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국이 활짝 피었다. 여름 장마를 알리는 물의 꽃, 수국(水菊)은 수많은 품종으로 개량되어 전 세계에 분포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수구화(繡毬花)라고 한다. '비단으로 수를 놓은 것 같은 둥근 꽃'이란중국 이름에서 그 모습이 연상된다.
수국의 꽃말이 재미있다. 하나의 꽃에 상반된 두 개의 꽃말, '변심'과 '진심'.
수국의 색깔이 변화무쌍하여 종잡을 수 없어 '변심'이라 한다. 물이 부족하면 시들시들하다가도 물을 주면 금세 생기를 되찾는 모습은, 사랑에 목마른 연인이 상대의 '진심'에 감동을 받아 편안해지는 모습을 떠올린다.
수국. 범의귀과에 속하는 낙엽 관목으로, 꽃말은 '변심'과 '진심'이다.
명아주. 보리밭, 호박밭, 기장밭의 이웃에 명아주가 자란다. 명아주과에 속하는 채소다. 어린순을 살짝 데쳐서 나물로 먹는다. 습진 치료와 강장제 효능이 있다. 벌레 물린데 바르기도 하고.
명아주. 한해살이풀로, 꽃말은 '거짓, 속임수'다.
명아주 줄기로 만든 지팡이를 '청려장'이라고 하는데, 다 자란 명아주 줄기는 가볍고 단단해서 지팡이 만들기에 알맞다고 한다. '본초강목'에 '명아주 줄기로 만든 지팡이를 짚고 다니면 중풍에 걸리지 않는다'는 글이 쓰여 있다.
보리가 누렇게 익어가고, 기장이 초록 물결을 이룬다.
초반에 다소 따분한 길이 계속되어 대정고등학교로 가는 길에서 내려갈까 하는 생각도 했다. 모슬봉 정상의 시원한 전망으로 보상을 받고, 수국, 장미, 아왜꽃과 보리가 익어가는 누른 들, 초록 물결의 들을 만나 기분이 전환되는데 다시 복병을 만난다.
초록 물결이 일렁이는 기장 밭의 뒤쪽으로 태앙열 발전소가 보인다.
태양광 발전소다. 전압이 22,900 [V]의 고압으로, 설비 용량이 98.82 [KW]라고 한다. 태양광 발전소가 줄지어 나타난다.
천주교 대정 성지와 정난주 마리아 묘소
정난주는 조선 중엽에 정약현과 이윤혜 사이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천주교도가 된 당대 최고의 실학자 약전, 약종, 약용이 그의 숙부들이고, 조선 천주교 창립 성조 광암 이벽이 그의 외숙부였다.
남편 황사영은 천주교 박해의 실상을 알리는 백서를 작성하여 북경의 구베어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되어 능지처참된다. 이 사건으로 온 가족이 유배되고, 정난주는 졸지에 노비 신분으로 떨어져 제주 관노가 된다. 그는 모진 시련을 신앙과 인내로 이겨낸다.
풍부한 교양과 뛰어난 학식 그리고 굳건한 믿음의 덕으로 '한양 할머니'라 불리며 주위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지만, 평생 관비로 살다가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다.
제주 교구는 수소문 끝에 130년 동안 묻혀 있던 정난주의 묘를 찾아 순교자 묘역으로 단장하고, 1994년 신자들의 염원을 담아 대정 성지를 조성했다.
대정 성지, 정난주 마리아의 묘
정난주가 안고 있는 아들은 추자도에 떨어져 어부 오 씨의 손에 키워진다. 그 후손이 지금도 추자도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계속되는 땡볕에 지친다. 올레 11길을 계속 갈 것인가 마칠 것인가 고민한다.
신평 사거리를 건너,
밭길을 걷는다. 제주도 어디에서나 보이는. 하지만 좀체 모습을 다 드러내지는 않는 한라산. 오늘은 전체를 보여준다. 흰 구름은 더 높이 떠올라 있고, 남송이오름을 앞세운 한라산은 주변의 오름들을 거느리고 인자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여간해서는 모습을 다 드러내지는 않는 한라산이 오늘은 모습 전체를 보여준다.
비밀의 숲, 신평 무릉 곶자왈
10분 정도 걸으면 숲으로 들어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신평 무릉 사이의 곶자왈이다. 이 길은 제주올레에 의해 처음 공개된 ‘비밀의 숲’이고, 사유지를 흔쾌히 개방한 주민들이 있기에 또 다른 감동을 선사한다.
신평 곶자왈 입구에 당산나무가 서 있다. 신평 본향당이다. 신축민중항쟁 때 새로 장두가 된 이재수와 총포로 무장한 40여명의 포수가 출정을 앞두고 ‘일뤠할망'께 제를 올렸던 유서 깊은 신당이다.
신평본향당
곶자왈 들머리에 여러 가지 들꽃들이 올레꾼을 맞이한다. 푸른빛이 도는 짙은 보라색 꽃이 줄기 끝에 달려 있는 등심붓꽃이 자주색 줄무늬와 아랫부분의 노란색으로 포인트를 준다. 노란 괭이밥이 지천에 피어 있다. 마주난 3장의 작은 잎이 옆으로 펼쳐져 있어 얼핏 보면 크로버 잎과 유사하다.
본격적으로 신평곶자왈로 들어선다.
하늘을 가리는 상록수와 이를 타고 오르는 덩굴식물이 천정을 이루고 있다.
곶자왈(Jeju Gotjawal)은 숲을 뜻하는 제주어 ‘곶’과 가시덤불을 뜻하는 ‘자왈’을 합쳐 만든 글자이다. 화산이 분출할 때 점성이 높은 용암이 크고 작은 바위 덩어리로 쪼개져 요철(凹凸) 지형이 만들어지면서 나무, 덩굴식물 등이 뒤섞여 원시림의 숲을 이룬 곳을 이른다. / 위키백과
아내는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빼더니 설명을 시작한다.
"돌밖에 없었던 용암지대의 돌더미 위에 가장 먼저 생겨난 식물은 어떤 식물일까요. 이끼 이전의 식물들이 있는데 여기 이런 것들. 지의류, 땅의 옷이지요."
지의류
"지의류가 자라고 다음에 이끼가 자라고 그다음 한해살이풀, 여러해살이풀이 자라요. 예를 들면 잔디밭을 가만히 놔두면 띠밭이 되고 억새밭이 돼요. 억새까지를 초지라고 해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설명을 이어간다.
"그런데 그 억새밭이나 띠밭에 가시나무가 요렇게 들어가면 거기서부터 숲이라 해요. 곶자왈 전문가들은 목장이나 초지까지 곶자왈이라고는 하지 않지요."
띠밭 뒤로 수위대가 쳐져있다.
"그 가시가 숲을 보호하는 수위대이지요.수위대가 쳐지면 우리 키만 한 관목들이 자라게 됩니다. 다음에 양수림이 자라고. 마지막으로 음수림의 숲이 되어 극상림으로 이어지는 단계를 '숲의 천이"라 하고요. 길을 가다가 가시덤불이 쳐져 있으면 '아 저건 숲을 보호해 주는 수위대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나는 양수림이 뭐고, 음수림이 뭔지 묻는다.
"햇빛을 직접 받는 곳에서 잘 자라는 나무가 양수예요. 소나무, 리기다소나무, 옻나무종류, 사방오리나무, 자작나무 등이 대표적인 양수고. 음수는 햇빛 잘 들지 않는 그늘에서도 잘 자라는 나무를 말하는데, 주목, 비자나무, 참나무 종류 등을 보통 음수라 하지요."
"여기 조그만 나무는 녹나무라 하는데 음수예요. 조금만 지나면 키가 클 거예요. 양수보다 위로 올라가요. 숲에서 가장 나중 나타나는 것을 '극상림'이라고 하고요, 천이의 끝은 잎이 얇고 넓은 음지식물이 음수림을 이루며 숲을 차지하게 됩니다. 양수림인 소나무는 다 사라지고. 더 이상의 식물 군집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게 되고요. 이러한 천이의 마지막 단계를 극상이라고 합니다."
'천이'를 정리하면, 용암 대지나 암석으로 이루어진 불모지에 시간이 흘러 암석이 풍화되어 지의류가 생겨난다. 뒤따라 토양층이 형성되고 이끼류 → 초원 → 관목림 → 양수림 → 혼합림 → 음수림의 순으로 군집이 변화해 가는 과정이다.
"천이 초기에는 물이, 후기 단계로 갈수록 빛이 가장 중요한 환경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어 극상 단계에서는 온대 지방의 경우 대부분 음수림이 됩니다. 그런데 곶자왈에는 음수림과 양수림이 함께 살아가고 있어요. 독특한 현상이지요."
아내의 설명은 여기까지다. 생물 시간에 설명하는 '천이'의 일반적인 현상과는 다르게 제주도만의 특이한 생태환경은 더 이상 설명하지 못한다.
곶자왈 돌더미는 표층에서 심층까지 크고 작은 암괴들로 이루어져 있다. 식물이 자라기에는 토양이 척박하다. 빗물이 땅속 깊이 스며들어 지하수가 된다. 그곳에서 숨골을 통해 수증기가 뿜어져 나와 숲의 기온과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하여 숲을 키운다. 천이의 속도가 더디다. 이런 요인으로 오랫 시간이 흘러서 지금과 같은 숲이 형성된 것으로 본다.
왜 천이가 더디게 일어나는지, 현재의 자연 생태계가 언제까지 잘 보전될 수 있는지 더욱 궁금해진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열대 북방한계 식물과 한대 남방한계 식물이 공존하는 제주도만의 독특한 숲, 제주 곶자왈을 그래서 신비의 숲, 환상의 숲이라 하는가 보다.
띠. 원산지는 한국, 동아시아 온대지방이며 벼과의 여러해살이풀이다.
숲을 잠시 벗어난다. 봄철 학교 소풍 장소로 찾던 , 이 동네에서는 새왓이라 부르던 곳이다. 새왓은 띠밭을 이르는 제주어다. 띠(새)는 11월에 채취하여 2월에 초가지붕을 잇는 소중한 재료로 사용되었다.
정개왓 광장은 메밀밭이다.
정개왓 광장을 지나간다. 메밀꽃이 피어 있다. 정개왓의 왓은 '밭'의 제주어로 옛날에 정 씨 성을 가진 사람이 들어와 곶자왈을 개간하며 생활했던 데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지금은 탱자나무, 개복숭아, 벚나무 등 여러 식물들이 자생하고 있다.
밭을 일구느라 작은 돌멩이들을 골라내어 군데군데 돌담을 쌓아 놓았다. 길섶에 가시가 있는 덩굴식물 줄기가 숲을 보호하고 있다.
줄딸기(아래 왼쪽), 뱀딸기(아래 오른쪽)
줄딸기. 갈고리 같은 가시가 있는 줄기가 올라와 땅 위를 기며 연한 분홍색 꽃을 피우고 있다. 장미과의 산딸기속으로 낙엽 활엽 덩굴식물이다. 꽃말은 '존중, 애정'이다.
뱀딸기. 풀 속에서 뱀이 기어 나올 것 같다. 줄딸기 옆에 딸기 모양으로 붉게 익은 열매가 열려 있다. 산딸기인가 하고 검색해 본다. 양지꽃 보다 큰 노란 꽃이 피는 뱀딸기란다.
길섶에 가시가 있는 덩굴식물 줄기가 숲을 보호하고 있고, 등심붓꽃과 괭이밥이 꽃을 달고 있다.
참식나무. 무릉곶자왈로 들어선다. 황갈색을 띤 누런 잎이 병든 것 같이 축 늘어져 있는 나무가 있다. 새로 돋아나는 잎은 마치 죽은 잎처럼 나고, 가지에는 황갈색 털도 나지만 곧 없어진다고 한다.
참식나무. 녹나무과의 상록 활엽 교목이다. 꽃말은 '못다 한 사랑'이다.
무릉곶자왈에는 참가시나무가 자생한다. 검은 참가시나무, 흰 참가시나무, 붉은 참가시나무 등이 있는데, 이곳은 검은 참가시나무가 주를 이룬다. 흰 참가시나무는 결석에 효험이 있다 하여 약재로 쓰인다.
참가시나무 자생지
때죽나무. 종 모양으로 생긴 흰색의 꽃이 활짝 피어 있다. 노가나무, 야말리, 제돈목, 족나무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 때죽나무이다.
꽃은 한 꽃에 암술과 수술이 함께 나온다. 작은 곤충들이 새싹이나 잎에 집을 짓는 일이 더러 있다. 겉보기에는 꽃처럼 보인다.
때죽나무. 낙엽 활엽 소교목이며, 꽃말은 '겸손'이다.
무릉곶자왈 숲길은 2008년 "제9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숲길 우수상을 수상하였다. 오래전부터 이곳 주민들에게 생명길과도 같은 소중한 길이다. 소 물 먹이던 쇠물통과숯을 굽던 숯가마터의 흔적도 남아 있다.
2008년 "제9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숲길 우수상을 수상한 무릉곶자왈 숲길
벌통을 놓고 양봉을 하고 있다. 벌이 앵앵거린다. 아내는 가까이 가서 벌 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으란다. 손녀 보여준다고. 이 사람이 누굴 죽이려고 하는 소리인가. 천이는 열심히 설명하더니만 벌에 쏘이면 어떻게 되는지 깜박한 모양이다.
벌통을 놓고 양봉을 하고 있다. 벌이 앵앵거린다
인향동 마을.
옛날 큰 구나무(상수리나무)가 있었다 하여 구남이라 불렀다는 구남물 가장자리에 아름드리 팽나무 3그루가 고즈넉한 정취를 자아낸다. 수령이 300년(2그루)과 100년(1그루) 된 정자목으로 읍나무로 지정된 보호수다.
구남물의 팽나무
인향동 마을은 자그마한 산간마을인데 펜션과 민박집, 한식집들이 보인다. 돌담이 아름다워 살짝 집안을 넘어다본다.
돌담이 아름다워 살짝 집안을 넘어다본다.
다음날 올레 12코스를 이어서 걸을 예정이면 마을 앞 (대한로의) 인향동 버스 정류소에서 오늘 일정을 마치는 것이 버스 타기가 좋다. 이곳에 서부 관광지 순환버스가 선다. 820-1, 820-2번이 양 방향으로 다닌다. 다음날 12코스도 여기서 시작하여 무릉외갓집으로 가면 된다.
우리는 대한로를 건너 무릉 오거리에서 중산간서로를 따라 무릉 2리 사무소 쪽으로 간다. 무릉외갓집에서 오늘의 일정을 마친다.
2021년과 2022년 봄, 두 차례에 걸쳐 나누어 걸었던 올레11길을 2022년 가을에 다시 걸었다. 이번엔 하루에 완주한다. 햇빛이 내려 죄이던 늦은 봄에 걸었을 때와 날씨가 선선해진 늦가을에 걸었을 때는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땡볕이 계속되는 전반부 모슬포항에서 신평리 사거리까지는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좋고, 신평ㆍ무릉 곶자왈을 지나는 하반부는 봄의 신록이 상쾌하다.
올레11코스 종착지가 변경되었다. 종착지인 무릉외갓집이 폐교를 개조한제주자연문화체험골이 있던 곳으로 들어갔다. 기존의 무릉외갓집에서 4.3 위령비를 거쳐 300여 m, 5분 정도 더 걸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