님은 식사를 하시면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으셨다. 선영의 어머니만 간간히 이것 좀 먹어보라며 몇몇 반찬들을 상현의 앞으로 밀어주실 뿐이었다. 덕분에 상현의 긴장감은 계속 올라가기만 해서 먹던 게 다 체할 것 같았음에도, 첫인상을 잘 만들기 위해 억지로 잘 먹는 척하며 꾸역꾸역 밥 한 공기를 다 먹고 어지간한 반찬들을 반 이상 비우는 기염을 토했다.
그렇게 밥을 다 먹자 선영의 어머니가 상을 치우려 했다. 상현이 어머니를 도와 같이 상을 치우려 했으나, 어머니는 상현에게 앉아서 얘기나 나누라며 한사코 도움을 거부하시고는 선영과 함께 상을 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선영의 아버지와 단 둘이 남은 상현은 침묵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저 마룻바닥만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선영의 어머니는 미리 깎아놓았던 과일을 작은 반상에 올려 거실로 갖고 왔다. 그렇게 작은 반상 둘레로 네 명이 둘러앉아 깎은 사과를 하나씩 집어먹었다. 상현이 사과를 한입 먹자, 선영의 아버지가 말했다.
"그래, 선영이랑 결혼을 하고 싶다고?"
상현은 자세를 고쳐 앉고 말했다.
"네. 선영이와 결혼하고 싶습니다."
그러자 선영의 아버지는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면 미안하지만, 내가 몇 가지 좀 물어봐야겠네. 선영이에게 자네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는 귀가 닳도록 들었지만, 그래도 아비 된 입장에서는 걱정을 안 할 수가 없거든."
"네, 편히 물어보십시오."
"아무래도 내가 민감한 질문들을 하게 될 것 같아서 미안하다는 얘기를 먼저 해야겠네. 혹시 내 질문에 맘이 상하거나 대답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되네."
"결혼 허락받으러 왔는데 물어본 거에 대답을 안 할 수가 있겠어?"
선영이 혀를 차며 말했다. 상현은 그런 선영을 돌아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아무튼, 일단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겠네. 취직한 지 얼마 안 됐다고 들었는데, 결혼에 대한 준비는 어느 정도 되어있는가?"
상현은 준비해 온 대로 답변을 했다.
"네, 아직은 회사에서 자리를 잡은진 얼마 안 됐지만, 매달 착실하게 적금도 들고 청약도 넣고 있습니다. 지금은 연봉이 많지는 않아도 안정적인 회사이고, 여기서 2~3년 더 경험을 쌓고 더 좋은 곳으로 이직하려 합니다. 지금 당장에 결혼 자금이 많지는 않아서 아마 결혼하게 되면 작은 전셋집에서 시작해야 하겠지만, 앞으로 5년 내에 더 큰 곳으로 이사를 하고 10년 내에 청약으로 집을 장만할 계획입니다. 저는 술, 담배도 전혀 안 하고 밖에서 하는 취미도 없어서 따님 속을 썩일 일도 없고, 앞으로도 좋은 배우자가 되어 선영이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습니다."
선영의 어머니는 상현의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흐뭇한 미소를 띠며 사과를 오물오물 베어 먹었다. 선영도 상현이 준비해 온 대답이 마음에 든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기양양하게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선영의 아버지는 그런 선영의 시선을 애써 회피하며 다른 질문을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내가 납득하기가 좀 어려운데…. 구체적으로 돈을 얼마나 모았고, 부모님이 어느 정도 해주실 수 있는지를 좀 얘기해 줄 수 있을까? 물론 자네네 집만 그러라는 게 아니라 우리도 그만큼은 같이 보태주려는 거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말고."
"…"
상현은 말문이 턱 막혔다. 상연이 죽을힘을 다해서 모은 돈은 고작해야 적금 천만 원 남짓이었다. 당장에 월급은 상현과 아버지의 생활비로 거의 다 쓰이고 일부 남은 학자금 대출을 갚는 과정이라 그 정도도 어찌 보면 꽤나 성실하게 모은 축에 속했다. 하지만 고작 천만 원을 갖고 당신의 귀한 딸과 결혼하겠다 말하기에는 부담스러웠다. 더욱이 상현은 아버지의 지원을 받는 것은 불가능했다. 지원을 받기는커녕 결혼을 해서도 상현의 아버지를 보살펴드려야 할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상현은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자 선영의 아버지가 말했다.
"사실, 자네 아버님 얘기는 선영이를 통해서 어느 정도 들었네. 나도 뭐 자네처럼 효심이 깊은 사람이 선영이와 결혼하겠다는 건 좋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현실적인걸 생각하지 않을 순 없지 않겠나."
"…"
"사실 사회 초년생이 돈을 모아봐야 얼마 되지 않는 것도 잘 알고, 자네 부모님께 지원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고는 생각하긴 했네. 뭐 지원 못 받는 거야 그만큼 우리가 더 해주면 된다고도 생각하고. 하지만 자네 아버님이 계속 아프신 걸로 아는데, 우리 선영이가 결혼해서도 계속 자네 아버지 뒷바라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나는 솔직히 아직은 결혼시키고 싶지 않네."
"아빠!"
선영이 원망 섞인 눈초리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선영의 어머니는 혹시라도 선영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까, 선영의 팔을 잡고 손가락을 입으로 갖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선영의 아버지는 잠시 선영을 바라보고는 상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적어도 빚이라던가 자네 아버지의 노후라던가 그런 게 다 해결되거나 대책이 서서, 온전히 선영이와 둘만 결혼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을 때, 그때까지는 나는 이 결혼에 찬성할 수가 없네."
상현은 선영의 아버지의 말에 단 한마디도 대꾸할 수 없었다. 본인이 선영의 아버지 입장에서 생각해 봐도 자기 귀한 딸이 결혼해서 계속 시아버지 뒷바라지를 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찬성하지 않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아빠,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그럴 거면 왜 인사 와도 된다고 한 거야! 사람 불러다가 이렇게 면박 주려고 불렀어?"
"어허! 면박을 주려고 불렀다니! 딸이 몇 년 넘게 만나고 결혼까지 하겠다는 남자니까 얼굴 한번 보고 어떤 사람인지 보고 밥이나 한 끼 하려고 부른 거지."
"그래놓고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선영은 격분해서 어머니의 팔을 뿌리치고 일어났다. 하지만 그 순간 상현이 일어나서 선영을 말렸다.
"선영아, 난 괜찮아. 진정해."
"괜찮긴 뭐가 괜찮아!"
선영은 자신의 팔을 움켜쥔 상현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
상현은 더 말하지 못하고 어쩔 줄 모르는 상태로 바닥만 쳐다보았다. 잠시 후 상현은 선영의 아버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괜히 준비도 안된 상태로 인사드리러 와서 불편하시게 만들었네요. 죄송합니다. 준비가 되면 다음에 다시 인사드리러 오겠습니다."
인사를 마치자마자 상현은 바로 현관으로 향했다.
"오빠!"
"그래, 오느라 고생 많았고 다음에 또 보세."
"아빠!"
선영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상현은 다급히 나갈 채비를 했고, 선영의 아버지는 그런 상현을 배웅했다. 선영의 어미는 선영의 뒤에서 선영을 끌어당기며 얼른 들어와 앉으라는 얘기만 반복했다.
그렇게 상현은 도망치듯이 선영의 집에서 뛰쳐나왔고, 그렇게 선영과의 결혼은 무기한 연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