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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호 Mar 01. 2024

제4관 보험 사기 - 4

  1호의 말에 명석은 이 계약을 본인의 뜻대로 끌고 나갈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얻었다. 그래서인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말했다. 

  "첫 번째, 나는 기억을 지우지 않을 거야."

  "안됩니다."

  1호는 당연히 명석의 이야기를  단칼에 거절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명석도 예상을 했었기에, 명석은 굴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냥 지우지 않겠다는 게 아니야. 조건을 달면 되잖아, 조건을."

  "어떤 조건이죠?"

  "계약에 관해서 조금이라도 내가 누설을 하게 된다면 그 즉시 계약을 파기하는 거지. 나한테 보험금을 주지 않아도 돼."

  "공평하지 않네요. 그런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왜지?"

  "명석님의 어떤 식으로든 계약의 내용을 누설하신다면 저희는 이 보험을 더 이상 팔지 못하게 될 위험이 있지만, 정작 명석님은 원래 납부하기로 한 보험료를 내지 않고 보험금을 지급받지 않을 뿐인, 그저 아무 손해도 없는 상태가 됩니다."

  속셈을 들킨 명석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눈앞의 파일철을 1호에게 던져버리고 싶었지만, 그래도 명색이 신의 대리인인 자에게 폭력을 행사했다가 어떤 해코지를 당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화를 억누르며 가만히 앉아있었다.

  "다만, 조건을 추가하신다면 응해드릴 수 있습니다."

  명석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어떤 조건이지?"

  "계약을 누설하려는 의도를 가진 그 순간, 즉시 계약과 관련된 모든 기억을 지우고 비밀유지의무 위반에 대한 위약금으로 보험료인 영혼의 1%를 받아가겠습니다."

  어차피 명석에게 영혼의 1%는 별 가치도 없었고, 계약을 누설할 생각도 없었다. 1호의 제안이 썩 탐탁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특약을 통해 이득을 보려는 명석의 계획을 달성하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좋아."

  명석의 대답이 끝남과 동시에 덮여있는 파일철 안쪽에서 하얗고 밝은 빛이 새어 나왔다. 명석이 파일철을 넘겨보니 서명란 바로 앞 페이지에 처음 보는 페이지가 생겨있었다. 

  페이지의 맨 위에는 굵은 글씨로 '계약자와 대리인 간 합의에 의한 특별약관'이라고 쓰여있었고, 그 아래쪽에는 '제1조(기억의 보존) : 계약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계약자의 기억을 삭제하지 않습니다. 다만 계약자가 어떠한 형태로든 계약에 대한 비밀을 지키지 못하거나 지키지 아니할 의도를 품은 경우, 그 즉시 계약자에게서 계약과 관련된 모든 기억을 삭제하며 보험료인 영혼의 1%를 징수합니다.'라고 적혀있었다.

  "문구를 수정하거나 더 추가할 게 있으신가요?"

  "없어."

  "그럼 이제 서명하시겠어요?"

  명석은 고개를 들어 1호를 쳐다보았다.

  "내가 언제 특약을 하나만 추가한다고 했지?"

  1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총 몇 개를 추가하실 생각이신가요?"

  "3개."

  "그럼 앞으로 2개를 더 추가하신다는 거죠?"

  "그래. 이제 2개 남았지."

  "그럼 빨리 말씀해 주시겠어요? 제가 오늘 좀 많이 바빠서요."

  명석은 본인의 생각대로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음을 느꼈기에, 더 고민하지 않고 바로 두 번째 제안을 꺼냈다.

  "두 번째로, 보험금은 반드시 돈으로 줘."

  "어째서죠?"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에 따라서 보상을 해준다며? 그럼 당연히 돈이겠지."

  "인생이 망한 그 시점에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혹은 필요한 가치가 돈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건 알고 계신가요?"

  1호의 말에 명석은 불쾌한 티를 내며 말했다.

  "나도 글자 읽을 줄 알거든? 누굴 바보병신으로 아나."

  "…"

  "나는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가치가 돈이라고 확신을 해. 그리고 그건 세상의 진리고. 가난한 새끼들이나 가족이니 우정이니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지. 하지만, 내가 보상을 받을 때 당신들이 나에게 '사실 지금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건 사람들의 애정이랍니다'같은 개소리를 하면서 돈을 안 내놓을 수도 있으니까. 확실하게 하자고."

  명석의 말에 1호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죠? 지금 우리가 당신에게 사기를 칠 거라 그 말인가요?"

  "보험쟁이 새끼들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가입할 때는 온갖 혜택을 다 줄 것처럼 꼬셔놓고, 막상 보험금을 청구하면 온갖 핑계로 지급을 거절하는 게 보험쟁이 아냐? 내가 호구로 보여?"

  "우리는 절대…"

  "시끄럽고! 그래서 돈으로 줄 거야, 말 거야?"

  명석이 1호의 말을 끊으며 외쳤다. 1호는 입을 다물고 분노에 찬 눈으로 명석을 바라보았다. 명석도 이에 질세라 눈에 한껏 힘을 주고 1호를 쏘아보았다.

  "… 좋습니다."

  특약이 써진 페이지가 하얗게 빛나며 글자가 새겨졌다.

  '제2조(보험금의 지급) : 계약자의 요구에 따라 보험금은 반드시 화폐로 지급됩니다. 한국 원화로 지급되는 것을 원칙으로 하나, 계약자의 위치가 한국을 벗어난 곳일 경우에는 계약자가 원하는 통화로 지급됩니다.'

  "굳이 언급하지도 않았는데, 친절하게도 어느 나라 돈인지까지도 썼네?"

  "골치 아픈 분쟁은 사절이니까요."

  이제 명석이 원하는 특약은 하나만이 남았다. 명석이 생각하기에는 마지막 특약이 가장 큰 난관이었다. 하지만 이미 두 번째 특약까지 밀어붙인 이상, 잘만 한다면 세 번째 특약도 받아들이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세 번째로, 내 인생이 언제 망했는지는 내가 판단하겠어."

  "…"

  명석의 말에도 1호는 반응이 없었다. 명석은 잠시 1호의 반응을 기다렸으나, 1호는 그저 무표정하게 명석을 바라볼 뿐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내 말 들은 거야?"

  "네, 들었어요."

  "근데 왜 대답이 없어? 어?"

  "이 보험의 근간을 뒤흔드는 요구사항이라 어처구니가 없어서요."

  명석이 예상했던 대로 세 번째 특약을 추가하는 건 쉽지 않게 흘러갈 듯 보였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나는 보험쟁이라는 족속들을 전혀 믿지 않거든. 내가 아주 쫄딱 망해서 끼니도 제대로 못 챙기고 시궁창에서 구르며 사는데도 '그래도 아직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남아있으니 당신의 인생은 망한 게 아니에요.'같은 개소리를 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필요하거든."

  "…"

  "생각해 봐. 일반적인 보험은 보험금을 청구하는 기준이 명확하잖아. 안 그래? 근데 너네는 그 기준을 가치 어쩌고 하면서 모호하게 설명하고는 니네 맘대로 판단해 버리는 사기꾼들 같단 말이지. 그러니까 언제 보험료를 청구하고 보험금을 지불할 건지 명확한 기준을 나에게 제시하던가 아니면 내가 판단하게 해 주던가."

  "하지만, 보험금의 지급 기준은 약관에 적혀있다시피, 명석님이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에 따라…"

  명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손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외쳤다.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그게 뭔데 니들 맘대로 판단을 해! 니네 사기 치려는 거 맞지? 어? 씨발 내가 신사적으로 말하니까 우습게 보여?"

  화가 난 명석은 씩씩거리며 숨을 쉬었다. 하지만 1호는 그런 명석의 모습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희는 인생이 망했다고 판단되었을 때만 보험금을 지급해 드릴 수 있기 때문에, 그 판단을 내리는 권한을 명석님에게 위임하게 되면, 인생이 망하지 않았는데도 망했다고 우기실 경우를 걱정할 수밖에 없지요."

 명석은 계속해서 씩씩거리며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1호도 명석도 둘 다 더 이상 말은 하지 않고 눈싸움하듯이 그저 서로를 바라만 보았다. 

  잠시 후 명석은 후 하는 소리와 함께 심호흡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 마치 자신은 원래부터 화를 내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태연한 표을 지어 보이며 진정된 척을 했다.

  "근데 말이 이상하지 않아? 너네들이 이런 걸 만든 건 진짜 사람들이 망할까 봐 걱정돼서 그런 게 아니라 영혼의 1%를 가져가는 게 목적인 것 같은데, 꽤나 번거로운 방법을 쓴단 말이지. 신이라면 그냥 사람들 모르게 영혼을 떼어갈 수도 있을 거고, 굳이 계약을 통해서 가져가야 한다면 보험이라는 번거로운 방법 대신에 돈을 주고 사면 되는 거 아닌가?"

  "영혼의 1%를 가져가는 게 목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에게서 가져가는 건 오히려 목적과는 반대됩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리고 대체 뭐 때문에 영혼을 가져가는 건데?"

  "그건 말씀드릴 수 없어요."

  "그럼 내가 그냥 내 영혼의 1%를 팔겠다고 하면?"

  "그런 계약도 성립될 순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우리가 신의 대리인으로서 계약하는 건 오로지 이 보험을 통해서 뿐이니까요."

  "그럼 어쨌든 이 보험을 통해서라면 내 영혼을 팔 수 있는 거나 다름없네."

  "저희가 영혼을 반드시 돈으로 사는 건 아니지만, 이미 특약 제2조를 통해서 돈으로 지급해 드리기로 했으니 그렇게 보실 수 있겠네요. 하지만 무조건은 아니고 인생이 망했다고 판단될 때…"

  "아니, 그냥 내가 내 영혼을 팔겠다니까? 이해가 안 돼? 내가 망하고 안 망하고 가 중요해? 내가 망했는지 아닌지는 그냥 영혼을 가져갈 시기를 결정하는 거잖아. 망하건 말건 나는 영혼을 주고 너희는 나에게 돈을 주고. 그럼 영혼을 가져가려는 원래 목적이 달성되는 거잖아. 왜 내가 영혼을 주겠다는데 그걸 뭐 인생이 망한 기준이 어쩌니 하면서 얘기를 빙빙 돌려대?"

  1호는 명석의 속셈이 훤히 보였지만, 더 이상 쓸데없는 입씨름을 하고 싶지 않았다.

  "… 그냥, 명석님이 원하는 때에 보험금을 지급해 드릴게요. 하지만 원래는…"

  "그래, 내 인생이 망했을 때만 주는 거라고. 귀에 딱지가 앉겠어. 어?"

  "네. 그럼 그냥 명석님이 원하시는 때에 보험금을 지급해 드리는 걸로 진행할게요."

  1호의 말이 끝나자 특약 페이지가 빛나며 글씨가 나타났다.

  '제3조(보험금의 지급) : 보험금은 계약자가 원할 때 지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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