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모포왜관의 흔적, 고관(古館)

동구 골목투어 4 (수정동)

by 정순동


부산진역과 수정시장


수정동, 초량동 골목투어는 옛 부산진역에서 출발한다. 1905년 말 영업을 시작한 부산진역은 경부선, 경전선, 동해남부선 완행열차의 시·종착역이었다. 1965년 11월부터는 부산역과 초량역이 부산진역으로 통합되었다. 지금의 부산역 역사(驛舍)를 신축하는 동안 부산 본역의 기능을 수행하기도 했.

나에게는 진주의 외가를 오갈 때, 봄철 원동 딸기밭을 오갈 때 이용하던 역이다. 고등학교 때 지리산 종주를 위해 이른 새벽에 구례행 완행열차를 탔던 추억이 남아 있는 부산진역. KTX가 개통되면서 경부선 이외의 여객열차 업무는 모두 부전역으로 이관된다. 여객 업무를 중단하였다. 새 역사(驛舍)를 지어 옛 초량역 방면으로 옮겨 컨테이너 화물 전용역의 기능을 하고 있다. 진역이라고 불렀던 옛 부산진역의 역사(驛舍)는 전시관으로 사용되다가 2024년 2월 어린이 복합문화공간 '들락날락'으로 탈바꿈했다.


옛 역사 정면으로 난 길을 따라 걷는다. 수정초등학교 쪽으로 두 블록 가면 왼편에 재래시장이 나온다.

1930년대에 개장한 수정시장이다. 동구청 들머리 수정극장이 있던 곳(현재는 높은 건물의 오피스텔)까지 길게 펼쳐져 있다. 시장이 밀집해 있는 범일동과 달리 수정동, 좌천동 일대에 하나뿐인 재래시장이다. 부산진역이 여객 수송 역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하고 주변 인구도 점차 줄어들어 시장이 활력을 잃어 가고 있다. 두모포왜관 터라는 지명을 내세워 재기에 힘을 쏟고 있으나 힘이 부친다.

수정시장



최초의 세관, 두모진해관


수정동에는 두모포 만호영이 있었다. 임진왜란 이전 기장현의 두모포에 있던 만호영은 부산진성(지금의 좌천동) 지역으로 옮겼다가 1680년(숙종 6) 지금의 수정동으로 이전한다. 이에 따라 이 지역 일대를 두모포라 하였다. 기장의 두모포 만호영이 있던 지역은 두모리가 되었다.

조선에서 처음으로 근대적인 관세가 부과된 곳은 부산이다. 수정초등학교 앞의 부산진세무서에 1878년 개청한 '우리나라 최초의 세관터' 기념 표지석이 서 있다. 개청 130주년을 맞아 세운 것이다. 당시는 지금의 세관을 해관(海關)이라 불렀다. 설치된 곳이 동래부사 휘하에 있던 두모진(豆毛鎭)이라 두모진해관이라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세관터(현 부산진세무서)

조선은 1876년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할 당시 관세라는 개념이 없었다. 개항하면서 일본에게 무관세 통상을 보장했다. 조정은 뒤늦게 잘못을 깨달았다. 일본과 거래하는 조선 상인에게 세금을 부과한다. 일본 상인에게 세금을 부과할 방법이 없어 짜낸 고육책이었다.

그러자 물품의 가격이 오른다. 일본 상인 135명이 동래부에 항의한다. 조선 정부는 "조선인에 부과한 세금을 일본 상인이 항의할 일이 아니다"며 이를 묵살한다. 일본은 부산항에 군함을 파견한다. '해관 설치는 조약 위반'이라고 무력시위를 벌인다. 조정은 굴복하고 만다. 무관세 무역조항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설치된 조선 최초의 세관, 두모진해관은 석 달 만에 문을 닫는다.



경남여고 교정의 세 '다방'


수정초등학교 담벼락 양지바른 인도에 노인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동구는 노인의 마을이다. 특히 남자 노인은 갈 곳이 없다. 길을 따라 바로 올라가면 경남여고다. 1927년 부산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로 초량동에서 개교하여 1929년 이곳으로 이전했다. 1953년 경남여자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여 현재에 이른 유서 깊은 학교다.

경남여자고등학교

1960년대 언제부턴지 분명치 않지만 경남여고 교정에 다방이 세 곳 있었다. 등나무 그늘 밑의 '등 다방', 은행나무 밑의 '행 다방', 연못가의 '수 다방'이다. 요즘 같으면 커피 자판기가 놓였을 것이지만 실제 차를 파는 곳은 아니었다. 친구들과 이야기 꽃을 피우던 쉼터이자, 교유의 장소였다. 누가 작명했는지 여고생의 재치가 번뜩인다.

경남여고에 근무하는 선생님께 요즘도 '다방'이 있는지 물어본다. 학교 현대화 사업으로 건물을 재건축하는 과정에 사라져 버릴 뻔했던 추억의 등나무는 정문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옮겨 심어져 명맥을 이어 오고 있단다. '등 다방', '행 다방', '수 다방'의 명칭은 시대의 흐름에 밀려났으나, 이젠 70줄에 앉은 노인이 된 졸업생이 추억을 떠올리며 가끔 '다방'을 찾는단다.

2010년 개축하여 옛 교사의 모습은 없어졌지만 정문은 원래 위치에 있다. 정문 앞에 있던 (상호부터 5,60년대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추억의 맘보문구도 건물을 크게 올려 성업 중이다.

맘보문구


두모포왜관


동구청 뒷문을 통해 주차장으로 들어선다. 두모포왜관이 있던 자리다. 두모포왜관이 용두산 초량왜관으로 옮겨갔다. 이전에 왜관이 있던 지역이라 하여 지금도 동구청 일대를 고관(古館) 또는 구관(舊館)이라 한다.

1407년(태종 7)에 부산포(현 좌천동 일대) 부근에 왜관이 있었다. 임진왜란 후 폐쇄되었다가 1601년(선조 34) 절영도에 임시 왜관이 설치되었다. 그 후 1607년 지금의 고관에 두모포왜관을 설치하였다. 1678년(숙종 4년) 초량으로 옮길 때까지 70여 년간 존속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고관공원이 있던 곳(위, 현 동구 국민체육문예센터), 동구청(아래)

지금의 주차장과 동구 국민체육문예센터 근처에 대지공원이라 부르던 언덕이 있었다. 일제가 두모포왜관이 있던 자리에 고관공원을 조성한다. 이 공원에 부산포 개항의 공로를 인정하여 츠에 효고의 초혼비와 오이케 츄스케의 동상을 세운다. 그리고는 오이케 츄스케의 한자 이름을 빌려 와 ‘대지(大池) 공원’이라 달리 부르기도 했다. 해방이 되자마자 츠에 효고의 묘비와 오이케 츄스케의 동상은 철거되었다. 공원도 사라졌지만 대지공원이란 이름은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동구의 인구는 6,70년대까지 20만 명이 넘었다. 80년대부터 감소하기 시작하여 현재는 9만 명을 밑돈다. 시가지 대부분이 구봉산, 수정산 줄기의 경사지대였다. 평탄한 시가지를 형성할 수 없는 지형이다. 평지의 대부분은 일제강점기에 해안매립으로 조성되었다. 60년대에도 매립지는 상당 부분 빈터로 있었다. 일본영사관 건너편 빈터에 부산진시장이 신축 공사기간 동안 임시로 와 있기도 했다.

병원이었던 근대건축물(위), 수정동 성결교회(아래)

발걸음을 고관입구 쪽으로 옮기다 보면 왼편에 2층 붉은 벽돌 건물이 보인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병원을 하던 건물이다. 흔치 않은 근대건축물이라 잘 보존되었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

그 건너편 언덕에 수정동 성결교회가 개축하여 자리를 지킨다. 교회 옆 계단은 외솔배기로 올라가는 가파른 길이다. 교회 옆에 수정4동 동사무소가 있었다. 60년대 초반 흉년이 들자 군사정부는 안남미, 대만미, 미국산 밀가루 등을 배급하였다. 줄 서서 배급받던 장소다. 마을의 중심이 산복도로로 옮아가자, 동사무소도 산복도로변으로 옮겨갔다.



외솔배기를 찾아가다


옛 전차역이 있던 삼거리로 간다. 고관 입구다. 구관 입구라고도 했다. 좁은 길까지 하면 오거리라고도 볼 수 있었던 곳이다. 60년대에는 제법 광장의 역할을 하였다. 비비추미장원, 낙은목욕탕과 이발소, 고관약국, 고태박한의원 등 상가가 모여 있었다. 요즈음은 낙은목욕탕이 있었던 곳 근처에 새 도로가 생겨 육거리인 셈이다.

고관입구에서 수정배수지로 오르는 계단길(위), 수정배수지(아래)

이 동네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작가 조갑상은 그의 소설 <은경동 86번지>에서 '고관 입구'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길을 다 오르자 그의 기억이 가장 옹골차게 모여진 삼거리가 나타났다. (중략) 삼거리라고 했지만 실은 다섯 갈래의 길이 엇갈리는 곳이었다. 그가 살던 동네로 오르는 길과 국민학교 쪽의 작은 길은 차가 다니지 못했기에 동네 사람들은 그냥 '조 아래 삼거리'라고 불렀다. _ 조갑상 《다시 시작하는 끝》, <은경동 86번지>


우리의 발걸음은 수정산 배수지로 뻗어 있는 계단길을 오른다. 이 계단길이 수정1동과 수정4동의 경계다. 이 길을 오르내릴 때 등에 땀깨나 배였다. 내가 살던 집으로 가는 길은 오른쪽 언덕배기로 꼬불꼬불 올라가는 좁은 골목길이 있었는데 찾을 자신이 없다. 수정배수지도 둘러볼 겸, 이 길은 선택한다. 차가 다닐 수 있는 홍곡중로와 만난다. 계단길을 계속 오르면 배수지 정문 앞의 망양로가 나온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 거류민 증가에 따른 물이 부족해진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범어사 정수장에서 생산한 수돗물을 끌어들인다. 수정배수지에서 받아 동구, 중구, 서구 등 도심 지역으로 급수하였다. 현재는 조절지 역할만 한다. 일부는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외솔배기 쌈지공원

우리는 수정4동주민센터 앞 망양로에서 다시 홍곡중로를 따라 내려가다가 왼쪽의 미로로 들어선다. 글로도 사진으로도 묘사할 수 없는 미로가 펼쳐진다. 쓰레기가 버려져 있던 골짜기가 쌈지공원으로 변했다.


골목골목을 돌아 우여곡절 끝에 '나의 본적지' 앞에 선다. 이제 우리(아내와 나)의 본적지이기도 하다. 당시엔 이 일대의 주소가 같은 번지였다. 수정동 9○○번지라는 본적을 가진 사람이 수없이 많을 것이다. 국유지인 산비탈(수정동 9○○번지)에 집을 짓고 살다가 불하받아 비로소 각자의 지번이 생겼다. 새 지번이 각각의 집 주소가 되고, 본적지는 옛 주소 '수정동 9○○번지' 그대로 남았다. 이 일대에 살았던 이들의 본적지는 모두 같은 주소(수정동 9○○번지)다.

나의 본적지 집터

이 동네를 외솔배기라 했다. 큰 노송이 한그루 있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나는 큰 노송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 위치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 골목에 수일 이발관이 있었다. 이발관 앞마당은 동네 아이들이 놀던 곳이다. 용바우, 명호, 호덕이, 종훈이와 함께 빨래 방망이에 신문지로 만든 글러브 끼고 야구를 하였다. 여자 아이들은 고무줄 뛰기, 술래잡기를 하고 놀았다, 당시 이발관 주인의 딸이 이층에 살고 있었다. 만나 봤지만 나를 기억하진 못한다.

약국, 가게가 있던 동네 중심부에 공동수도가 있었다. 산동네는 식수가 큰 걱정거리였다. 시 상수도가 공급되지 않아 대(竹) 수도를 설치하여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공급하였다. 운영 주체가 어디였는지 기억이 분명치 않다. 물표는 맞은편 가게에서 샀던 것 같다.

물 나오는 시간에 맞추어 물동이가 줄을 섰다.

일요일에는 고등학교 다니던 삼촌이 물지게로 몇 동이 나르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막내 동생을 업은 어머니가 물동이를 이고 날랐다.

1960년대 고지대 급수광경 (출처: 부산광역시 동구청 홈페이지)



다시 고관(古館)로를 걷다


공동수도에서 오른쪽 계단을 내려오면 '정란각' 옆으로 나오는데 길이 넓어졌다. 차도가 생겼다. 초등학교 때 점심시간이면 집에 와서 찐 고구마 한 조각(고구마가 매우 컸다)에 동김치 한 모금 마시고 뛰어 내려가던 골목길이 차가 다니는 큰길(수정외솔로)이 되어 홍곡로와 연결된다.


등록문화재 제330호인 '부산 수정동 일본식 가옥'이다. 6,70년대에는 '정란각'이라는 고급 요정이어서 내부를 구경하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은 '문화공감 수정'이란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부산포 일대를 매립하여 부자가 된 일본인 토목업자가 지은 집이다.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1993년) 촬영 장소로 알려져 있다.

정란각(등록문화재 제330호인 '부산 수정동 일본식 가옥')

등하굣길은 다시 고관로와 나란히 가는 초량상로를 따라간다. 옛 중앙초등학교가 있던 자리에 경남여중이 옮겨왔다. 교사(校舍)는 북쪽 높은 곳에, 운동장은 남쪽 낮은 곳에 분리되어 있었다. 전형적인 일본식 학교건물 배치형태를 하고 있었다. 붉은 벽돌 건물은 사라졌다. 건물의 배치도 달라졌다. 신축건물이 들어섰고 교문의 위치도 바뀌었다.

경남여자중학교

중앙초등학교는 1925년 부산제3공립심상소학교로 개교했다. 1960년대에는 전교생이 9천 명에 육박하는 대형 학교였다. 학생수가 점차 감소한다. 베이비붐세대가 입학하면서 갈라져 나갔던 동일초등학교에 역으로 흡수되어 동일중앙초등학교가 되었다.

1963년의 중앙초등학교 전경. 사진 원본에는 9,000건아의 조례 모습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_ 졸업앨범(1964년)

현 경남여중 정문에서 초량상로를 따라 초량 쪽으로 조금만 걸으면 옛 성분도병원 터를 만난다. 성분도병원은 1951년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소속의 자선 병원으로 출발했다. 천주교 부산교구에서 운영하던 공익 의료기관으로 이 지역의 대표적인 종합병원이었다. 알레르기 질환의 치료와 모자 보건 사업을 중심으로 의료 활동을 하였다. 용호동으로 이전하여 성모병원이 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이 지역 출신 유력 정치인 관련 재단이 들어와 있다.

한 블록 위의 초량 베스티움 센트럴베이 아파트 터가 철도관사가 있던 자리가 아닌가 추정해 본다. 철도관사는 일본식 기다란 목조건물이었다. 수정1동과 4동 지역에는 철도와 부두 노동자들이 많이 살았다. 내 친구 호덕이, 명호, 덕규의 아버지도 철도 승무원이었다. 부산역, 부산진역, 초량역과 부두가 인근에 있었기 때문이리라.

이 지역에 또 다른 철도 관련 시설이 있다. 지금의 부산서중학교와 동일중앙초등학교 터에 있던 저수지다. 구봉산, 엄광산, 수정산의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을 저수지에 모아 증기기관차에 급수하였다. 지금도 이 계곡에 '경부철도용지'라는 표지석 4기의 흔적이 남아 있다.

'부산 초량동 일본식 가옥'(현 일맥문화재단)

아파트 담장을 따라 내려간다. 아파트 건물 사이에 일본식 건물이 도드라져 보인다.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부산 초량동 일본식 가옥'(국가등록문화재 제349호)이다. 단층의 일본식 목조 주택인 이 건물은 철도 공사, 부산진 매축 등으로 부를 축척한 토목업자 다나카의 집이었다. 현재는 일맥문화재단이 소유하고 있으며, 문화예술시설로 사용되고 있다.


인창병원 쪽으로 간다. 이 지역에 있던 또 하나의 공익 의료기관, 옛 침례병원 자리다. 침례병원은 미국 의료 선교사이자 의사인 빌 왈레스(Dr. William L. Wallace)의 뜻을 받아 한국전쟁 후 피폐해진 우리 민족을 돕기 위하여 개원한 종합병원이다. 남산역 근처로 이전하였다가 경영악화로 문을 닫았다.


수정동 걷기는 여기서 마친다. 초량동에서 동구 골목투어를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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