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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동 Dec 17. 2023

설경

제주도에 대설특보가 내렸다.

1100 도로 대형 체인, 소형 통제 / 516도로 소형 통제 / 제1산록도로, 명림로, 남조로, 비자림로 소형 체인/도로 통제 상황 확인하기 바랍니다. [제주도]


밤새 내린 큰 눈으로 도로 곳곳이 살얼음판이다. 급가속·급제동 금지, 차간거리 확보 등 안전 안내 문자가 계속해서 들어온다. 한라산을 종단하는 240번 버스를 탄다. 지난번 첫눈 내린 날과 달리 함박눈이 계속 내린다.  영실 매표소 가는 길은 눈으로 덮혀 타이어 자국이 보이지 않는다. 버스가 지나간 흔적을 이내 눈이 덮는다.

대설특보까지 내렸으니, 잔뜩 기대하고 차창을 두리번거린다. 1100 고지에 도착하자마자 기대는 실망으로 변한다. 습지 산책로는 출입금지다. 휴게소 전망대에 올라가 보지만 한라산 자락은 먹구름에 가려 아무것도 안 보인다. 눈보라에 눈 뜨기 조차 불편하다. 고글이 필요한 이유를 알겠다.

눈 덮인 제주조릿대가 길을 막고 있는 경찰을 향해 스크럼을 짜고 몰려오는 시위대처럼 보인다.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기 위해 추위를 잊고 맞잡은 촛불 군중의 함성과 같다.

태고의 아름다움이다. 고요하고 평온해 보이는 동화 속 그림과 같은 곳에 불굴의 도전정신으로 불꽃처럼 살다 간 고상돈의 묘소가 있다. 묘소를 지키는 구상나무는 하얀 솜으로 장식한 크리스마스트리 모양을 하고 있다.

원정대 깃발과 피켈을 높이 들고 “여기는 정상,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라고 외치는 듯 서 있는 고상돈 상은 눈 덮인 날에 더 강렬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산악인 고상돈은 한국인 최초로, 세계에서 56번째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다.

오늘은 외롭지 않다.

아이들이 눈썰매를 타며 환호성을 지른다.

위에 큰 대(大)로 누운 녀석도 있다. 눈을 뭉쳐 던지기도 한다.

어른도 아이도 나무 가지에 핀 눈꽃을 핸드폰에 담는다고 여념이 없다. 

근심 걱정없이 노루 사슴 뛰어 노는 언덕 위에 모인 사람들. 지표로 휘어진 나무. 그 위에 내린 하얀 눈. 한 폭의 그림 같다.

눈이 더 세차게 내린다.

제주도는 해제되었던 대설경보를 다시 내린다.

경찰차에서 안내 방송을 한다. 

"승용차 운행을 통제합니다. 고립될 수 있으니 빨리 하산하십시오."

주차장을 꽉 메웠던 승용차는 어느새 거의 빠져나갔다. 버스가 안 온다. 도로가 미끄러워 정시 운행은 기대하지 않지만 버스마저 통행하지 못할까 걱정된다. 버스 정류소 대기 부스에 갇혔다. 시간이 점점 흐르니 비례하여 걱정도 증폭된다. 그래도 믿는 구석은 있다. 아직 경찰 순찰차가 있으니 설마 우리를 남겨 두고 가겠나.

4, 50분을 기다린 끝에 온 버스에서 반전이 일어난다. 앉을 좌석이 없을 정도로 승객이 많았는데, 우리가 타니 모두 뒷문으로 내린다. 여태껏 하산을 독려하던 경찰은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2023.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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