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부터 상현과 선영은 매일 밥을 같이 먹었다. 평일엔 그전처럼 선영은 편의점 도시락, 상현은 폐기된 삼각김밥으로 때웠지만, 이전과 다른 것은 둘이 계속 대화를 나누며 먹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주말에는 상현이 학교 근처로 와서 적어도 한 끼 정도는 같이 먹었고, 둘 다 별다른 일정이 없는 날에는 두 끼를 같이 먹었다. 그렇게 둘의 식사는 방학이 되어도 이어졌고, 주말에 둘이 걷다가 상현이 선영의 손을 잡은 것을 계기로 둘의 호칭은 상현 씨, 선영 씨에서 상현 오빠, 선영이로 바뀌게 되었다.
둘 모두 첫 연애였기에 많은 것이 서툴렀지만, 그럼에도 다투거나 얼굴 붉히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둘 다 워낙 차분하기도 했거니와, 다른 연인들처럼 데이트를 하기보다는 같이 밥 먹고 산책하고 앉아서 조용히 얘기를 나누는 식의 데이트가 전부여서 딱히 다툼이 발생할 여지가 없었다. 둘 다 친구도 없었기에 서로 술이나 친구 문제로 속 썩이지도 않았다. 데이트 비용도 별로 들지 않았기 때문에 금전적으로 마음이 상하지도 않았고, 서로의 생각이나 가치관에 대해 얘기를 나눌 때면 서로 번갈아 말하고 서로 번갈아 들을 뿐이었다.
그렇게 둘의 연애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영은 상현의 가정사를 들을 수 있었다.
상현의 어머니는 상현이 중학생일 때부터 많이 아프기 시작했다. 어느 날부턴가 자꾸 피곤하다며 드러눕는 일이 비일비재했는데, 그저 집안일이 많이 고된 것이라 생각하고 병원도 가지 않고 그냥 집에서 계속 가만히 잠만 잤다. 상현의 아버지 또한 그저 아내의 체력이 많이 떨어지신 거라 생각하고 가만히 놔두고 본인이 직접 집안일도 병행했다. 하지만 어느 날, 상현의 어머니는 각혈을 했고, 부랴부랴 병원에 갔을 때는 이미 위암 3기였다. 수술을 하더라도 5년 생존율이 많아봐야 50% 정도로 위독한 상태였다.
바로 수술날짜를 잡고 입원을 했다. 하지만 입원을 기점으로 상현의 어머니는 급속도로 상태가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마치 그전까지는 암이 아니었다가 의사가 선고를 내린 순간부터 암에 걸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며칠뒤 수술실에 들어갔다 온 상현의 어머니는 누가 봐도 곧 죽을 사람 같은 몰골을 하고 있었다. 의사의 말로는 수술 자체는 성공적이었으나, 워낙 전이도 많이 되어있었고 체력도 약한 사람인지라, 5년은커녕 당장 1년도 기대하기 어려울 수 있다 했다. 항암치료를 계속 받으며 추이를 지켜보는 것 외에는 뚜렷한 방도도 없다고 했다.
상현의 아버지는 그 길로 직장을 그만두었다. 하루종일 아내 옆에 붙어서 계속 간호를 하고 보살펴주었다. 잠도 병원에서 자고 퇴원 후에는 아내 옆을 단 한순간도 떠나지 않았다. 그런 부모님을 보며 상현도 많은 도움을 드리고 싶었지만, 상현의 아버지는 넌 공부나 열심히 하라며 아무 도움도 필요 없다 하시곤 모든 집안일과 간병을 본인이 도맡아 했다. 그렇게 8개월이 지나 가세가 점점 기울어갈 무렵, 상현의 어머니는 상현의 아버지가 옆에서 깜빡 잠든 사이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고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상현의 어머니는 고아였기에 장례는 매우 간단하게 치러졌다. 상현의 친가 쪽 친척들이 조문을 오긴 했으나, 그들은 상현과 상현의 아버지를 위로하기보다는 보험금이 얼마나 나오는지에 더 관심이 있어 보였다. 결국 상현의 아버지는 그들과 크게 다투었고, 결국에는 장례식을 기점으로 모든 친지들과 연을 끊게 되었다.
장례식 이후 상현의 아버지는 다시금 일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백기가 너무 긴 데다가, 때마침 닥친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로 인해 경기는 바닥을 치고 있었기에 취직할 자리를 찾기 쉽지 않았다. 아직 어린 상현의 눈에도 집안의 돈이 마르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결국 상현의 아버지는 급한 대로 공사판에서 잡부일을 하기 시작했다. 애초부터 그런 육체노동과는 거리가 멀었던 사람이라 별다른 기술은 없었기에, 가서 짐을 나르고 청소하는 등의 잡일밖에는 할 수 없었다. 공사장에서 일하게 되면 돈을 꽤 많이 만질 수 있다고 알고 갔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용접이나 미장, 타일 등의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쉬지 않고 일을 했을 때의 얘기였고, 상현의 아버지처럼 아무 기술도 없는 사람은 고작 하루에 7만 원이 전부였다. 하루 7만 원으로는 두 사람이 먹고살기에 빠듯했기에, 상현은 학원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게 되었다. 상현의 아버지는 그런 상현을 어떻게든 잘 키워보기 위해 주말에도 쉬지 않고 나가서 일을 하고 추가 수당을 받을 수 있는 야간 근무도 마다하지 않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된 상현은 본인도 집안 형편에 보태기 위해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어머니가 아플 때만 해도 공부에나 전념하라던 아버지도 이제는 차마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그저 가끔 같이 일하는 동료분들께 막걸리라도 얻어먹고 들어온 날에는 상현을 끌어안고 미안하다고 말하며 우실뿐이었다.
그렇게 몇 년 뒤, 다행히도 상현은 서울 소재의 꽤 괜찮은 대학에 합격할 수 있었다. 입학성적이 딱히 좋지는 않았지만, 어느샌가 상현의 집은 소득 2분위에 위치해 있었기에 다행히도 여러 군데서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다만 용돈이나 자취를 할 비용까지 나오는 것은 아니었기에, 상현은 집에서 2시간 거리임에도 통학을 택했고, 매일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했다. 다른 아르바이트도 여럿 있었지만, 그나마 공부와 과제를 할 여유가 있으면서 벌이도 적당한 아르바이트로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만 한 게 없었다.
1년간의 학교 생활을 마친 뒤 군대에 갈 나이가 된 상현은 두 가지 선택지를 놓고 고민했다. 최대한 군대를 미루는 것과 그래도 돈이라도 더 받는 장교 또는 부사관으로 지원하는 것. 그리고 아버지에게는 말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군대에 남아 직업군인을 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상현의 속셈을 눈치라도 챈 듯, 상현의 아버지는 상현에게 허튼 생각하지 말고 빨리 군대에 다녀오라고 했다. 상현이 말하지 않았음에도 널 군인 시킬 거였으면 대학을 안 보냈을 거라는 말과 함께 상현의 등을 떠밀었다. 상현이 군대에 가있는 동안 돈을 많이 모아 놓을 테니 걱정 말라는 말은 덤이었다.
그렇게 2년간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군생활을 마친 상현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집안의 사정은 딱히 나아진 것이 없었다. 상현에게는 티 내지 않으려 했었지만, 상현의 아버지는 몸이 이미 만신창이였다. 어떻게든 꾸역꾸역 일을 계속 나가고는 있었지만, 예전처럼 일주일 내내 일한다거나 야간 근무를 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요령도 없이 늦은 나이에 육체노동을 시작한 대가로 관절염과 타박상을 달고 살았기에, 계속해서 병원을 들락날락거릴 수밖에 없었다. 한두 달이라도 치료에 전념하면 좀 나았겠지만, 어디 비빌 언덕도 없었거니와 군대에서 돌아올 아들을 위해 계속해서 일을 나가기만 한 것이었다.
보다 못한 상현이 휴학을 하고 일을 하려 했지만, 상현의 아버지는 네가 빨리 졸업해서 취업하고 자립하는 게 자신을 도와주는 것이라는 말로 한사코 복학을 시켰다. 상현은 수강신청이 끝나자마자 바로 학교 근처로 가 아르바이트를 찾았고 그렇게 학교 후문 편의점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런 상현의 가정사를 들은 날 선영의 눈에서는 눈물이 마를 줄 몰랐다. 선영은 그저 상현의 볼을 쓰다듬으며 연신 "우리 오빠 어떡해…"라고만 말할 뿐이었다. 선영의 눈물을 본 상현은 오히려 마음이 덤덤해졌고, 괜히 말했나 하는 생각에 선영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선영은 그런 상현을 끌어안으며 이제 같이 열심히 해서 행복해지자고 위로했다. 상현은 그런 선영이 너무나 고마웠고, 무슨 일이 있어도 선영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둘은 2년여 동안 계속해서 사랑을 키워갔고, 어느덧 상현은 학교 졸업까지 여름방학과 마지막 한 학기만 남은 상태였다. 상현은 취업과 동시에 선영에게 프러포즈를 하고 가정을 꾸릴 계획을 세웠다. 아이도 낳아 셋 또는 네 가족이서 행복하게 살 미래를 꿈꿨다. 그러기 위해선 빠르게 취업을 해야 했고, 여름 방학 동안 어디서 인턴 경험이라도 쌓아야 취업이 원활할 터였다. 그래서 상현은 편의점에 앉아 계속해서 하계 인턴 지원 원서를 썼다.
하지만 첫 원서를 제출한 직후, 상현은 아버지가 사고를 당했다고 연락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