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흠, 뭐 다들 비슷하게들 대답하겠지. 가족이니 사랑이니 우정이니…. 나도 대충 뭐 가족이라고 써줘. 사실 다들 돈이 제일 중요하겠지만, 아닌 척 위선들을 떨더라고. 그러니 나도 돈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
"알겠습니다."
"뭐야, 끝이야? 인터뷰가 뭐 이리 짧아. 뭐 더 없어?"
그러자 기자는 가방에서 두꺼운 파일철을 하나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족히 4~500장은 되어 보였다. 하지만 파일철의 표지는 그저 까만 가죽으로 이루어져 있고,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아서 어떤 내용이 담긴 파일철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이게 뭔데?"
기자는 파일철 위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이 안에는 대표님이 좋아하실 만한 내용이 적혀있어요. 하지만 아마 제가 이걸 드린다 한들 대표님은 이걸 보지 않고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리시겠죠."
"어허, 사람을 뭘로 보고 그래?"
기자는 명석의 말을 신경 쓰지 않고 본인 할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미리 대표님께서 흥미를 느끼실 수 있도록 직접 보여드릴까 합니다."
기자는 파일철을 열어 첫 장을 펼쳤다. 그리곤 파일철을 돌려 명석이 볼 수 있도록 했다. 파일철 첫 장에는 큰 글씨로 '이 문서는 보험 계약 대상에게만 보이므로, 문서 내용 유출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뭐야, 보험? 당신 지금 나한테 보험 팔라고 그러는 거야?"
"아뇨. 다시 잘 읽어보세요."
명석은 다시 찬찬히 읽어보았으나 내용이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이게 무슨 말이야? 나한테만 보인다는 게?"
"제가 설명드리는 것보단 직접 보여드리는 게 낫겠네요. 이 로비에 있는 사람 아무나 하나 지명해 보세요."
명석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데스크에 있는 직원을 가리켰다. 그러자 기자는 데스크로 가 직원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눈 후 직원을 자리로 데려왔다. 그리고는 파일철의 첫 장을 가리키며 직원에게 말했다.
"여기 써진 글씨를 읽어주실 수 있을까요?"
직원은 고개를 움직여 테이블 위를 훑어보며 말했다.
"어떤 글씨요?"
"여기 종이 위에 써진 글씨를 읽어주시면 됩니다."
"아무것도 안 쓰여있는데요?"
"아무것도 안보이시나요?"
직원은 기자를 흘겨보며 말했다.
"뭐가 쓰여있어야 읽죠."
명석은 직원과 기자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이 황당한 광경에, 직원과 기자 둘이 짜고 자기를 속이려 드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겼다.
기자는 직원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자리로 돌려보냈다.
"보셨다시피 이 파일철 안의 내용들은 대표님에게만 보이도록 되어있어요."
"너, 사기꾼 아냐? 그게 말이 돼?"
"보여드려도 못 믿으실 줄 알았어요. 제가 이 파일철을 드릴 테니까, 직접 아무나 붙잡고 테스트를 한번 해보세요. 아마 결과는 마찬가지겠지만."
"…"
기자의 설명에도 명석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그리고 정말로 다른 사람에게는 안 보인다는 걸 확인하시면, 한번 내용을 쭉 읽어보세요. 대표님에게는 꼭 필요한 내용이니까요."
기자는 파일철을 덮어서 명석 쪽으로 쓱 밀었다. 하지만 명석은 그 파일철을 쉽사리 집어 들지 못했다. 여전히 명석의 눈에는 기자가 수상하기 그지없었다.
기자는 혼자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메고 말했다.
"여기 명함을 드리고 갈 테니까, 필요하실 때 연락 주세요. 되도록이면 빨리 연락을 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기자는 재킷 옆의 작은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파일철 위에 툭 얹었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 유유히 로비를 나서 명석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명석은 기자가 사라진 다음에야 정신을 차리고 기자가 준 명함을 들어보았다. 까만색의 명함 한가운데에 하얀 글씨로 '1호'라고만 적혀있었다. 그리고 명함 뒷면에는 가운데에 한 줄로 휴대폰 번호가 적혀있었다. 그것이 기자의 연락처인 듯했다.
명석은 귀신에 홀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여전히 명석은 기자를 수상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특별한 설명 없이 파일철을 건네면 바로 버릴 것이라는 걸 맞춘 것과, 데스크의 직원을 불러서 정말로 다른 사람이 읽을 수 없다는 걸 보여준 이상, 의심이 남아있기는 해도 차마 파일철을 버릴 수는 없었다.
결국 명석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파일철과 명함을 집어 들었다. 명함은 안주머니에 넣고, 파일철을 왼팔 안쪽에 끼고 로비 밖에 서있는 본인의 차로 향했다.
"카악, 퉤"
명석이 로비에 침을 뱉자, 이번에도 청소하시는 아주머니가 황급히 달려와 밀대로 가래침을 치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명석은 그대로 로비를 나가 차 뒷좌석에 올라탔다.
차에 탄 명석을 본 운전기사가 말했다.
"어디로 갈까요?"
명석은 들고 있던 파일철을 운전기사에게 건넸다.
"정기사, 이거 받아봐."
명석은 자신보다 나이가 최소 서른 살은 더 많은 운전기사에게도 아무렇지 않게 반말을 했다.
"이게 뭔가요?"
그럼에도 운전기사는 명석에게 정중하게 존대를 했다.
"그거 펴서 뭐 쓰여있나 한번 읽어봐 봐."
운전기사는 파일철을 펼쳐서 중간부터 빠르게 페이지를 넘겼다. 8장 정도 넘긴 다음에는 이상하다는 듯이 페이지를 한 움큼 집어 맨 끝까지 빠르게 파라라락 넘겼다. 마지막 페이지에 도착해서는 그 페이지를 명석에게 펼쳐 보이며 말했다.
"아무것도 안 쓰여있는데요? 그냥 빈 파일철인가 봐요."
하지만 명석의 눈에는 페이지 위쪽에는 작은 글자들이 빽빽하게 차있고, 아래쪽에는 크게 서명란이 있는 것이 보였다.
"거기 서명란 안 보여?"
"무슨 서명란이요?"
명석은 페이지 아래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 페이지 아래쪽에, 크게 쓰여있는 거."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요. 제가 노안이 와서 잘 못 보나 봅니다. 허허."
운전기사의 말에 명석의 등에는 땀이 한줄기 흘렀다. 운전기사의 눈이 먼 것이 아니라면 그 기자가 말한 대로 그 파일철 안의 내용들은 명석에게만 보이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명석은 황급히 파일철을 뺏어 들고는 말했다.
"일단 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