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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호 Feb 14. 2024

제2관 인생보험 - 7

  그 뒤로 상현과 선영은 최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상현은 선영의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틀린 말은 아니라며 선영을 달랬고, 선영도 그런 점들은 이해가 가지만 부모님이 너무 무례했다며 사과했다. 그리고 상현은 결코 선영과의 결혼을 포기한 것이 아니기에 학자금 대출을 갚고, 결혼자금도 마련하고, 아버지 노후에 대한 대책도 세워서 다시 인사드리겠다 말했다. 하지만 선영은 그래서는 너무 늦다며 대출만 갚고 나면 바로 식을 올리자 했다. 하지만 상현은 선영의 아버지 말이 옳다며, 적어도 자기가 준비가 될 때까지는 기다려 달라고 했다. 자기라도 귀한 딸의 남의 집 가서 고생하는 꼴은 못 볼 것 같다며. 하지만 선영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빠. 나 괜찮아 진짜. 그건 아빠나 오빠만의 생각이고 나는 별로 고생이라고 생각 안 해. 아버님 모시고 사는 게 뭐 고생이라고 그래. 그리고 오빠도 나도 돈 벌잖아. 풍족하게 살지는 못해도 아버님 아프신 거 커버할 정도는 되잖아."

  "하지만 선영아, 그건 좀 아닌 것 같아. 네가 아무리 그래도 나는 네 아버님 말씀처럼 준비가 좀 된 다음에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

  "오빠 그러면 너무 늦는다고 생각하지 않아? 대체 언제쯤 준비가 다 될 줄 알고."

  "그래도 잘 준비해서 당당하게 아버님께 허락받고 가족들 축복 속에서 결혼을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 아무리 네가 괜찮다고 해도 가족들이 반대하는 결혼을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하지만 오빠…."

  "선영아, 미안하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줘. 나 꼭 열심히 돈 모아서 다시 허락받으러 갈게."


  그렇게 상현과 선영은 결혼을 미루고는 각자 자리에서 잘 생활하며 지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3년에 접어들 무렵, 기다리다 지친 선영이 이별통보를 한 것이었다.

  상현은 사로에서 나와 화장실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에는 눈물을 꾹 참으려 했으나 조금 새어 나오는 바람에 눈 주위가 빨갛게 변해버린 상현의 모습이 비쳤다. 상현은 다급히 눈 주위를 씻고는 다시 회의실로 향했다.

  상현이 회의실로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회의를 멈춘 상태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 상현은 자기 자리로 조용히 가서 앉으려 했는데, 상현을 본 부장이 바로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

  "회의 중에 뭔 화장실을 그리 오래갔다 와!"

  상현은 최대한 태연한 척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속이 좀 좋지 않아서요."

  "그러면 회의에 들어오기 전에 미리 화장실을 갔다 와야 할 거 아냐! 아니 그전에 컨디션 조절 하나 못하고, 여기가 무슨 학굔 줄 알아?"

  "…"

  꼬투리를 하나 잡아서 신이 난 부장은 상현을 세워놓고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냈다.

  "요즘 애들은 말이야, 기본이 안되어있어, 기본이! 세상이 애새끼들을 오냐오냐 키워대니까 지들이 아주 제일 잘난 줄 알고 이기적이지. 요새 애들이 얼마나 이기적인지 지들 편할라고 결혼도 안 하고 애도 안 낳고. 아주 그냥 세상이 말세야 말세. 좀 멀쩡한 놈들은 죄다 사라지고 어디 빈 쭉정이 같은 놈들만 득실거려 가지고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지."

  가뜩이나 계속되는 야근으로 피폐해진 몸 상태에 선영과의 이별로 마음마저 다친 상현은 더는 부장의 얘기를 듣고 있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픈 아버지를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스스로에게 "참자. 참아야 해."라고 말을 하며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부장의 설교는 끝이 날 줄 몰랐다.

  "인사팀 놈들도 말이야. 이런 병신 같은 놈을 왜 뽑은 거야 도대체? 이 회사가 인사정책이 이 모양 이 꼴이니까 매년 실적이 곤두박질치는 거 아냐. 나 같은 선배들이 열심히 해서 일궈놓은 회산데. 어디서 굴러먹었는지도 모르는 너 같은 놈들이 죄다 말아먹기만 하면 대체 일은 누가 해, 일은? 하긴 일을 어떻게 하겠어. 회의 도중에 화장실에 가서 한참 돌아오지도 않는 기본도 모르는 놈인데. 대체 집에서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은 거야? 부모란 작자는 교육을 어떻게 했길래 이 딴 놈이 나왔어?"

  부장의 입에서 부모님에 대한 욕이 거론되자 마지막까지 참고 또 참았던 상현의 인내심은 끊어졌고, 바로 부장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으아아아아아아!"

  상현은 상현의 주먹에 맞아 넘어진 부장 위에 올라타서 괴성을 지르며 온 힘을 다해 주먹을 날렸다. 눈물까지 흘리며 주먹질을 하는 귀기 어린 모습에 회의실 안에 있던 사람들도 섣불리 말리지 못하고 당황한 상태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가만히 있다간 더 큰일이 날 것임을 직감한 직원들이 상현에게 달려들어 상현을 부장에게서 떼어 놓았다. 부장은 정신을 잃기라도 한 것인지 누워서 일어나질 못했다. 상현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계속 눈물을 흘리고 괴성을 지르며 부장에게 가려했다. 워낙 분노에 차서 그런지 두 명이 달라붙어 말리는데도 힘에 겨워 결국 세 명째 사람이 붙어 말린 끝에 겨우 상현을 막을 수 있었다. 


  일주일 뒤 결국 상현은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저 직원들 간의 다툼으로 치부하기에는 회사 내에서 싸움이 일어났기도 했거니와, 워낙 심하게 폭행을 한 탓에 해고를 면하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상현의 해고로 마음이 풀린 것과 더불어 다른 사람들이 부장의 폭언을 증언한 덕분에 부장은 상현에게 민사소송까지는 제기하지 않았고, 부장도 3개월 감봉되는 선에서 사내 징계위원회는 마무리되었다. 

  그나마 민사소송까지는 가지 않은 게 상현에게는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으나, 당장에 일자리를 잃은 상현은 앞날이 막막했다. 아직 입사 1년을 채우지도 못해서 퇴직금도 못 받았기 때문에 더더욱 암울하게만 느껴졌다. 집에 계신 아버지에게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도 난감했다.

  상현은 마지막날 출근해서 겨우 쇼핑백 두 개에 개인 물품을 싸고는 바로 회사를 나섰다. 바로 집으로 향하기에는 마음이 너무 힘들었기에 쇼핑백을 든 상태로 근처 한강을 향해 걸었다. 가끔 울적하거나 답답할 때면 종종 한강에 나와 산책을 하곤 했었는데, 취업 후에는 시간이 없어서 한 번도 걷질 못했었다.

  막상 한강에 다다라 산책을 하려고 하니 양손에 든 쇼핑백이 거추장스러웠다. 회사에서는 워낙 바쁘게 일만 하느라 개인 물품이라고는 모니터 받침대와 몇몇 필기구들, 작은 USB선풍기와 물티슈가 전부였고, 어차피 있으나 마나 한 물건들이었기에 그냥 쇼핑백채로 근처 쓰레기통에 다 처박아 버렸다. 

  양손이 홀가분해진 상현은 그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로 "하…"하는 한숨을 내쉬며 무작정 한강을 걸었다. 점심때라 그런지 점심을 먹고 산책을 나온듯한, 목에 사원증을 맨 직장인들이 상현의 곁을 스쳐갔다. 그 모습을 본 상현은 환하게 웃고 있는 그들과는 다르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산책로를 따라 터벅터벅 걸었다.

  한강변을 따라 걷고 또 걷다 보니 어느새 한강 다리를 두 개나 지쳤다. 더 가봐야 별다른 것도 없을 것이기에 상현은 방향을 틀어 다리 위로 올라갔다. 낡아서 녹이 슬고 삐걱거리는 원형 계단을 따라 쭉 올라가 보니 다리 위로 수많은 차들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상현은 다리를 따라 강 건너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걷다 보니 예전에는 다리 난간에 자살 예방 문구가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하지만 오히려 부작용이 속출해서 이제는 이미 다 지워진 상태였다. 상현은 다리를 따라 쭉 걷다가 다리 정 중앙에 멈춰 서서 한강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강을 내려다보던 상현의 머릿속에 예전에 다리 위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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