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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호 Feb 20. 2024

제2관 인생보험 - 10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 (실제로는 시간이 흐르지 않았지만) 마침내 상현은 계약서를 꼼꼼하게 다 읽어내었다. 계약서를 읽는 와중에 궁금해진 것들은 수첩에 적어가면서 읽었으나, 상현이 궁금해한 것들은 바로 다음 혹은 다다음 약관에 설명이 되어있었기에, 막상 계약서를 다 읽고 나니 상현이 질문할 것들은 다 사라진 상태였다. 

  이제 계약서를 다 읽었으니 계약을 할 차례였다. 상현은 자신을 부르라고 했던 2호의 말을 떠올리며, 혹시나 하는 마음과 함께 조그맣게 속삭이듯 말했다.

  "2호님?"

  "네."

  상현의 뒤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상현은 깜짝 놀라 몸을 들썩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언제 왔는지 2호가 서있었다. 

  "놀라셨습니까?"

  "…네."

  "죄송합니다."

  전혀 죄송하지 않은 표정으로 2호가 말했다.

  "다 읽어는 보셨습니까?"

  "네, 다 읽어봤어요."

  "질문은요?"

  "질문은 딱히 없습니다. 엄청 자세하게 써있더라구요. 제가 생각할 수 있는 건 모두 다 쓰여있었어요."

  "그럼 결정은 내리셨나요?"

  "네, 계약할게요."

  상현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계약서가 번쩍이며 사라졌다. 그리고는 어느샌가 계약서는 2호의 손에 들려있었고, 계약서의 맨 마지막에 있는 서명란이 펼쳐져있었다.

  "아까 드린 펜 아직 갖고 계시죠? 그걸로 서명하지면 됩니다."

  상현은 펜을 들어 서명을 하며 물었다.

  "그런데, 왜 계약서를 두루마리로 하신 거예요? 그냥 책자처럼 만들거나 아예 태블릿에 PDF파일로 넣어서 주면 보기 더 편하지 않을까요? 혹시 두루마리로 꼭 해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상현의 말에 2호는 처음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상현은 서명을 마치고 고개를 들며 2호를 쳐다보았다. 나름 무표정에 가깝던 2호의 표정이 일그러진 것이 보였다. 

  "혹시 대답하기 어려우신 건가요?"

  "고객님이 물어보셨는데, 대답하지 않을 수는 없죠."

  2호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 두루마리 문서가 더 멋있으니까요."


  상현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억눌렀다. 하지만 누가보기에도 웃음을 참고 있는 게 티가 났기에 그 모습을 본 2호는 인상을 찌푸렸다.

  2호는 상현이 서명한 계약서를 바지 뒷주머니에 꽂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이미 읽어 보셨겠지만 한번 더 상기시켜 드리자면, 우리가 나눈 대화는 필요한 때가 올 때까지는 기억하지 못하실 겁니다."

  "어째서죠?"

  "비밀 유지를 위해서입니다. 어차피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요."

  "그런데 아까 저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계약을 했다고 하셨는데, 그 사람들은 제 얘기를 믿어주는 거 아닌가요?"

  "하지만 그들도 기억을 잃은 상태라 믿어주지 않겠죠. 기억이 돌아온 사람들이라면, 믿어주겠지만, 애초에 이렇게 계약을 맺은 사람들끼리 만날 일이 잘 없습니다. 그리고 아까 약관을 보셔서 아시겠지만, 어차피 인터넷이나 SNS에 이 얘기를 올리더라도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사람들이 보기도 전에 삭제될 거고요."

  2호는 작게 한숨을 쉬며 나지막이 말했다.

  "인간들은 뭘 자꾸 만들어내서 일하기 힘드네요. 계약서가 길어지기만 하고."

  2호는 스스로의 말에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실언을 했네요. 사과드립니다."

  "괜찮아요. 사실인걸요."

  2호는 목례하듯이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그리고는 오른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어쨌든 이제 계약이 체결되셨습니다."

  상현도 오른손을 내밀어 2호의 손을 잡았다.

  "부디 앞으로의 인생에 이 보험을 떠올리실 일이 없길 바라겠습니다."


  그러자 순식간에 2호는 사라졌고 다리 위에는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자세의 상현만 남았다. 사방에서 차들의 엔진소리와 경적소리, 그리고 각종 소음들이 상현을 덮쳤다. 오랫동안 시간이 멈춘 고요한 공간에 있었던 부작용으로 주변 소음이 더 크게 느껴졌고 순간적으로 귀에 통증을 느낄 정도였다. 

  상현은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그렇게 양손으로 귀를 막고 잠깐 서있으니, 이내 소음에 적응되어 평온한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상현은 왜 자신이 귀를 막고 다리 위에 오도카니 서있는지에 대해 의아함을 느꼈다.




  이 모든 것을 떠올린 상현은 마침내 자신의 인생이 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때 보험을 들어 두었기에, 이제는 더 추락할 일은 없고, 재기할 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언제 어떤 방식으로 보험금 또는 보상이 지불될지 감이 오지는 않았다. 자신이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현재로선 돈이니, 금전적으로 보상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부랴부랴 발걸음을 옮겨 근처 복권방을 찾았다. 액수가 큰 로또를 살까 하다가 정말로 보상이 주어지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즉석복권으로만 샀다. 때마침 수중에 남은 현금 2만 원을 털어 2천 원짜리 즉석복권 10장을 사 그 자리에서 긁었다. 그렇게 10장을 긁은 결과 모조리 꽝이었다. 

  상현은 꽝이 된 복권을 버리고 허탈해하며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분명 계약대로라면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에 따른 보상이 주어져야 했고, 지금 상현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돈이었다. 돈이 있었다면, 아버지도 그렇게 고생하고 아파하지 않으셨어도 되고, 자신도 좀 더 여유롭게 취업을 준비해도 되었으며, 선영이와도 헤어질 일이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신은, 아니면 2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혹시나 사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차피 이 세상 모든 게 신의 뜻대로인데 자신에게 사기를 쳐봐야 남는 것도 없을 것이고, 계약에 따르면 보상이 지불되는 순간에 영혼의 1%를 납입하는 것이라 보상을 주지 않는다면 서로에게 이득이 될 것이 없어 보였다. 물론 자신의 이런 생각이나 행동들도 신의 뜻이며, 자신이 알지 못하는 원대한 계획이 있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만약 그런 게 진짜 있다면 한낱 인간의 힘으로는 알 수 없을 것이기에 그런 쪽으로 생각하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


  그렇게 30여분을 걸어서 집에 도착하니, 집 거실에서 상현의 아버지와 낯선 손님이 바닥에 앉아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낯선 손님의 정수리가 허전한 것을 통해 나이가 어느 정도는 있는 분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다 낡아빠진 갈색 골덴바지에 어울리지 않는 검정 재킷을 입고 있었고, 곰돌이 푸우처럼 튀어나온 배를 안간힘을 다해서 하얀 셔츠가 틀어막고 있었으나, 곧 한계에 다다를 것처럼 보였다. 

  이른 시간에 상현이 집에 온 것을 본 상현의 아버지는 놀라 물었다.

  "이 시간에는 웬일이냐?"

  그 말에 낯선 손님도 대화를 멈추고 뒤를 돌아 상현을 쳐다보았다. 볼이 빵빵하고 가느다란 눈은 살짝 굽어있어서 웃는 낯을 한 인상 좋은 아저씨로 보였다. 

  "어쩌다 보니 일찍 퇴근해도 된다 그래서 일찍 나왔어요."

  곰을 닮은 낯선 손님은 그런 상현을 보고는 상현의 아버지에게 물었다.

  "어? 설마 아들?"

  "어, 우리 아들."

  "아, 그럼 혹시 형님 아드님이 도와주면 되지 않을까? 아드님한테는 형님이 가르쳐주면 되겠네."

  "안돼. 쟤도 지 직장이 있는데 어떻게 그래."

  몇 마디 되지 않는 대화인지라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할 수 없었지만, 손님과 아버지의 대화로 미루어 볼 때, 무언가 일과 관련된 이야기임을 짐작한 상현은 다급하게 신발을 벗고 아버지와 손님 옆으로 가 앉았다. 

  "안녕하세요, 조상현이라고 합니다. 혹시 방금 아버지랑 어떤 얘기들을 하고 계셨던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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