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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호 Feb 19. 2024

제2관 인생보험 - 9

  상현의 말에 2호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역시, 매우 명석하신 분이군요. 맞아요, 보험이라면 보험료의 납입과 보험금의 지불을 신경 쓰시는 게 맞죠. 매우 좋은 질문입니다."

  2호의 말이 끝나자 상현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런 이성적인 분들이라면 보통 폭력을 행사하지 않으실 가능성이 높기에 방금 신체의 자유를 돌려드렸습니다."

  상현은 자기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보며 원래처럼 움직일 수 있는지 확인했다. 다행히도 모든 부분이 정상이었고, 그제야 상현은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질문인 보험료 납입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음, 생각해 보니 이것도 좀 놀라실 수 있겠네요. 다음부터는 FAQ에 이 질문도 같이 넣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2호의 말에 상현은 뭔가 심상치 않은 게 나올 것이라 느꼈다.

  "그 질문에 대답을 해드릴 건데, 하나 부탁드리자면, 제 말이 끝나기 전에 말을 끊지 말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게 서로를 위해서도 좋을 테니까요."

  "알았어요."

  상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험료는 바로 상현님의 영혼으로 납부하시면 됩니다."

  "…"

  "아마도 여기까지만 들으면 제가 무슨 영혼을 빼앗으러 온 악마로 보일 수도 있겠죠. 그래서 말을 끊지 말고 다 들으시라 말씀드린 겁니다. 어쨌든, 바로 이어서 설명을 드리자면, 영혼을 다 내시라는 게 아니라 영혼의 1%만 납부하시면 됩니다. 그것도 다른 보험들과는 다르게 미리 납부하는 것도 아니고 거치식도 아닙니다. 바로 보상을 받으시는 그 순간에, 납부하시면 됩니다. 어떻게 보면 보험보다는 거래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어쨌든 계약 자체는 미리 맺어놓으셔야 하기 때문에 보험에 좀 더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도 상현님에게 매우 유리한 보험이지요. 상현님에게 왜 유리한지를 말씀드리자면, 일단은 상현님의 인생이 망하지 않고 무난하게 흘러간다면, 저희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상현님은 그냥 그대로 상현님의 행복한 인생을 잘 영위하시면 되는 거지요. 또한 보상이 지불될 때 납부해야 하는 상현님의 영혼 1%는, 상현님에게 어떤 영향도 끼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실 겁니다. 수명이 줄지도 않고 건강이 나빠지는 것도 아니며, 상현님의 재산이나 재물, 사회적 지위, 인간관계 등 어떤 것도 바뀌지 않습니다. 물론 실제로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건 아닙니다. 어떤 부분인지 정확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바뀌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것일 뿐 상현님 삶의 아주 사소한 일부분을 저희가 가져갈 뿐입니다. 하지만 상현님은 그걸 느낄 수도 없으며, 상현님의 삶은 그전이나 후나 다를 바가 없을 겁니다. 또한 이를 통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두려워하는 것처럼 사후에 영혼을 어떻게 하지도 않을 것이며, 이 계약은 상현님이 보험료를 납부하는 그 시점, 보험금을 받게 되는 그 시점에 바로 종료될 것입니다. 이상 추가 질문 있으십니까?"

  "…"

  2호의 속사와도 같은 설명에 상현은 할 말을 잃었다. 2호가 한 말이 다 명확하게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2호는 이 계약으로 인해 상현이 불이익을 받지 않을 것임을 최대한 어필하고 싶음이 명확해 보였다. 그런 상현을 보며 2호가 말했다.

  "지금 당장 모든 게 다 납득되지 않으셨더라도, 추가 질문이 없으시면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내용 포함, 모든 내용은 제가 잠시 후 드릴 계약서 안에 적혀있으므로 제 설명이 끝난 후, 계약서를 꼼꼼히 읽어보시면 되겠습니다."

  상현에게 보여주었던 긴 두루마리가 바로 그 계약서인 듯했다.

  "자, 그럼 두 번째로 질문을 주셨던 부분, 다시 말해 보험금 또는 보상이 지불되는 시점이 언제인지, 다시 말해 상현님의 인생이 언제 망했다고 판단할 것인지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상현님의 인생이 망했는지의 여부는 상현님이 중요시 여기는 가치'들'을 종합하여 결정하게 됩니다. 여기서 주의하실 부분은 가치'들'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마음속에 중요시 여기는 가치들을 담고 있지만, 그중 하나만을 잃었다고 해서 인생이 망했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러 가치'들'을 토대로 인생의 망함 여부를 판단하고, 그에 따른 보상을 드릴 예정입니다. 이번에도 쉽게 이해하실 수 있도록 예시를 하나 들어드리겠습니다. 어느 한 여성이 있다고 해봅시다. 그 사람은 행복한 가정을 꾸려 두 아이가 있고, 남편과의 사이도 매우 좋습니다. 친구들과도 자주 만나고 경제적으로도 부족함이 없으며, 여행도 자주 다닙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여성이 시한부선고를 받았습니다. 말기 암으로 인해 남은 수명은 길어야 반년 정도라는 선고가 내려졌습니다. 그럼 그 여성은 인생이 망한 것일까요? 저희 기준으로는 아닙니다. 그분이 중요시 여기는 가치를 중요한 순서대로 나열하면 건강, 가족, 재물인데, 이중에 건강만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그분의 옆에는 사랑하는 가족들이 남아 그분을 아끼고 사랑하며, 고통스럽지 않도록 치료가 가능하며 사후에도 자녀들에게 부족함이 없을 만큼의 재물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저희는 그분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강을 잃었음에도 인생이 망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만약 그분이 가족도 없는 무연고자에 하루 벌어 근근이 먹고사는 분인데,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고 하면 이때는 인생이 망했다고 판단하여 즉시 보상을 지불합니다. 그리고 그 보상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그분이 중요시 여기는 가치에 따라 지급됩니다. 방금 말씀들인 경우에는 수명을 늘려드린다던가, 암을 없앤다던가 하는 식으로 보상을 하게 되겠지요. 다만 아까 운동선수의 예시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저희는 어디까지나 다시 인생을 잘 살아가실 수 있도록 도움을 드릴뿐, 받은 도움을 어떻게 살리고 활용할지는 고객분들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건강을 회복한 여성분이 만약 다시 몸을 함부로 다뤄서 병에 걸린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본인의 선택이라는 말이지요."

  2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상현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요약하자면, 인생이 망했는지 여부는 고객님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에 따라 판단하지만 보상을 드릴 때에는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하나'에 따른 보상을 해드린다는 것입니다. 이점 깊이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만약 제가 인생이 망했다고 생각해도 신…?은 망한 게 아니라고 판단해서 보상을 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상현님에게 보험금이나 보상이 지불되지 않는다면, 상현님은 아직 인생이 망한 것까지는 아니며, 아직 재기할 기회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죠."

  어느 정도 상태가 진정된 상현은 점점 머리가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2호의 말을 들으며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올랐고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물어봐야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올바른 선택을 내리기 위해서. 하지만 그런 상현의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듯 2호가 손바닥을 들어 상현의 눈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일단, 저도 바쁜 몸이라 질문은 여기까지 받겠습니다. 이다음부터는 계약서를 꼼꼼하게 읽어보시면 되겠습니다. 어차피 시간은 멈춰놓았으니, 상현님이 원하시는 만큼 시간을 들여 읽으시고 곰곰이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그때까지 저는 다른 고객님을 뵈러 다녀올 예정이니, 상현님이 충분히 다 읽으셨다고 판단되시면 저를 불러주시기 바랍니다."

  2호는 아까 바지 뒷주머니에서 말아 넣었던 계약서를 꺼내 상현에게 건넸다. 그리고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펜과 수첩을 꺼내 건넸다.

  "저에게 질문할 게 생기시면 이 수첩에 적어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따가 제가 돌아왔을 때 모두 답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아마 상현님이 궁금해하실 만한 내용은 계약서에 다 적혀있을 테니 질문이 많지는 않으실 거라 예상됩니다. 그럼,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그러자 어떤 기척이나 소리도 없이 상현의 눈앞에서 2호가 사라졌다.


  2호가 사라진 뒤 상현은 주변을 탐색해 보았다. 어느 정도로 시간이 멈춘 것인지, 어디까지 멈춘 것인지 등이 궁금했다. 우선은 다리를 벗어날 수 있는지를 확인해 보기 위해 다리 위를 쭉 걸어가 보았다. 하지만 고작 열 걸음 정도를 걸었을 때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혔다. 반대방향으로 걸어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멀리 이동하지 못하도록 무언가가 가로막고 있는 듯했다. 

  주머니 속의 휴대폰을 꺼내보니 휴대폰은 까만 화면 그대로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정말로 모든 시간이 멈추고 상현만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듯했다.

  상현은 다리를 도로로 향하고 인도에 걸터앉아 계약서를 펼쳐 들었다. 

  '책상이나 의자도 좀 줄 것이지.'

  계약서는 작은 글씨로 촘촘하게 쓰여있었다. 대충 봐도 어지간한 책 한 권은 가뿐하게 넘을 분량의 내용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처음 시작은 보험 그 자체에 대한 설명이었다. 아까 2호가 설명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설명이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2호의 설명보다 좀 더 상세하고 정확한 용어로 쓰여있다는 것과, 이해를 돕기 위한 예시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10여분을 쭉 읽고 나니 그다음부터는 사람들이 궁금해할 법한 것들에 대한 설명들이 쭉 나열되어 있었다. 인생이란 무엇으로 정의할 것인지, '망하다'는 말은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 영혼의 존재는 어떻게 판단할 것이며 지불된 사항은 어떻게 확인할 것인지, 행정 착오가 발생하여 지불이 빨리 이루어지거나 보상이 늦게 이루어지면 어떻게 조치할 것인지, 보험에 특약을 걸 수 있는지, 도중에 해약이 가능한지 등 상현이 생각할 수 있는, 그리고 생각조차 하지 못한 모든 경우에 대한 내용들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었다. 

  상현은 이 계약서가 대체 어디까지 가정을 했는지, 그리고 그에 따라 얼마나 많은 양이 쓰여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계약서를 바닥에 놓고 말려있는 부분을 그대로 밀어 계약서를 펼쳤다. 말려있는 부분은 데굴데굴 굴러가다가 아까 상현이 부딪혔던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혀 멈춰 버렸다. 상현은 벽으로 가 계약서를 살짝 돌려 다시 반대쪽을 향해 굴렸다. 또다시 데굴데굴 굴러간 계약서는 반대편 벽에 부딪혀 멈췄다. 그럼에도 여전히 계약서는 다 펴지지 않은 상태였다. 오기가 생긴 상현은 어떻게든 이 계약서를 다 펼쳐보겠다는 일념으로 계속 벽과 벽을 왔다 갔다 하며 계약서를 펼쳤다. 

  결국 계약서는 벽과 벽사이를 10번 왕복한 뒤에야 다 펼쳐졌고, 상현이 자신의 보폭으로 미루어 짐작하기로는 약 120m나 되는 긴 문서임이 밝혀졌다. 상현은 그제야 계약서가 이렇게나 길기 때문에 충분히 시간을 들여 읽을 수 있도록 시간을 멈춘 상태에서 읽게 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긴 시간 동안 문서를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 골치가 조금은 아파왔다. 하지만 시간뿐만 아니라 육체적, 정신적 피로도 같이 멈춰있는지, 저녁임에도 상현은 전혀 피곤하거나 지치지 않은 상태였기에 생각보다 잘 읽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그렇게 상현은 계약서를 차근차근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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