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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호 Feb 28. 2024

제4관 보험 사기 - 3

  집에 도착한 명석은 곧바로 자기 방에 들어가 책상 앞에 앉아서 파일철을 열어보았다. 첫 장을 넘기니 제일 위에 큰 글씨로 인생보험이라 쓰여있었고 그 뒤로 적힌 내용들은 전부 보험에 대한 설명들이었다. 내용만 보면 너무나도 허무맹랑하고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생각했겠지만, 명석은 이미 파일철의 내용들이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신기한 현상을 눈앞에서 목격했기 때문에, 진지하게 읽어보았다. 하지만 명석의 집중력은 얼마 지나지 않아 끊어졌고, 곧 파일철을 덮고는 생각에 잠겼다. 

  당장에라도 명석은 이 사실을 다른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고 싶기는 했지만, 원체 명석이 다른 사람들을 잘 믿지 않기도 하거니와, 대충 훑어볼 때 눈에 들어온 '인생이 망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게 권유'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만약 이 내용이 진짜로 밝혀진다면, 아니 소문이 나기라도 한다면 인생이 망할지도 모르는 명석에게 더 이상 투자하려는 사람이 없을 것이 뻔했고, 오히려 투자 원금을 회수하려는 움직임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명석은 스스로가 매우 운이 좋다고도 생각했다. 본인이 망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미리 알게 되었고, 심지어 보험에 가입하면 그에 대한 대비까지 되는 것이었기에. 대가로 지불해야 하는 영혼의 1%따위는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돈을 위해서라면 그깟 영혼의 일부쯤이야 별거 아닌 것으로 느껴졌다. 심지어 본인이 눈치채지도 못하게 가져간다 하니 더더욱 그랬다.

  곰곰이 생각해 본 끝에 명석은 이 보험을 이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석이 가진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는 결단이 빠르다는 것이었기에 바로 1호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똑똑'

  명석이 휴대폰의 잠금화면을 푸는 순간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왜."

  "잠깐 할 얘기가 있어."

  명석의 아내인 연정이었다. 하지만 명석은 방문을 열지 않고 그대로 자리에 앉아서 외쳤다.

  "아 썅! 내가 여기 있을 땐 방해하지 말랬지!"

  명석이 한껏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하자, 명석의 아내는 조금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아까 아버님한테 전화 왔었어."

  명석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한숨을 쉬었다. 신경질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명석은 문 앞에 다소곳하게 서있는 연정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또, 뭔데? 또 돈달래?"

  연정은 명석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고개를 숙여 바닥을 쳐다보며 말했다.

  "집에 보일러가 고장 나셨는데, 수리는 안되고 보일러를 새로 가셔야 한대."

  "아, 씨발. 영감탱이 뻑하면 돈 달라고 지랄이네."

  "…"

  명석의 거친 언행에도 연정은 아무 말하지 않고 그저 두 손을 모으고 가만히 서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부부라기보다는 주인과 하인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연정은 그런 명석이 무서웠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당신 아버지잖아. 지난주에 나랑 연우가 갔을 때 보니까 보일러가 많이 낡아서 엄청 추웠어. 이 기회에 하나 바꿔드리자."

  하지만 오히려 그 말이 명석의 화를 더 돋웠다.

  "뭐? 너 나 몰래 우리 집에 갔다 왔어? 그것도 연우 데리고? 내가 연우 데리고 가지 말랬지! 갈 거면 너 혼자 가지 왜 애를 데리고 가?"

  "아니, 그래도 연우도 할아버지, 할머니 보고 싶다고 하니까…"

  "너는 애가 해달라면 다 해줄 거야? 그리고 바꿔주긴 뭘 바꿔줘? 니 돈으로 바꾸냐? 어? 다 내 돈 아냐? 근데 니가 뭔데 나보고 바꾸라 마라야?"

  "…"

  "얼어 뒤지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 그래. 뭐 씨발 해준 것도 없으면서 뭐만 하면 돈 달라고 염병이네."

  "…"

  "아 씨발. 지금 일하고 있었는데, 너 때문에 흐름 다 깨졌잖아!"

  "엄마, 아빠 싸워?"

  어느샌가 명석과 연정의 근처에 온 연우가 울먹거리며 말했다. 그런 연우를 본 명석은 황급히 환한 표정을 지으며 두 팔로 연우를 안아 들고 말했다.

  "아이고, 우리 연우. 오늘도 유치원 잘 갔다 왔어? 엄마, 아빠 싸우는 거 아니야. 노래 부를라고 목 푸는 거야. 우리 연우 아빠랑 같이 유튜브 보면서 노래할까?"

  연우는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울상이었지만, 명석이 미소를 지어 보이자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되었는지 표정이 풀어졌다. 

  "…응!"

  "그래그래, 그럼 연우가 가서 티비 틀어봐 봐. 아빠가 가서 유튜브 틀어줄게."

  "응!"

  명석이 연우를 내려놓자 연우는 곧장 거실로 달려갔다. 연우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본 명석은 조용히 연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헛짓거리 하지 말고 애나 잘 봐."

  "… 알았어."


  다음날, 명석은 출근을 하지 않고 자기 방에 앉아있었다. 어제 전화로 1호가 명석의 집에 방문해서 계약을 체결하는 것으로 약속을 했기 때문이었다. 명석은 책상 앞에 앉아 어제 생각했던 내용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시계를 보니 약속시간인 10시까지는 3분 정도 남은 9시 57분이었다. 하지만 아직 현관의 벨은 울리지 않은 상태였다.

  "10시까지 오라니까 왜 안 와?"

  명석은 방에서 나와 현관으로 향했다. 평소 같으면 손님이 왔을 때 연정이 맞이했겠지만, 오늘은 비밀 유지를 위해 평소처럼 친정에 가서 반찬을 좀 얻어오라며 억지로 연정을 집 밖으로 내보냈기에 1호가 오면 명석이 맞이해야 했다. 명석이 현관문을 슬쩍 열어 고개를 내밀고 밖을 살펴보았으나, 엘리베이터는 움직이지도 않는 상태였고,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기에, 거칠게 문을 닫으며 짜증을 내었다.

  명석은 휴대폰을 가지러 본인 방으로 향했다. 1호에게 전화를 걸어 대체 언제 오냐고 따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방으로 명석의 눈에 방 한가운데 서있는 1호가 들어왔다. 

  "뭐야? 어떻게 들어온 거야?"

  1호는 차분하면서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누군지 아실 테니 굳이 사람들처럼 문을 통해서 들어올 필요는 없죠."

  "나참."

  명석은 혀를 끌 차고는 책상 앞 의자로 가 앉았다. 맞은편에 놓인 의자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앉아."

  "아뇨, 그냥 서있을게요. 어차피 곧 가야 할 테니까요."

  명석은 한쪽 입고리를 올리며 피식하고 웃었다. 

  "그래, 뭐 좋을 대로 해."

  "약관은 다 읽어보셨나요?"

  "그래, 대충 다 읽었지. 그러니까 계약을 하자고 전화한 거고."

  명석의 말에 1호는 책상 위에 놓인 파일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맨 뒷장 서명란에 서명을 하시고 저에게 건네주시면 돼요."

  명석은 두 손을 깍지 낀 상태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럴 순 없지. 내가 뭐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으로 보였어? 상대가 아무리 신이어도 이렇게 일방적인 계약을 들이밀면 내가 받아들일 것 같아?"

  약간은 온화한 표정이었던 1호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원하시는 게 뭐죠?"

  "여기 안에 보니까 보험 설계사랑 합의가 되면 특약을 추가할 수 있다고 되어있더라고? 그래서 몇 가지 특약을 좀 걸었으면 해서."

  "… 말씀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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