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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호 Feb 05. 2024

제2관 인생보험 - 1

  회의실에서 회의 중 갑자기 울리는 휴대폰 진동에 상현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상현에게 오는 전화라고는 회사에서 오는 전화, 아버지에게서 오는 전화, 여자친구에게서 오는 전화 이렇게 3개뿐이었으며, 회사를 제외하면 일과 중에 전화가 올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상현은 지금 회사에서 회의에 참석 중이니 회사에서 전화가 왔을 리는 없었고, 아버지 아니면 여자친구에게서 온 전화일터였다. 둘 다 어지간히 급한 일이 아니라면 상현이 회사에 있을 때는 전화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상현의 머릿속이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상현은 조심스레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회의실 탁자 밑으로 옮겼다. 부장님의 일대 설교를 듣는 척하다가 부장님이 화이트보드로 눈을 돌린 순간 다급하게 시선을 아래로 돌려 발신자가 누군지 확인했다.

  '세상에 하나뿐인 너'

  여자친구에게서 온 전화였다. 전화가 울리기 시작한 지 시간이 좀 지났음에도, 계속 울렸다. 만약 여자친구가 상현이 회사에 있다는 걸 깜빡하고 걸었던 것이라면, 지금쯤은 끊어졌어야 했다. 그럼에도 계속 울린다는 것은 무언가 급한 일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상현은 여자친구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가 싶어서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부장님, 저 화장실이 급해서 잠깐 다녀와도 될까요?"

  상현의 말에 판서를 하던 부장이 뒤를 돌아보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 씨. 한창 중요한 얘기 중인데. 너 때문에 흐름 다 끊겼잖아 인마! 빨리 갔다 와!"

  "죄송합니다."

  딱히 화면이나 화이트보드를 가릴 위치가 아니었음에도 상현은 허리를 한껏 낮추고 도망치듯이 회의실을 나왔다. 화장실에 들어가 빈 사로를 찾았다. 혹여 옆에 다른 사람들이 전화를 듣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모든 사로가 비어있어서 마음 놓고 통화할 수 있어 보였다.

  "여보세요."

  "오빠, 지금 회사야?"

  "어, 회사지."

  "전화 못 받을 줄 알았더니."

  상현은 전화를 못 받을 거라 예상했음에도 굳이 전화를 한 여자친구의 의도가 잘 파악이 되지 않았다. 빨리 회의실로 돌아가야 했기에 다급한 마음에 여자친구에게 바로 물었다.

  "무슨 일 있어?"

  "…"

  전화 넘어 여자친구는 말이 없었다. 상현은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그리고는 머릿속으로 예상되는 상황을 몇 개 가정하며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했다. 잠시 후 여자친구가 말했다.

  "우리 그만 만나자."

  상현이 조금 전에 머리로 그렸던 상황들 중에 제일 위에 놓였던 상황이었다. 안 그래도 여자친구가 요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의심이 들었었기에 방금전 잠시 마음의 준비를 했었지만 막상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니 마음의 준비가 무색할 정도로 가슴이 두근거리고 마음이 아려왔다.

  "왜 그래, 갑자기."

  "갑자기 아닌 거 알잖아."

  여자친구의 말에 상현은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여자친구가 헤어지자고 하는 게 딱히 이상한 상황도 아니었고 상현도 딱히 붙잡을만한 면목이 없었기 때문에 잠시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쉬운 마음에 여자친구를 잡아보려 입을 열었다.

  "조금만 기다려주면…"

  "충분히 기다렸잖아."

  상현의 말을 가로막는 여자친구의 말에 상현은 말문이 턱 막혔다. 여자친구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오빠 졸업하고 취업해서 연락 잘 안되고 잘 못보는것도 열심히 버텼고, 학자금 대출 갚는 것도, 결혼 자금 모으는 것도 기다릴 만큼 기다렸잖아. 근데 이게 뭐야. 나 벌써 서른둘이야. 계속 언제까지 기다릴 수만은 없어."

  "선영아, 내 사정 잘 알잖아. 조금만 기다려주면 안 될까? 지금 결혼하면 너 고생만 시킬 것 같아서 그래."

  "그 고생 내가 괜찮다고 했었잖아. 대체 언제까지 바보처럼 혼자 희생하면서 살려고 그래."

  "희생이라니. 희생 아니야.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인 거고."

  "내가 볼 땐 희생이야."

  "선영아, 다시 생각해 주면 안 될까?"

  상현의 말에 선영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우리 부모님도 설득 못했잖아."

  "그건…."

  "나 솔직히 우리 부모님이 표현을 잘못했다고는 생각하지만, 당연히 걱정하실만하다고 생각해."

  선영은 상현의 아픈 곳을 찔러왔다. 두 달 전, 선영의 부모님께 인사 갔을 때의 아찔한 기억이 상현을 덮쳤다.

  선영에게 상현의 사정을 대강 전해 들었던 선영의 부모님은 상현을 그다지 반기지는 않았었다. 그럼에도 나름 웃으면서 상현을 대하고 좋은 말과 함께 식사를 마무리하려 해 주셨었다. 하지만 선영의 부모님은 기어이 상현의 현재 상황과 환경을 거론하셨고, 상현의 대답이 영 탐탁지 않았던 선영의 아버지는 결국에는 격앙된 목소리로 상현을 다그쳤다. 결국 그날 상현은 선영의 집에서 도망치듯이 나와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상현은 그날의 일을 애써 잊으려 했지만 선영의 말에 다시금 그날이 생각나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오빠, 나 오빠 좋은 사람인 거 알아. 너무 사랑하기도 하고. 오빠가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나는 같이하고 싶었어. 근데 이제 그러기에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너무 많이 건넌 것 같아. 부모님 때문만이 아냐. 나도 이제는 많이 지쳤어."

  "…"

  "미안해. 오빠도 더 좋은 사람 만나길 바랄게."

  그렇게 선영은 전화를 끊었고, 상현은 그저 멍하니 휴대폰을 바라보며 변기에 앉아있었다. 당장이라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지만, 다시 회의실로 돌아가야 했기에 꾹 참는 수밖에 없었다. 상현은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조금 전의 선영이와의 통화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일단 머릿속에서 지우려 애썼다. 그럼에도 선영이와의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라 쉽사리 일어나질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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