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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호 Feb 23. 2024

제3관 보험금의 지급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공간, 그 한가운데 오도카니 책상 하나가 놓여있었다. 책상의 상판은 투명한 유리로 되어있었으나 매우 두꺼워서 튼튼해 보였다. 책상다리는 까맣고 가느다란 철제 프레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프레임이 너무 얇아서 책상을 버티지 못할 것만 같은 위태로운 모습이었지만, 책상다리 사이, 가늘고 둥근 쇠 파이프가 X자로 보강을 해주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검은색 모니터 3대가 일렬로 늘어져있었고 각기 다른 문서들이 수시로 나타났다 사라지고 있었다. 모니터 앞에는 매우 얇은 검은색의 키보드가 놓여있었다. 얇기는 해도 옆의 숫자키패드까지, 있어야 할 버튼은 모두 갖춘 키보드였다. 그리고 그 책상 앞에 앉아 모니터 세 개를 번갈아 바라보며 열심히 무언가를 작성하는 3호가 있었다.

  3호가 컴퓨터를 다루는 속도는 너무 빠르다 못해서 조금은 무서워 보일 정도였다. 손가락은 단 한순간의 주저함도 없이 쉴 새 없이 움직였고, 눈동자는 3개 모니터 사이를 계속해서 왔다 갔다 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그 괴상망측한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랄 수도 있었다. 3호는 그렇게 바삐 움직이는 와중에도 등을 등받이에 기대지 않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워 바른 자세로 앉아있었고 목도 지면에 수직으로 세운, 아주 정확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창 일하고 있는 3호의 정면, 저 멀리서 작게 구두소리가 들려왔다. 3호는 그 소리를 눈치챘으나, 당장에 쌓인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딱히 그 소리에 신경을 쓰지 않고 계속해서 업무에만 열중했다. 지금 일이 워낙 많이 쌓여있기 때문에 3호에게는 1분, 1초가 아까울 지경이었다.

  멀리서 들리던 구두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점점 커져서 어느샌가 모니터 바로 뒤로 다가왔다. 그럼에도 3호는 소리의 근원을 쳐다보기는커녕 계속해서 자신의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형이 왔는데 쳐다도 안보기냐?"

  그 말에도 3호는 눈과 손을 계속 움직이는 그 상태 그대로 유지한 채 작게 입을 열었다.

  "나 지금 바빠."

  "척 보면 알아. 여전히 귀염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구나."

  "…"

  대꾸할 가치가 없다고 느꼈는지 2호의 말에도 3호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 2호는 그런 3호를 보며 혀를 찼다. 하지만 언제나 그런 녀석이라는 걸 익히 알고 있는지라 딱히 마음이 상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3호가 갑자기 손을 멈추고 2호를 쳐다보며 말했다.

  "형."

  "… 왜?"

  "형은 혹시 컴퓨터라는 걸 알아?"

  2호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당연히 알지 누굴 바보로 아냐."

  "그럼 서류를 좀 워드문서나 PDF로 만들어서 메일로 보내줄래? 왜 자꾸 두루마리 뭉치를 보내는 거야?"

  2호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게 멋있잖아."

  "그게? 형, 형이 그러면…. 아니다 말을 말자."

  3호는 다시 모니터를 보며 일을 시작했다. 3호의 말에 민망해진 2호는 혀를 살짝 내밀어 입술을 핥고는 쩝 소리를 내며 입을 다셨다. 몇 번 입을 다신 후 2호가 말했다.

  "근데, 내가 지난번에 지급 신청한 건은 어떻게 됐어?"

  "조상현 씨 건 말이야?"

  "그래, 조상현 씨 건. 그거 지급 잘 됐나 해서."

  3호는 손을 멈추고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어련히 알아서 잘 되고 있을라고."

  "지급은 누가 하러 갔는데?"

  "5호가 갔어."

  "막둥이가? 아, 그거 괜찮으려나. 조상현 씨 건은 지급이 좀 까다로워서 막둥이 말고 넷째나 네가 가는 게 나았을 것 같은데."

  "나는 보다시피 자꾸 서류를 두루마리 뭉치로 주는 구시대적인 어떤 분 때문에 서류 정리하느라 바쁘고 4호는 4호대로 바빠서 어쩔 수 없었어."

  2호는 책상 옆으로 돌아 3호 옆으로 걸어갔다. 3호의 옆에 서서 2호가 보는 모니터를 같이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지금 진행 상황 좀 공유해 줘. 어디까지 진행됐나 보게."

  2호의 말에 3호는 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이것만 보고 가 그럼. 나 진짜로 바빠. 형이랑 얘기할 시간도 없어."

  "알았다. 알았어. 넌 뭐든 왜 이렇게 급하냐."

  화면에는 조상현 씨의 보상에 관한 서류가 떴다. 3호는 순식간에 서류를 읽어보고는 미간을 한껏 찌푸리며 말했다.

  "이게 뭐야?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순서대로 아버지, 여자친구, 직장이었고 인생이 망한 시점에 본인이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돈이었는데, 보상을 형 맘대로 바꿔서 신청했어?"

  "아냐 그런 거."

  "아니긴 뭐가 아냐. 어쩌자고 이딴 걸 지급신청한 거야? 이것 때문에 걱정돼서 보러 온 거지?"

  3호의 말에 정곡을 찔린 2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본인이 돈을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데 왜 보상을 '행복한 가정'으로 한 거야? 본인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도 아니고 심지어 구체적이지도 않잖아. 이런 걸 5호가 어떻게 보상을 해줘? 형 진짜 일할 때 생각을 좀 해. 생각을."

  "야, 너 내가 형이라는 걸 너무 망각하고 얘기하는 거 아냐? 나도 저거 다 생각하고 한 거야."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건데?"

  2호는 3호의 비난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상태로 설명을 시작했다.

  "잘 봐봐 저 사람이 원래 제일 중요시 여기는 가치는 아버지, 여자친구, 직장이었어. 여기서 아버지가 첫 번째인 건 원래 사랑하는 가족이니까 그런 거고, 여자친구가 두 번째인 건 여자친구와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릴 목표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야. 그리고 그걸 위해서 직장에 들어가 돈을 벌려고 한 거고. 망한 다음에 돈을 제일 중요시 여긴 것도 돈이 있었으면 아버지도 편히 모실 수 있고 여자친구와 헤어지지도 않았을 거고 준비를 더 해서 더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해서 그런 거 아니겠어? 그래서 서류상으로는 제일 중요시 여기는 가치가 돈이라고 나왔지만 실제로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걸 가장 가치 있게 여긴다고 할 수 있지."

  "…"

  "원래 인간들은 본인 스스로 진짜 뭘 원하는 건지도 잘 모르기도 하고, 심지어는 원하는 걸 이루기 위한 수단을 목적으로 잘못 생각하곤 하잖아."

  "…"

  2호의 설명에 3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 형 말에도 일리는 있어. 하지만 저걸 5호가 어떻게 지급을 해? 지금 보니까 지금까지 기껏 한 게 괜찮은 직장에 조상현 씨랑 그 아버지를 취직시킨 게 다인데?"

  "거 참, 급하네. 밑에 봐봐 아직 '지급 중'이잖아. 5호도 다 생각이 있겠지. 5호가 막내긴 해도 일을 허투루 하지는 않는 애잖아. 좀 기다려봐야지."

  "고생은 5호가 하고 생색은 형이 내겠네."

  "언제부터 그렇게 막둥이를 아꼈다고 자꾸 빈정대냐?"

  "적어도 형보다는 더 아끼지."

  "너 잘났다."

  2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밑에 보니까 조상현 씨 특이사항에 '보험 가입 조건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자체적으로 조사 중'이라고 되어있네. 머리를 좀 쓰는 사람인가 본데, 그냥 놔둬도 되겠어?"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숨겨진 조건을 알아내는 건 불가능하지 않겠어?"

  3호는 잠시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2호가 보기에 3호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았기에 2호도 잠시 말을 멈추고 3호의 생각이 끝나길 기다렸다.

  "형,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불공평하지 않아?"

  "뭐가?"

  "가입 조건을 다 알려주지 않는 거."

  "왜"

  "한껏 공정한 척하고 계약을 하게 만들지만 사실 우리 쪽 카드는 다 보여주지 않고 공정한 척만 해서 보험에 가입시키는 거잖아. 이거 사기 아닌가 해서."

  "… 어떻게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어떻게 보면 아닐 수도 있고."

  "대체 어떻게 보면 아닐 수가 있는 거지?"

  2호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 숨겨진 조건을 알게 되면 죽어도 계약을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과, 어떻게든 계약을 악용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질 거야. 그런 걸 예방하기 위해선 숨기는 게 효율적이지."

  "하지만"

  "그리고"

  2호는 단호하게 3호의 말을 끊었다.

  "그걸 알려주는 것 자체가 인간에게는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주는 셈이야. 이미 인생 보험 자체가 그 사람의 인생이 망할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려줘서 가입하게 하는, 미래의 정보를 일부 누설하는 아슬아슬한 상품인데 숨겨진 조건까지 말하게 되면 이 보험은 아예 팔 수 없는 상품이 돼."

  2호의 설명에도 3호의 표정에 담긴 고뇌는 사라지지 않는 듯 보였다.

  "인간들에게 인생 보험을 판 효과는 이제야 겨우 눈에 좀 보이기 시작했잖아. 지금 방식이 맞는지 아닌지는 아직 좀 더 두고 보면 알 수 있을 거야. 닦달하지 말고 좀 차분하게 기다려봐. 넌 까탈스러운 데다가 성질이 너무 급해서 문제야."

  2호의 말에 3호는 2호를 팔로 밀어내며 말했다.

  "그럼 예의 바르고 성격 느긋한 2호 씨는 빨리 가서 일해. 나도 이제 이어서 일할 거야."

  "그래, 그럼 나는 간다. 다른 형제들한테도 안부 전해줘."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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