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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호 Feb 16. 2024

제2관 인생보험 - 8

  상현과 선영이 사귀게 된 바로 그날이었다. 상현은 선영을 바래다주고 집에 가는 길에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기쁘다 못해 약간은 흥분상태였다. 그래서인지 집으로 가는 지하철이 답답하고 덥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상현은 원래 내려야 할 정거장보다 네 정거장 앞에 내려서 걸어가기로 했다.

  초행길이긴 했지만, 역에서 상현의 집까지는 도로를 따라 일직선으로 쭉 가면 되었기에 출구를 나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원래는 천천히 걸으며 공기도 한껏 들이마시고 주변 사람들이나 건물들도 구경하며 갈 예정이었지만, 본인도 모르게 바삐 걸음을 옮겼다. 평소 같으면 거슬리기만 했던 차들의 경적이나 엔진소리도 상현에게는 기분 좋게만 들렸다.

  그렇게 빨리 걷다 보니 어느덧 한강에 다다랐다. 한강을 건너기 위해 다리로 향하는 보행자 통로를 찾아 횡단보도를 건너 다리 위로 올라갔다. 다리를 반쯤 건넜을 무렵 잠시 흥분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다리 난간에 몸을 기대고 잠시 한강을 쳐다보았다. 상현에게는 학자금이나 취업, 그리고 아버지의 일 등 많은 고민들이 남아 있었지만, 그럼에도 상현은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잠시 한강을 바라보며 행복을 마음껏 누린 후, 다시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상현의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고개를 내려 자신의 몸을 바라보려 했지만, 목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눈동자만이 의지대로 움직였고, 그로 인해 시선만 옮길 수 있을 뿐이었다. 갑작스러운 마비증세에 놀란 상현은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자신의 몸에 문제 생겼음을 직감한 상현은 극도의 공포감에 휩싸였다. 하지만 잠시 후, 다리를 건너가던 차들도 도로에 멈춰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춰있는 듯 아무런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저 상현의 심장소리와 숨소리만 이 들릴 뿐이었다.

  그렇게 멈춰있는 상현의 눈에 저 먼 곳에서 한 물체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처음에는 너무 작게 보여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으나, 시간이 지나 그 물체가 상현을 향해 다가옴에 따라,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늘색 재킷과 조끼, 그리고 하늘색 바지의 정장 차림을 한 사람이었다. 조끼 안에는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고, 목에는 흰색의 가느다란 줄무늬가 그어진 녹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까만 머리는 이마가 훤히 보이도록 왁스와 스프레이로 고정되어 뒤로 넘어가있었고, 하얀 피부에 대비되는 짙은 눈썹과 짙은 쌍꺼풀, 그리고 큰 코를 가진 남자였다.

  그 남자가 상현에게 다가올수록 남자의 구두 굽 소리가 점점 크게 울렸고, 상현의 심장소리도 점점 커져만 갔다. 이윽고 그 남자가 상현의 조금 앞에 다다라, 정중한 제스처로 허리를 숙여 상현에게 인사하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2호라고 합니다."

  남자의 목소리는 낮으면서도 차분한, 사람에게 신뢰감을 주기 좋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상현은 이 기묘한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든 상태였다. 눈동자를 굴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에 마음속으로 여러 말들을 외쳤지만, 그 사실을 알리 없는 눈앞의 남자는 허리를 바로 세우고는 상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우선, 갑자기 이렇게 마주치게 된 것을 사과드립니다. 원래는 이런 방법을 쓰지는 않았었지만, 이 방법이 그나마 가장 효율적이라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우선은 제가 이 모든 상황에 대해 설명을 해드릴 테니까. 혼란스러우시겠지만 잠시 30초 정도만 마음을 가라앉히시고 제 얘기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2호라고 소개한 이상한 남자의 말에 상현은 애써 마음을 가다듬어 보려 했다. 어차피 상현이 지금 자기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30초가 지나자 2호가 말을 꺼냈다.

  "굳이 이렇게 시간을 멈추고 상현님의 동작을 막을 필요까지는 없었지만, 제가 일을 하다 보니 정상적인 방법으로 만나서 대화를 하려고 하면 고객분들이 너무 혼란스러워하시기도 하고 질문들을 중구난방으로 마구 쏟아내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기에, 요새는 고객님들을 가만히 멈춰놓고 기본적인 설명부터 드리고 있습니다."

  상현은 2호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지금 본인에게 닥친 상황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제가 고객분들이 자주 묻는 질문들에 대해 미리 답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걸 FAQ라고 하더군요."

  2호는 목청을 가다듬고 설명을 시작했다.

  "우선, 저는 신의 대리인으로 상현님에게 어떤 제안을 드리고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신의 대리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이렇게 시간을 멈춘 것으로 대신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저는 천사도 악마도 아닙니다. 제가 신의 대리인이라고 하면 다들 천사인지 악마인지 그걸 궁금해하더군요. 아무래도 자기에게 해코지를 하러 온 것인지 아닌지가 궁금해서 그런 듯합니다. 저는 그저 신의 의향대로 움직일 뿐이며, 천사와 악마는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일 뿐, 저는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그저 중립적인 입장일 뿐입니다. 좀 더 쉽게 이해하시려면 인간과 개미의 관계를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인간은 그저 재미로 개미를 죽이기도 하고, 그냥 지나가다가 미처 개미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밟아 죽이기도 하고, 때로는 개미에게 사탕을 주며 개미들이 그걸 들고 집으로 가는 모습을 재밌게 관찰하기도 하죠. 그처럼 신도 인간에 대해 별다른 감정이 없고 그냥 본인 마음대로 할 뿐입니다. 그게 인간에게는 행운이 되기도 하고, 재앙이 될 때도 있지만 그건 그냥 운에 따른 것일 뿐, 신에게 그럴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지요. 일단 여기까지 이해가 되셨을까요? 이해가 되셨다면 눈을 한 번 깜빡여 주시기 바랍니다."

  2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상현은 자신의 눈꺼풀이 의지대로 움직이게 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상현은 2호의 말에 따라 눈을 한번 꾹 감았다 떴다.

  "좋습니다. 역시 이해가 빠르시군요. 그다음 두 번째로, 당신은 선택받은 인간도 아니고 특별한 인간도 아니고 특별한 일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며, 저는 당신의 수명을 뺏거나 병을 주는 등의 해코지를 하지 않을 것이고, 반대로 어떤 능력을 내려주거나 행운을 주지 않을 것이며, 미래나 과거, 혹은 근원적인 것들에 대한 질문에도 대답해드리지 않을 겁니다. 다들 제가 신의 대리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마치 본인이 어떤 이야기의 주인공인 것 마냥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들을 하던데,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니며 당신은 신이 지정한 '어떤 조건'을 만족한 인간일 뿐이고 그 조건을 만족하는 사람은 당신 전에도 무수히 많이 있었고, 당신 이후로도 무수히 많을 예정이며, 그 모든 인간들이 지금 당신과 동일한 제안을 받았고, 또 받을 예정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상현은 다시 한번 눈을 감았다 떴다. 그 모습을 본 2호는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순조롭군요. 매우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당신이 '어떤 조건'을 만족하셨기에 드릴 제안이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그 부분까지만 설명을 드리고 목 위로는 자유롭게 풀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가끔 저에게 물리적으로 위해를 가하려는 분들이 있어서 목 위만 풀어드리는 것이니까 오해는 마시길 바랍니다."

  2호는 돌돌 말려있는 두루마리를 하나 꺼내 들어 상현이 볼 수 있도록 상현을 향해 세로로 펼쳤다. 그 종이는 너무 길다 못해 둥글게 말려있는 끝부분이 2호의 발아래로 떨어져 데굴데굴 굴러 상현의 몸까지 굴러왔음에도 다 펼쳐지지 않았다. 2호와 상현 사이에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기에 상현은 그 종이에 쓰여있는 작은 글자들을 알아볼 수 없었지만, 2호가 잡고 있는 종이의 맨 윗부분에 크게 써진 '인생 보험'이라는 글자는 알아볼 수 있었다.

  "여기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는 보험에 가입을 권유드리려고 찾아왔습니다. 바로 '인생 보험'이지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아무에게나 찾아가서 권유드리는 건 아니고, 인생이 망할 가능성이 있는 분들에게만 찾아가서 권유를 드립니다. 물론 망할 '가능성'이기 때문에 반드시 망하는 것은 아니고 본인의 선택에 따라 망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제 경험상 거의 절반정도는 망할 가능성을 피해 가시더군요. 따라서 제가 찾아왔다고 해서 상현님 인생이 반드시 망하는 건 아니라는 얘깁니다. 만에 하나 그럴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어쨌든, 그렇게 만에 하나의 일이 발생하셨을 경우, 이 인생 보험에 가입을 하신 상태라면, 상현님이 가장 중요시 여기는 가치에 맞춰, 상현님에게 가장 필요하고 적절한 방법으로 보상을 해드립니다. 쉽게 이해하시려면 운동선수를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가끔 큰 부상으로 인해 모든 걸 잃고 망가진 운동선수가 몇 년의 노력 끝에 재활에 성공해서 다시 우승을 거머쥐는 걸 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물론 진짜 노력을 통해서 극복한 사람도 있지만, 그런 분들 중 일부는 저희 인생 보험에 가입하신 분들입니다. 그분들의 인생이 완전히 망가졌을 때, 그분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인 대회 우승 또는 기록 경신을 이루실 수 있도록 육체의 회복을 보상으로 지불했던 것입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회복을 지불했을 뿐, 그걸 다시 그 정도로 단련하는 건 본인들의 몫이었지만요. 이처럼 상현님에게도 상현님에게 맞는 보상을 지불할 예정입니다. 다만, 그 보상이 무엇인지는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사람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그때그때 변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그 보상을 알려드리면 오히려 그로 인해 인생이 꼬이기도 하거든요. 우선 기본적인 설명은 여기까지입니다."

  2호는 숨을 쉬지 않는 것처럼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낸 반동인지, 눈을 감고 가슴에 손을 얹고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며 호흡을 다듬었다. 호흡이 진정되자 감았던 눈을 뜨며 말했다.

  "이제부터 목 위로는 자유롭게 풀어드릴 테니 물어볼 게 있으시거나 하고 싶으신 말이 있으시다면 맘껏 얘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2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상현의 머리는 자유로워졌다. 상현은 정말로 목 위는 자유로워졌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헛기침을 하고 혀를 이리저리 굴리고 목도 돌리며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그사이 2호는 풀어헤친 두루마리를 다시 둘둘 말아 바지 뒷주머니에 넣었다.


  2호의 말대로 목 위가 자유로워진 것을 확인한 상현은 2호를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당장 궁금한 게 두 개가 있는데요. 그 보험의 보험료는 어떻게 납입하는 거고, 제 인생이 망했는지는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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