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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호 Mar 04. 2024

제4관 보험 사기 - 5

  "그럼 이제 서명만 하면 되나?"

  "아뇨, 잠시만요. 마지막으로 절차를 하나 추가할게요."

  "무슨 절차?"

  "특약이 이렇게 많이 들어간 적은 처음이라 보험 약관을 잘 읽으셨으며, 이 특약은 모두 명석님의 요청에 의한 사항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문서에 서명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보고 계신 특약 페이지 뒤에 새로운 페이지가 하나 생겨있을 거예요. 거기에 서명을 해주시면 됩니다."

  명석이 페이지를 넘기자 1호의 말대로 새로운 페이지가 생겨있는 것이 보였다. 새로운 페이지에는 '특약은 모두 계약자 본인의 의향에 따른 것이며, 보험사는 단지 이를 충실히 이행할 뿐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것에 동의합니다.'라고 쓰여 있었고, 그 밑에 작은 서명란이 있었다.

  명석은 이런 동의서를 추가로 작성해 달라고 하는 것을 보면 1호는 명석의 제안을 많이 부담스러워하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는 곧 명석에게는 이익이 된다는 소리였기 때문에, 명석은 본인의 전략이 맞았다는 확신을 가졌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명석이 서명을 하려는 찰나, 1호가 입을 열었다. 

  "명석님, 반복되는 잔소리에 지겨우시겠지만 서명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 얘기를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제 얘기가 끝나고 서명하시면 됩니다. 저도 이러고 싶지는 않지만 절차라서요."

  "뭔데?"

  "같은 말의 반복이지만 절차인지라 어쩔 수가 없네요. 저에게는 고지 의무가 있으니 짜증이 나시더라도 말을 끊지 마시고 끝까지 들어주세요."

  "… 해봐"

  "이 보험은 영혼의 1%를 받고 인생이 망한 사람에게 다시 한번 재기할 기회를 주는 보험입니다. 따라서 인생이 망했을 때만 보험금 또는 보상이 지급되며 이는 다른 무엇보다 우선합니다. 또한 모든 것은 보험 약관에 적힌 내용이 우선시됩니다. 보험약관을 모두 잘 읽으셨고, 이에 동의하신다면 이제 서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뭐 하러 앵무새처럼 했던 말을 또 하는 거야?"

  "…"

  명석은 펜을 들어 동의서에 서명을 했다. 그리고 다음장의 보험계약서 서명란에도 서명을 하고는 펜 뚜껑을 닫아 책상 위에 가볍게 던졌다.

  "이제 된 거지?"

  "네, 계약이 성립되셨어요."

  명석의 책상 위에 있던 파일철이 사라졌다.

  "보험금은 명석님이 원하실 때 지불이 되므로, 보험금 지급을 원하실 땐 이번에 저에게 연락을 주셨던 그 번호로 전화를 걸어 지급요청을 하시면 될 거예요. 보험금은 하늘에서 금이 떨어진다던가 하는 식의 부자연스러운 방법이 아니라, 최대한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사용에 전혀 제약이 없도록 지급될 거고요."

  "그래, 그럼 됐어. 끝났으니까 얼른 가버려."

  1호는 잠시동안 명석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가라니까, 뭐 해?"

  "마지막 서비스로 명석님의 의문에 하나 대답해 드리죠." 

  "어떤 의문?"

  "왜 이런 번거로운 방법을 쓰는지요."

  "아까는 말할 수 없다며?"

  "명석님에게는 말해야 할 것 같아서요."

  "해봐."

  "신은 사실 방관자에 가까워요. 이 세상을 만들어놓고선 그저 관찰만 할 뿐이죠. 큰 수족관에 다양한 물고기들을 넣어놓고 구경하는 거나 다름없어요. 그래서 권선징악이라던가 사필귀정이라던가 하는 건 다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일 뿐이라고 할 수 있죠."

  1호의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미세하게 생기가 도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런 신도 가끔은 인간세상에 개입하기도 하죠. 몇백 년, 혹은 몇천 년에 한 번뿐이지만요. 순전히 변덕으로요. 신은 제멋대로인 아이나 다름없거든요. 하지만 그런 신도 인간세상에 개입할 때는 딱 스스로 세운 하나의 룰을 지키려고 하죠."

  "뭔데?"

  "공평함이에요. 절대 일방적으로 주거나 거두지 않으려 하죠. 인간에게 무언가를 주면 그 대가를 거두려 하고 무언가를 거두면 그에 합당한 보상을 주려하죠. 그래서 우리에게도 이런 보험이라는 형태의 계약으로 개입하게 한 거고요."

  "그래서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데?"

  "신과 개입된 일에 한해서는 인간세상의 진리와는 다르게 거저 주어지는 건 없다는 얘기예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하죠."

  "지금 나 협박해?"

  "아뇨. 그냥 기억만 해두시라는 거예요. 이걸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어디까지나 명석님의 마음이죠."

  "이게 어디서…"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보험금 지급 요청은 전화로 할 테니 이제 영원히 볼일이 없겠네요. 앞으로의 인생에 이 보험을 떠올리실, 아니, 보험금을 청구하실 일이 없길 바랄게요."

  말을 마침과 동시에 1호는 명석의 눈앞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공기가 흔들리거나 소리가 들리지도 않고 그저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인지 명석은 조금 전까지 있었던 일이 진짜 벌어진 일이 맞기는 한지 의심할 정도로 현실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제야 명석은 긴장을 풀고 반쯤은 눕듯이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명석의 계획은 단순했다. 돈에 대한 계산이 빠른 명석은 보험약관들을 읽었을 때부터, 이 보험을 잘 이용하면 꽤나 많은 양의 보험금을 타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인생이 망했을 때 그 사람에게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가치에 따라 보상을 지급한다는 것은 다시 말하자면 많은 액수의 금액이 필요한 그 순간에 보험금을 지급받으면 꽤 많은 이득을 볼 수 있다는 얘기로 보였었다. 그래서 이를 이용하기 위해  기억을 남기고, 보험금을 돈으로 제한하고, 지급 시기를 원할 때 지정할 수 있도록 특약을 건 것이었다. 이제 명석의 계획에서 남은 것은 최대한 돈을 많이 받아낼 수 있는 타이밍을 가늠해서 보험금을 타내는 일뿐이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아직 명석이 미처 생각을 다 끝내지 못한 부분이었다.

  '흠… 어떻게 해야 보험금을 최대한 뽑아먹으려나…'

  보험금을 최대한 타내기 위해선 명석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인 돈이 가장 많이 필요한 상황을 만들어야만 했다. 다시 말하자면 최대한 돈을 잃거나 최대한 돈이 필요한 상황을 만들면 되었다. 하지만 돈을 잃는 것은 명석에게는 너무나 큰 부담이었다. 최소한 신과의 계약이니 돈을 어디 묻어둔다던가 하는 식의 어설픈 행동으로는 돈을 잃었다고 인정받을 수 없을 듯했다. 적어도 그 돈에 스스로는 접근이 불가능하다거나 아예 다른 사람의 명의로 다 옮겨놓는 정도는 되어야 돈을 잃었다고 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명석에게는 돈만이 세상의 전부일뿐, 아무도 믿을 수는 없었기에, 그 방법은 쓰지 않을 계획이었다.

  따라서 명석은 자신의 돈을 실제로 잃기보다는 잃기 직전의 상태로 만드는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일단 최대한 본인 재산을 털고, 대출도 모조리 받아서 회사에 여유가 되는 자금을 투자해 지분을 늘린 다음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회사채를 발행하고 어음을 남발해서 부도 직전의 위기에 몰리도록 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회사와 본인, 둘 다 망하기 직전에 보험금을 수령해서 회사도 살리고 자신의 투자금도 몇 배로 회수해서 재산을 불릴 생각이었다. 그 투자금을 가지고 회사를 다 잡아먹어버리는 것도 생각을 했지만, 귀찮은 경영보다는 재산을 불려 더 떵떵거리며 사는 게 좋다는 생각을 했다. 

  이 방법의 최대 위험요소는 바로 보험금이 제때 적절하게 지급되지 않는 것이었는데, 정작 그 부분은 1호가 공평성을 들먹이며 겁을 준 덕분에 오히려 해소가 되었다. 또한 아주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제한 없이 쓸 수 있게 지급한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지급액이 모자랄 수 있다는 불안 요소가 남아있었지만, 최소한 필요한 만큼을 지불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생각을 가졌다. 지금까지 명석은 살면서 단 한 번도 실패나 패배를 맛본 적이 없었기에 이번에도 잘 풀릴 것이라 생각을 했다.

  그렇게 명석은 본인의 똑똑함에 감탄하며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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