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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동 Jul 13. 2023

성안 유배길에서

광해군과 추사를 생각한다.

관덕정, 제주읍성이 있는 동문시장 근처는 조선시대 많은 인물들이 유배되어 귀양살이 한 곳이 있다. 이 일대를 '성안유배길'이라 부르고 있다.


중앙로를 따라 걷기 시작하여 7, 8분 떨어진 제민신협 본점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광해군 적소터

이곳은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 선정을 베풀고, 대동법을 실시하여 백성들의 공납 부담을 덜어 주었던 광해군, 허준에게 동의보감을 편찬하도록 해 백성들이 주위에서 쉽게 약재를 구할 수 있도록 하고, 명ㆍ청 사이의 중립 외교로 평화와 실리를 챙겼던 개혁 군주 광해군이 기득권 세력에 밀려나 유배되었던 곳이다.


'광해군 적소터'라는 귀양살이 하던 곳을 알리는 표지석이 하나 남아 있다. 이 표지석에는 그 후 하멜이 표착했을 때 수용되었던 곳이기도 하다고 알리고 있다. 비록 군으로 강봉 되기는 했지만 임금이었던 광해군을 하멜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은 것 같아 씁쓸하다.  

광해군 적소터 표지석

동문시장으로 들어간다. 김진구의 유배지를 지나간다. 동문시장 쉼터의 대각선 맞은편, 과일가게 바구니들 뒤에 유배지 표지석이 가려져 있다. 한참을 둘러보다가 어렵게 찾는다.


김진구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인경왕후의 오빠며, 숙종의 처남이다. 광성부원군 김만기의 아들이고 서포 김만중의 조카이다. 노론의 핵심인물로 남인의 탄핵을 받고 이곳으로 유배된다. 훗날 아들 춘택과 손자 덕재도 이곳에 유배되었다.

김진구 적거터 표지석

오현길 61(이도일동)에는 기묘사화로 1519년 이곳에 귀양 와서 많은 시문을 남기고 이듬해 사사(賜死)된 형조판서 김정을 추모하여 건립한 규림서원과 오현단이 있고, 동문시장 입구 남수교 근처에 김정의 유배지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규림서원의 김정 유허비(왼쪽), 김정 적거터 표지석(오른쪽)

또 동문시장 인근 농협중앙회 제주시 지부 앞에 구한말 김옥균 암살에 참여했던 이세직의 유배지 '사마제 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채소 노점상의 좌판 뒤에 있어 그냥 지나치기 쉽다. 그래도 찾는 사람이 더러 있는가 보다. 앞에서 표지석을 살피니 노점상 주인아주머니는 사진 찍으라고 고개를 돌린다.

이세직의 유배지 '사마제 터'를 알리는 표지석(왼쪽), 동문시장 남수교(오른쪽)

조선시대 제주에 유배된 이들에 대한 흔적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예나 지금이나 개혁적인 지도자에 대한 우는 인색하다.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기득권 세력이 사회 곳곳에 뿌리를 견고하게 내리고 있기 때문이리라.


정쟁의 희생양이 된 광해군은 시대를 앞서간 왕이었다. 반정으로 그 의미가 퇴색되긴 했지만 국란을 극복하고 국가의 안정을 유지하려고 했던 광해군의 노력은 그 자체로 평가받아야 할 것임에도 위리안치되어 생활하던 곳조차 남아 있지 않다. 제주에 유배되어 온 이 가운데 가장 신분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많은 업적을 남긴 개혁 군주였던 광해군에 대한 후세관심은 민망할 정도다. 추사 유배지나 김정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규림서원과는 달리 광해군에 대한 흔적은 '광해군 적소터'라는 표지석과 첫 기착지 어등포 표지석남아 있다.


한편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다 간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광해군은 역사 교사 1천 명이 뽑은 '다시 보고 싶은 역사 이야기' 1위에 올랐고,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는 광해군을 '대동법 시행, 자주적 실리 외교에 힘쓴 조선의 유일한 개혁 군주로 재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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