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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호 Mar 14. 2024

흙수저를 위한 나라는 없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There is no country for old men)'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아일랜드의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가 쓴 '비잔티움으로의 항해(Sailing to Byzantium)'이라는 시의 첫 구절이다. 미국의 작가 코맥 매카시는 2005년, 이 문구를 제목으로 한 소설을 발표했고, 이는 곧 2007년에 개봉한 영화로까지 이어진다.

  여기서 말하는 '노인'은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을 뜻하는데,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말은 곧, 세상은 노인처럼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이 예측한 대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표현한다. 그래서인지 소설과 영화에서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혼돈의 화신이나 다름없는 '안톤 쉬거'에 의해서 우후죽순 죽어나간다.

  영화에서는 배우 하비에르 바르뎀이 안톤 쉬거 역을 맡았는데, 정말이지 신들린 사이코패스 연기로 보는 내내 관객들을 불안에 휩싸이게 한다.


영화 내내 행동이 어디로 튈지 몰라서 극도의 공포감을 선사한다.


  이 제목을 패러디한 웹툰이 하나 있다. 바로 '흙수저를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웹툰이다. 일반 직장인이 네이버 도전 만화 항목에 올린 웹툰인데, 고작 7편으로 꽤나 짧은 편이다. 흙수저 집안에서 태어난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1화가 꽤나 유명해져서 많은 사이트들에 퍼졌고, 나도 우연히 그 1화를 보게 되어 알게 된 웹툰이다. (2~7화는 작가가 군생활을 하며 만났던 귀인에 대한 얘기라 사실 제목과도 별로 연관도 없고 딱히 깊은 울림을 주지는 않기에 만약 보게 된다면 1화만 보는 것을 추천한다.)

  웹툰의 제목이 '흙수저를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것을 알게 된 건 얼마 전이었다. 그전에는 그저 여러 사이트들에 업로드된 본문만을 보았기 때문에 제목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 얼마 전에 갑자기 이 웹툰이 생각나서 제목을 찾아보았고, 드디어 제목을 알게 되었을 때 무언가 직관적으로 가슴에 확 와닿는 게 있었다. 그것이 무엇이고 어떤 감정이었는지를 세세하게 풀어서 얘기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제목을 통해서 이 웹툰이 어떤 말을 하려 했던 것인지가 더 잘 이해되었다.

  그날 이후 며칠 동안 이 제목은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맴돌게 되었는데, 하도 머릿속에서 도통 떠날 줄을 모르길래 그 제목이 왜 이토록 나에게 와닿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나는 사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제목에서 노인이 뜻하는 것은 사회적 약자라고 생각을 해왔었다. 그래서 소설과 영화에서 안톤 쉬거에게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이 약자이고 사회는 이를 막아주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소설 내용을 들여다보면 안톤 쉬거에게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 중에는 마피아도 껴있으니 노인이라는 말이 사회적 약자를 뜻한다고 볼 수는 없음에도 왜인지 나는 저 제목을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다.

  어쨌든 나는 본래의 뜻과는 다르게 노인을 사회적 약자라고 생각을 해왔었기에 '흙수저를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흙수저도 이 사회에서의 약자를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아마 평소에도 자본주의가 극단으로 치닫은 한국사회에서 흙수저는 살기가 매우 힘들다고 생각을 해왔었기 때문에 더더욱 저런 방향으로 해석을 한 듯하다.

  그러다 보니 왜 나는 '흙수저는 이 사회에서 약자'라고 생각하게 되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일단 나는 저런 분류 체계에 따르면 흙수저에 속하는 사람이긴 하다.

  어릴 때는 한 칸짜리 방에 네 식구가 누워 살았었다. 바퀴벌레가 내 등을 기어 다니고 집에는 햇빛이 들지 않았으며, 화장실은 공용화장실을 써야만 했고, 씻을 곳이 없어서 엄마가 운영하는 슈퍼 옆에 딸린 수도꼭지를 써서 씻어야 했다. 항상 세 들어 살아야만 했기에 계속해서 이사를 다녔고, 15평을 넘는 집에서 살아보게 된 건 대학교 3학년이 되어서였다. 심지어 그 집도 빌라 전세였고, 내가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을 땐, 다시 15평이 채 되지 않는 집으로 온 가족이 옮겨야만 했다.

  대학생 때는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최대한 학교 가는 일수를 줄이고 남는 날에는 알바를 했다. 군대를 다녀오고선 공부를 열심히 해 성적 장학금을 받기도 했지만 설령 성적이 성적 장학금을 받을 정도에 다다르지 못했더라도 나라에서 정한 소득분위에 따르면 우리 집은 극빈층이었기에 어느 정도 좋은 성적을 내기만 한다면 장학금이 나왔었다. 그리고 항상 돈이 없이 살아왔기에, 여러 가지 경험이라는 게 없었다. 그래서인지 대학에 처음 갔을 때 선배, 동기들의 씀씀이나 브랜드, 음식점, 호텔, 여행지 등에 대한 해박한 지식에 놀라곤 했다.


  물론 나보다 더 힘들게 살았던, 살고 있는 사람들이 참 많겠지만 어쨌든 사회 통념상 나도 흙수저라 하기에는 무리가 없을 듯싶다. 그래서 흙수저된 사람으로서 살아보니 실제로 흙수저가 사회적 약자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보였다.



  종종 사람들은 흙수저가 힘든 건 돈이 없어서 먹지 않고 입지 않고 쓰지 않아야 해서 힘들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저런 것들은 일정 수준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다면 (당장에 집에 쌀이 아예 없는 게 아니라면) 삶에 있어서 불편한 요소일 뿐 많이 힘들거나 그러지는 않다. 실제로 흙수저를 사회적 약자로 만드는 것은 바로 '정보 격차'다. 

  흙수저 들은 어쩔 수 없이 흙수저들 만의 커뮤니티에 속하게 된다. 심지어 먹고살기 바빠서 그 어느 커뮤니티에 끼지 못하기도 한다. 그럼 그들 사이의 정보라는 것은 정말이지 영양가 없는 정보들 투성이다. 어느 집이 바람을 피웠대더라 어디가 싸워서 감방에 갔다더라 등, 삶에 도움이 되는 정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다.  

  반대로 좀 산다 하는 사람들은 소위 말하는 '고급 정보'를 자기들끼리 공유한다. 어디에 투자하면 유망하다더라 어느 세무사가 절세를 잘해주더라 어디 부동산을 사면 좋다더라 등. 그리고 이런 정보의 격차는 삶의 격차를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기회의 격차를 만들어낸다.


금수저와 흙수저의 차이를 보여주는 만화 'On A Plate'


  우리 사회는 생각보다 소외계층이나 약자를 위한 정책들이 많다. 그런데 정작 흙수저 들은 이런 정책들의 혜택을 받을 일이 잘 없다. 일단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요새는 인터넷을 통해 어디에서든 다 접할 수가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이런 정보들을 어느 사이트에서 접해야 하는지 모르기도 하고, 정작 그 정보들을 접하더라도 용어가 어려워서, 서류를 준비하기 힘들어서, 조건이 되지 않아서 혜택을 받지 못하기도 한다. 그리고 애초에 이런 것들을 접해본 적이 없으니 '찾아서 혜택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조차도 떠올리지 못하기 일쑤다.

  단적인 예로 예전에 우리 엄마가 청약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었는데, 엄마는 그때 만에 하나 청약이 되면 그 아파트를 나에게 주겠다고 했다. 돈이야 뭐 대출을 받아서 네가 갚으면 되지 않겠냐고. 하지만 그때 엄마는 '양도세, 증여세'라는 것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다. 살면서 한 번도 그런 것을 고민할 필요가 없었고, 고민할 만큼의 돈을 가져보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정작 아파트 청약이라는 기회가 왔음에도 이 기회를 어떻게 하면 최적으로 살려서 진행하면 될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청약에 당첨이 되면 돈이 되겠거니 하는 막연한 생각만이 있었을 뿐 어떻게 자금을 조달하고 어떻게 절세를 하고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이었다.

  이처럼 수저의 차이는 정보의 격차를 만들고, 정보의 격차는 약자를 더욱 약자로 만든다. 그래서 나는 흙수저가 약자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마 이런 현상은 더욱 심해질 것으로 본다. 요새만 하더라도 금수저 자녀들은 귀신같이 정책과 제도를 미리 파악해서, 일부러 일을 하지 않아 소득 최하위로 분류가 된 다음 임대아파트를 분양받아 부모 카드를 쓰며 외제차를 끌고 다니곤 한다. 하지만 정작 흙수저 들은 이런 정보를 모르기도 하거니와, 당장에 본인이 돈을 벌지 않으면 굶어 죽을 것이기에 직장에 다니며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하고, 그 때문에 설령 저런 정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어쨌든 소득이 있기에 대상에서 제외되기도 한다. 이처럼 흙수저는 노력을 하더라도 계속해서 약자의 포지션을 벗어나기가 쉽지가 않다.


실제로는 출발선 조차도 다르다.


  그래서 나에게 '흙수저를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제목이 많이 와닿았고, 저 제목을 내 나름대로는 '한국은 흙수저를 위한 나라가 아니다', 더 나아가서는 '한국에 흙수저를 위한 것은 없다.'라고 해석하게 되었다.

  이렇게 글을 쓰다 보니 꽤나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흙수저라고는 하지만 나는 그래도 최악까지는 아니었고, 운이 좋게도 괜찮은 직장에 들어가서 어찌 됐든 자립해서 스스로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나도 이렇게나 흙수저에게 가혹한 나라라고 느낄 정도면 다른 사람들이 느끼기에는 얼마나 더 힘들고 절망적 일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과거에 비하면 세상은 계속해서 발전해 왔고 삶의 질도 계속해서 올라갔다. 그럼에도 우리는 예전보다 더 약자를 무시하고 약자를 천대하고 약자를 신경 쓰지 않는 그런 사회를 살고 있다. 물질적으로만 발전했고, 그 물질적인 것조차 고르게 분배되지 않는 듯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사람들 하나하나의 인식과 문화, 그리고 사회적 제도, 법 등 바뀌어야 할 부분이 한두 개가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요새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과연 가능이나 할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부디 '흙수저를 위한 나라'가 있길.



흙수저를 위한 나라는 없다 - 1화_ 흙수저를 위한 나라는 없다. : 네이버 웹툰 (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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