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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욕의 현대사를 안고 있는 모슬포

올레11길(상), 모슬포항에서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나는 모슬봉까지

by 정순동

모슬봉을 정점으로 오르막과 내리막은 묘지의 연속이다. 전반부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길이다. 근대사와 현대사가 녹아 있는 길'라는 제주올레의 안내가 실감난다. 후반부는 신평-무릉 곶자왈에서 자연의 오묘한 이치를 몸으로 느낀다.




하모 3리 버스정류소에서 제주올레 11코스 공식 안내소로 이동한다. 도보 7분 거리다. 하모리 교차로 오거리에 연분홍색 건물이 눈에 띈다. '옛 모슬포 금융조합' 건물이다. 일제강점기엔 식산은행 모슬포지점, 해방 후엔 농협이었다. 지금은 '떳다 노래방'.

옛 모슬포 금융조합 건물(좌), 신영물 터(우)

그 건너편은 모슬포 주민의 애환이 서려있는 '신영물'터. 오좌수 의거의 발생지였고, 한국전쟁 때는 피란민의 식수원이자, 육군제1훈련소 훈련병이 빨래하던 곳이다. 옛 모습은 매립사업으로 사라지고,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못살포'로 불리던 모슬포


하모체육공원 건너편이 모슬진성 터다. 숙종 때 성을 축조하여 남쪽 해안을 경비하던 곳이다. 3면이 바다로 에워싸였고, 북문 위에 초루가 있었다고 한다.

숙종 때 성을 축조하여 남쪽 해안을 경비하던 모슬진성 터

모슬포항 앞바다는 방어, 참돔, 옥돔, 감성돔, 삼치, 우럭, 전갱이 등 다양한 어족이 서식하는 황금 어장이다. 모슬포항은 연근해 어업을 위한 어업 전진기지다.

조선말 국운이 쇠하는 듯하자, 이 황금 어장에 일본 어선들이 드나들며 조업을 한다. 가파도를 점령하다시피 하고 모슬포로 건너와 노략질을 일삼았다. 급기야 신영물 샘터에서 물을 길어 가며 우리 아녀자를 희롱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더는 못 참겠다며 이만송 등 주민 5명이 의기투합하여 일본 해적단과 맨몸으로 부딪쳐 싸운다. 큰 화를 입지만, 조정은 관군을 대신하여 싸운 다섯 명에게 좌수의 벼슬을 내린다. 모슬진성 터에 이를 기린 '오좌수 의거비'가 세워져 있다.

모슬진성 터에 세워진 오좌수의거비

모슬포는 ‘모실(모래) 개(갯가)’의 한자식 표기다. 모래가 많은 바닷가를 의미한다. 남항(운진항) 동쪽에 모래가 아름다운 하모해수욕장이 있다.

4.3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모슬포 경찰서, 국방경비대 제9연대는 제주 남서부 지역 민간인 집단학살의 중심 역할을 한다. 모슬포는 이 시절 ‘못살포’로 불리던 아픈 역사를 안고 있는 곳이다. 모슬포항은 말이 없지만 이 슬프고 어처구니없는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올레는 모슬포 북항으로 이어진다. 물량장 앞에 오광흑돼지집이 있다. 일제 강점기 대정면 어업조합 창고 터다. 후에 모슬포 어업조합이 된다.

모슬포 북항 물량장

모슬포에는 매년 11월 방어 축제가 열린다. 축제 거리를 지나간다. 대방어가 수족관에서 헤엄치고 있다. 철이 지났으니 부시리인지 모르겠다. 방어 벽화도 그려져 있고, 길 옆에는 커다란 대방어 모형이 설치되어 있어 방어의 고장임을 알린다.



육군 제1훈련소의 흔적을 찾아서


삼다도 소식' 노래비. 대정 오일장을 거쳐 산이물 공원으로 간다. 공원 중앙에 '삼다도 소식' 노래비가 있다. 조형물은 제주를 상징하는 해녀, 대정읍을 상징하는 단산과 산방산, 육군 제1훈련소의 상징인 철모를 형상화하여 제작됐다.

제주도라 삼다도에는 돌멩이도 많은데
~
제주도라 삼다도에는 아가씨도 많은데
~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대정읍에 육군 제1훈련소가 생긴다. 단기 훈련을 마치고 전선으로 투입되는 장병들에게 위문공연을 하고 군가를 보급하는 '육군 제1훈련소 군예대'가 지금의 산이물 공원 인근의 한 목조 건물에 간판을 건다.

'삼다도 소식' 노래비. 제주를 상징하는 해녀, 대정읍을 상징하는 단산과 산방산, 육군 제1훈련소의 상징인 철모를 형상화하였다.

'삼다도 소식'은 군예대 건물에서 모슬포 바다를 배경으로 숨비소리를 들으며 만들었다고 한다.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으로 황금심이 노래했다.


산이물 공원. 현무암의 낮은 돌담을 쌓아 만든 자투리 공원이다. ‘깊은 땅속에서 솟아나는 용천수’, 산이물은 마을 형성의 근원이 된다. 지금은 난개발과 환경오염으로 그 가치가 위협받고 있다.

산이물

서산사. 법정사 항일항쟁을 주도한 강창규 스님이 세운 서산사는 돌법당이 눈에 띈다.

서산사 돌법당(위), 창건주 강창규의 기념비(아래 맨 왼쪽)

일몰 명소. 제주도에서 해가 가장 늦게 뜨고 늦게 지는 동일리 마을은 일몰이 아름다운 해안을 가지고 있다. 또 설촌 당시부터 소금밭으로 유명하였던 곳이다. 요즘은 돌고래 관광 선박의 출항 장소로 바다에서 뛰어노는 돌고래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제주도에서 해가 가장 늦게 뜨고 늦게 지는 동일리 마을의 일몰이 아름다운 해안

토끼풀이 융단처럼 바닷가를 덮고 있다. 길가에 핀 큰금계국을 따라가다가 너무 멀리 간다. 재활용 도움센터가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어 인상적이다. 동일 1리 다목적회관까지 갔다가 칠상사로 되돌아온다.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는 동일 1리 재활용 도움센터

바다와 작별하고 노란 금계국이 꽃밭을 이루고 있는 동일리 마을 좁은 길을 들어선다. 주거지와 경작지가 혼재해 있다.

주거지와 경작지가 혼재해 있는 좁은 꽃길을 들어선다.

육군 제1훈련소 정문

올레길을 잠시 벗어난다. 일주서로를 따라 육군 제1훈련소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 대정읍 상모2교차로 좌우측에 17m 정도 간격으로 기둥 2기가 서있다. 한국전쟁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구 육군 제1훈련소 정문이다. 이미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된 ‘제주 구 육군 제1훈련소 지휘소’(국가등록문화재 제409호, 2008년 10월 1일 지정)에 추가돼 ‘제주 구 육군 제1훈련소 지휘소와 정문’이라는 명칭으로 등록됐다.

제주 구 육군 제1훈련소 정문. 대정읍 상모2교차로 좌우측에 기둥 2기가 남아 있다.

정문은 훈련소가 있던 북동쪽과 교회, 병원 등의 부대시설이 있던 남서쪽의 경계가 된다. 훈련소의 내외부를 구분해 준다. 도로를 따라 북동쪽으로 조금 더 간다. 대정고 교차로 앞이 육군 제1훈련소 터다. 지도에는 '제9연대 본부 옛 터'로 기록되어 있다.


왜 '제9연대 본부 옛 터'인가,

그리고 이 땅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내력을 살펴보자. 이곳은 일본군 오무라 해군항공대가 주둔했던 곳이다. 1946년 11월 미 군정은 국방경비대(국군의 전신) 제9연대를 창설하고 오무라 병사를 그대로 쓴다. 시작은 제주도 내 장정들을 모병한 향토연대였다.

육군 제1훈련소 지휘소(국방경비대 제9연대 본부) 터. 지금은 해병 ○○○○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제9연대는 4.3 항쟁을 진압하는 군경 토벌대의 핵심 역할을 한다.

삼일절 발포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1948년 4월 3일 제주도 전역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난다. 향토연대인 제9연대는 무장대에 대한 강경 진압을 반대한다. 김익렬 연대장이 김달삼 무장대 사령관과 평화 협상을 하여 합의를 이끌어낸다.

<이미지 출처 : 제주 4.3평화기념관>

이 합의는 미 군정과 강경파 경찰들에 의해 무산되고 김익렬 연대장은 경질된다. 후임으로 부임한 박진경 연대장은 미 군정의 방침에 따라 강경한 진압에 나선다. 1948년 5월 20일 강경 진압책에 반발한 9연대 병사들이 무더기로 입산하여 한라산 무장대에 합류한다.

다랑쉬굴의 집단학살 현장, <사진 출처 : 제주 4.3평화기념관>

제9연대에 이어 제2연대가 주둔한다.

입산 사건 직후 미 군정은 더욱 강력한 토벌 작전을 전개한다. 미 군정은 이 사건 이후 (향토연대인) 제9연대를 불신한다. 사상적으로도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육지에서 창설된 11연대가 들어온다. 6월 1일 제9연대는 제11연대에 배속된다. 이어 6월 18일 박진경 연대장은 부하의 총에 암살된다.

살해된 박진경 제9연대장 고별식에서 딘 군정장관이 추도사를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제주 4.3평화기념관>

7월 15일 제9연대를 재편성한다. 제11연대 부연대장이던 송요찬 소령이 제9연대 연대장으로 임명된다. 송요찬 연대장은 숙군을 실시하고 좌익 혐의자들을 축출한다. 제11연대는 다시 수원으로 돌아가고, 제9연대는 11월 초토화 작전 시 군경 토벌대의 주축으로 활동한다. 12월 29일, 제9연대는 여순사건을 진압한 제2연대로 교체된다.

무장대로 가장한 제2연대 대원들 <사진 출처 : 제주 4.3평화기념관>

제9연대 터는 다시 해병대의 주둔지가 된다.

4.3의 마무리를 위해 1949년 12월 28일 해병대가 진주에서 제주도로 들어온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9연대 자리는 해병 훈련소가 된다. 제9연대, 제2연대에 이어 주둔한 해병 제3대대는 1950년 7월 16일과 8월 20일 모슬포경찰서가 예비검속한 민간인들을 섯알오름에서 집단학살한다.


1950년 9월 해병대는 모슬포를 완전히 떠난다. 모슬포에서 훈련시킨 신병 3,000여 명은 육지로 이동하여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작전에 투입된다.


해병대가 떠난 후, 육군 제1훈련소가 들어선다.

한국전쟁 전선이 낙동강까지 밀리자 육지에서 신병 훈련할 장소를 찾지 못한 육군은 제주도로 눈을 돌린다. 1951년 1월 해병대가 떠난 옛 국방경비대 제9연대 본부 자리에 지휘소를 정하고, 알뜨르 평원과 모슬포 일대에 육군 제1훈련소를 창설한다.

육군 제1훈련소의 모습들 <사진 출처 : 평화의 터>

육군 제1훈련소(강병대)는 이곳에서 5년간 50만 명의 신병을 양성하여 서울 재탈환 등 반격의 발판을 마련한다. 전쟁이 끝나고, 육군 제1훈련소는 1955년 논산 육군 제2훈련소(연무대)와 통합되어 해체된다. 그 후 제주경비사령부로 존속하다가, 지금은 해병 0000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지휘소, 막사, 의무대 건물과 정문 기둥, 그리고 훈련병들의 종교시설로 이용된 강병대교회가 남아 있다.


남제주 강병대교회

'구 제주 육군 제1훈련소 정문' 앞에서 대정초등학교 쪽으로 100여 m 떨어진 동산에 ‘남제주 강병대교회’가 있다.

훈련병들의 신앙활동을 위해 1952년 9월 공병대가 지은 강병대교회

훈련소 병사들의 정신력을 강화하기 위해 1952년 9월에 지어진 강병대교회는 현재까지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공병대가 제주 현무암으로 벽체를 쌓고 목조 트러스 위에 함석지붕을 얹었다. 강병대교회는 전쟁터로 나가는 병사들이 기도하던 장소이다.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2년 5월 31일 국가등록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었다.

강병대교회 전경(국가등록문화재 제38호, 2002년 5월 31일 지정)

대정읍은 육군 제1훈련소 지휘소(국방경비대 제9연대 본부), 제98육군병원, 29사단 터, 대정초등학교 건물을 사용했던 공군사관학교의 훈적비, 강병대교회, '평화의 터' 기념탑, 알뜨르 비행장과 모슬봉, 섯알오름 예비검속 학살터 등을 연결하는 역사 유적지를 근현대사 학습장으로 보존하고 있다.

옛 육군 제1훈련소 지휘소 건너편에 '평화의 터' 기념탑과 비가 세워져 있다.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나는 모슬봉


다시 일주서로 대정여고 앞 교차로에 선다. 건널목 신호를 기다리며 앞을 본다. 대정읍 들판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모슬봉 정상의 공군 레이더 기지가 가까이 다가온다. 연지가 나타난다. 밭에는 기장이 바람에 잔잔하게 움직인다. ​​


한국전쟁 때 제98육군병원이 있던 곳, 대정여자고등학교 옆을 지나간다. 1964년 대정여고가 개교되면서 50개 병동은 (현재 대정여고 실습실로 사용되는)1개 병동만 남기고 모두 헐린다.

한국전쟁 때 제98육군병원 병동이 있었던 대정여고 교정. 뒤로 모슬봉이 보인다.

이제 경작지를 벗어나 모슬봉 둘레를 도는 산길을 들어선다. 점점 고도가 높아지고 유택(묘지)이 나타난다. 산 자의 주거지 개념으로 보면 단독주택이다. 이제 아파트 단지(공동묘지)가 줄지어 나타날 것을 예고하고 있다.

산길을 들어서면 묘지가 연이어 나타난다.

길섶에 고사리가 군락을 이루고 있고, 고사리 캐던 사람이 종종 길을 잃는 곳이라 조심할 것을 당부하는 펼침막이 걸려 있다.


올레는 얼마 안 가서 정상의 군부대로 가는 도로와 연결되어 산책길의 맛이 감소된다. 게다가 오월의 마지막 날이라 햇볕이 제법 따갑다. 걷는 일정을 잘 못 잡았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숲속은 천연 고사리 군락이다.

때마침 꿀풀을 만난다. 약간 붉은빛을 띤 보라색의 꽃이 줄기 끝에 층층이 모여 달린 꿀풀이 단조로운 올레길에 변화를 준다. 앞으로 나온 꽃잎이 입술 모양을 하고 있다. 꿀풀은 여름에 열매가 성숙하면 잎은 말라죽는다. 그래서 하고초(夏枯草)라고 한다. 꿀풀을 이용해 만든 꿀은 '하고초꿀' 이고.


군시설로 올라가는 도로의 끝 지점에서 숲 속으로 들어간다. 하늘을 가리는 숲이다. 오르락 내리락하지만, 햇빛을 가리니 좀 낫다. 이길이 산불 감시원의 도움을 받아 복원한 '잊혀진 옛길'이다.

산불감시원의 도움을 받아 복원한, 제주올레가 자랑하는 '잊혀진 옛길'은 하늘을 가리는 숲길이다.

질곡의 근현대사를 가로지르며 한 많은 세월을 살다가 이곳에 유택을 마련한 '죽은 자'가 '산 자'의 사는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 영혼을 달래듯 흑자색 꽃이삭을 원추 모습으로 달고 있는 띠의 흰색 털이 바람을 타고 하늘거리며 살풀이춤을 추고 있다.

띠. 원산지는 한국, 동아시아 온대지방 일대다. 볏과의 여러해살이풀이다.

모슬봉을 오르는 길은 그늘이 없다.

시멘트길의 양옆은 묘지다. 높지 않지만 힘이 든다. 이럴 땐 쉬지 않고 땅만 보고 그냥 올라가는 것이 현명하다. 그래야 힘이 덜 든다.


해발 180.5m, 비고 131m의 모슬봉은 전 사면의 경사도가 비슷하다. 생긴 모습이 정확히 좌우대칭 구조를 이루고 있어 전형적인 원추형 화산체이다. 오름의 형국을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이라고 부를 만큼 풍수지리적으로도 좋은 형태를 보이고 있다. 그래서 이곳은 많은 묘지들을 품고 있다.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이라 알려진 모슬봉은 묘지가 많으면, 오르는 길은 그늘이 없다.

모슬봉 주변은 지대가 낮고, 큰 산이나 숲이 없어서 일대를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다. 정상의 출입통제로 절반 만이지만 카메라를 돌려 본다. 단산, 산방산과 그 뒤의 군산은 거의 일직선상에 겹쳐서 보인다. 멀지 않은 거리에 있어서 그 형상은 뚜렷하다. 뒤로 한라산이 중심을 잡는다. 남쪽으로 최남단의 마라도, 가파도가 희미하게 보인다. 올레11길 중간 기착지 쉼터에서의 조망 시각(視角)은 남송이오름부터 송악산 일대까지만 허락한다.

뒤로 한라산이 중심을 잡고 있다. 단산과 산방산, 그 뒤의 군산은 거의 일직선상에 겹쳐서 보인다.
올레11길 중간 기착지, 모슬봉 쉼터에서의 조망 시각은 남송이오름부터 송악산 일대까지만 허락한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모슬망(望)이라고 부르던 대정현 모슬진 소속의 봉수대가 있었다. 이 봉수는 남동쪽의 저별봉수와 북서쪽의 차귀봉수와 교신했다.


전반부는 여기서 마치고, 모슬봉 정상에서 쉬어간다. 실제 정상부는 더 올라가야 있다. 공군 기지가 발걸음을 저지한다. 후반부는 올레11길(하)에서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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