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모포왜관을 지금의 용두산 인근으로 옮겼다. 당시 용두산 일대는 왜구들이 놓은 불로 우거진 소나무가 다 타버리고 초지로 변했다. 풀 언덕 목, 초량항(草梁項)이다. 바람이 세고 가파른 비탈진 곳이라 조선 사람들이 살지 않았다. 이 지역에 일본인들이 거주하면서 '초량'이라 하고, 옮겨 온 새 왜관을 '초량왜관'이라 이름 붙였다.
경부선 철도 부설 공사하면서 쌍산(영주동 인근)에 가로막힌다. 경부선을 일본인 거주지인 초량(지금의 용두산 일원)까지 연결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 부산도시철도 1호선 초량역 인근에 '초량역'을 건설하고 경부선 종착지로 삼았다. '초량역'은 '부산본역'이라 불리며 경부선 개통 당시인 1905년 1월 1일부터 영업을 시작하였다. 그 후 부두지구 구획정리사업으로 1965년 7월 23일 폐역 된다. 중앙로 확장공사 때 초량역 역사는 중앙로에 들어갔다.
옛 초량역 앞, 삼거리에 정발 장군 동상이 서 있다.
1974년 동광동에 있던 주 부산 일본총영사관이 일제강점기 경부선의 출발역이었던 초량역터 앞으로옮겨왔다. 이곳에 부산진성을 사수하다 순국한 부산첨사 정발 장군의 동상이 세워진 것(1977년)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평화의 소녀상(위), 정발장군 동상(위 왼쪽), 강제징용노동자상(위 오른쪽)
평화의 소녀상. 2016년 12월 28일, 일본 총영사관 앞에 '평화의 소녀상'이 설치된다. 철거와 설치를 반복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의경이 주변을 지킨다. 사복 경찰이 소녀상 옆에 섰다가 우리를 보고 사진을 찍어 준다.
강제징용노동자상. 2018년에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강제징용노동자상'을 세운다. 이 역시 철거와 설치를 거듭하는 우여곡절 끝에 정발 장군 동상 옆에 자리을 잡았다. 이곳은 항일 거리가 된다.
초량시장
초량시장을 알리는 장승이 서 있다. 초량시장 북쪽 입구다. 초량시장은 1932년 개장한 재래시장이다. 부산역, 상해거리, 텍사스촌이 인근에 있어 유동인구가 많아 예전 보단 못하지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옛 중앙극장 터. 뒤에 높은 건물이 보인다. 해정빌딩이다. 이 자리에 중앙극장이 있었다. 1930년에 개관하여 1980년에 문을 닫은 500석 규모의 외화 전문 재 개봉관이었다. 삽입곡 <Rain drops keep falling on my head>로 유명한 폴 뉴먼과 로버트 레드포드, 캐서린 로스가 주연을 맡았던 <내일을 향해 쏴라>라는 영화를 여기서 봤다.
초량시장 북쪽 입구와 해정빌딩(옛 중앙극장 터)
초량돼지갈비 골목. 건물 오른쪽 길을 따라 부산고등학교 입구 육거리 쪽으로 이동한다.하나은행부터 육거리까지 복개천을 따라 형성된 상가는 유명한 맛집 골목 초량돼지갈비 골목이다. 골목 안으로 들어서니 갈비 굽는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한국전쟁 때부터 돼지갈빗집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하여 돼지갈비골목이 형성되었다. 부두와 피란민의 거주지인 초량동, 수정동 산복도로의 연결 지점에 자리 잡은 갈비골목. 노동자들의 애환을 달래기에는 알맞은 장소로 유명해졌다. 영양가나 가성비 면에서 소주 한잔 기울이며 하루의 스트레스를 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전국적으로 초량 아닌 곳에도 초량돼지갈비의 간판을 흔하게 볼 수 있으니 가히 그 명성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지금 그 복개천(초량천)을 복원 중이다. 새로운 경관의 생태 하천으로 태어날 것으로 기대된다.
초량돼지갈비 골목과 복개천
진보정치인 박기출 외과 터. 육거리 못 미쳐서 초량중로를 만나 부산지방국토관리청 쪽으로 좌회전한다. 부산지방국토관리청 사거리에서 초량시장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아래 사진의 건물 근처에 박기출 외과의원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외과의사 박기출은 강한 인상을 남겼던 진보 정치인이다. 진보당 조봉암과 함께 부통령 출마를 했고, 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민당 공천을 받아 당선되었다. 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한다. 후일 유신이 선포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던 박기출은 위암에 걸려 임종 직전에 귀국하여 사망하였다. 독재 정권의 박해를 받다가 정치적 꿈을 이루지 못하고 떠난 그의 죽음을 시민들은 아쉬워했다.
옛 박기출 외과의원 터(왼쪽), 초량초등학교 담장에 게시된 박기출 사진(오른쪽)
남선창고 터와 백제병원
남선창고터. 부산역 건너편, 초량시장 앞 탑마트 주차장에 붉은 벽돌 담장이 있다. 옛 남선창고 담장이다.
항구가 생기고 경부선이 개통되니 초량은 물류의 중심지가 된다. 1900년 함경도에서 배로 싣고 온 명태, 목재 등을 경부선을 이용해 전국에 운반하였다. 자연히 보관창고가 필요하게 된다. 남선창고는 근대 최초의 물류 창고였다.
초기에는 북선창고라 했다. 경원선이 개통되어 함경도에 북선창고가 만들어지자 이름을 남선 창고로 변경한다. 주로 명태를 많이 보관했다 하여 일명 '명태 고방'으로도 불렸다. 2009년 철거되어 담장만 남아있다.
옛 남선창고 담장
백제병원. 남선창고 터 앞에 국가등록문화재 제645호인옛 백제병원 건물이 있다. 1927년 한국인 의사 최용해가 설립한 부산 최초의 근대식 개인 종합병원으로 5층 서양식 건물이다.
병원이 문을 닫은 후에는 중국 요릿집 봉래각으로, 일본군 장교 숙소로 쓰였다. 해방 후 치안대 사무실, 중화민국 임시 대사관, 예식장으로도 사용되었던 이 건물은 지금도 옛 모습을 잘 보전하고 있다.
몇 해 전까지 일부는 어느 화가의 작업실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지금은 카페가 들어서 있다. 현대사를 지켜본 국가등록문화재에 앉아 커피 한잔 마시고 간다.
옛 백제병원
누군들 잊지 못하는 길
옛 백제병원과 남선창고가 있던 초량시장 앞 주변에는 1, 2층의 일본식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옛날 건물을 헐고 속속 고층 건물이 들어서는데도, 몇 번의 수리를 거치면서 묵묵히 거리를 지키고 있다.
'우리 전당포', '이바구길 사진관', 한 지붕 밑에 요즘은 보기 드문 간판이 붙어 있다. 출입문과 안이 들여다 보이는 큰 창문은 고쳐진 것으로 보이지만 대체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6, 70년대를 무대로 하는 영화의 세트장을 옮겨 놓은 것 같은 거리 풍경이다.
비록 영어가 함께 쓰인 간판이 달려 있지만 '영빈이불'집도 전형적 일본식 건물의 자태를 간직하고 있다. 지붕 밑에 빗물받이, 이층에 크게 내어놓은 창문 위에 4개의 작은 창문과 그 위의 비를 막기 위해 처마 같이 얹어 놓은 '눈썹 지붕', 멋을 낸 원형 창문이 이채롭다.
작가 조갑상의 단편소설 <누군들 잊히지 못하는 곳이 없으랴>는 이 거리를 주 무대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파리의 독립운동가 서영해의 흔적을 찾아서
부산역 바로 맞은편의 청관거리(상해거리)로 간다. 이곳은 120여 년 전 중국 영사관이 들어서면서 중국인들이 모여들었던 곳이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2003년)를 이곳에서 촬영했다. 사진 속의 골목 끝은 텍사스촌인데 요즘은 러시아 선원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청관거리. 신발원은 만두가 유명하다. 점심시간이 지났는데도 문 앞에 줄 선 사람들이 보인다. 원향재는 짜장면과 오향족발이 맛있기로 이름이 났다. 건너편 화교학교 담장에 삼국지 인물들이 소개되어 있다.
청관거리, 서영해의 출생지
초량 근대역사 갤러리를 들린다. 옛날보다 많이 시들해진 청관거리를 안쪽 깊숙이까지 들어온 것은 유럽 무대에서 외교로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알린 임정의 막내 서영해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다.
개항을 하면서 신문물과 함께 감염병도 묻어 들어왔다. 1920년 콜레라가 창궐하여 사망률이 50%를 웃돌았다. 콜레라에 특효인 약을 처방하여 유명해진 한의사 서석주의 8남 2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난 서영해. 17세에 좌천동 출신 독립운동가 장건상의 도움으로 상해로 망명하여 파리 유학길에 오른다.
프랑스에서 정규 교육을 받고 언론사를 설립하여 활발한 저술활동과 외교활동을 한다. 독립의 대의를 알리고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던 서영해.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하자 일본의 밀고로 체포된다.
그 서영해의 출생지인 동구 초량동 605-1번지. 현재는 락천각이라는 중화요릿집이 들어서 있다. 이 일대의 땅이 부친인 한의사 서석주 옹의 땅이었으나 택지 분할로 현재의 위치만 남아 있다. _ 정상천 《파리의 독립운동가 서영해》, 산지니, 28쪽
느리지만 삶이 즐거운 곳, 이바구길
소림사.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재일동포 거류민단 소속 청년들이 참전을 위해 귀국한다. 재일학도의용군은 출정하기 전 소림사에서 대기하였다. 전쟁이 끝나고도 집(일본)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소림사에서 생활하였다. 정전 후 소림사로 돌아온 재일학도의용군의 태반은 손목이 없거나 다리를 저는 부상자였다. 일본은 이들의 입국을 거부한다. 군번도 계급장도 없이 전장에서 싸운 이들은 집에 돌아가지도 조국의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세월의 뒤안길에서 잊혔다.
소림사(왼쪽), 초량교회(오른쪽)
초량교회. 한강 이남의 첫 교회다. 1892년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윌리엄 베이드가 사택 사랑방에서 선교를 시작하여 초량교회로 발전하였다.
동구 인물사 담장. 건너편 초량초등학교 담장에 근현대사를 이끈 동구 출신 인물을 회고하는 동구 인물사 담장을 꾸며 놓았다. 독립운동가 장건상, 정치인 박순천, 앞서 이야기한 박기출, 성산 장기려 박사, 시인 유치환, 시인 김민부, 이 학교 졸업생인 가수 나훈아, 개그맨 이경규 등을 소개하고 있다.
168 계단. 여기서부터 이바구길이 시작된다. 부산 근현대사의 씨앗이 동구 곳곳에 이야기꽃으로 피어난다. 바라보기만 해도 까마득한 계단길이 앞을 가로막는다. 168 계단이다. 겨울인데도 숨이 턱턱 막힌다. 오르다 돌아본다. 탁 트인 부산항이 한눈에 들어온다. 시가지를 내려다보면 부산항과 부산역을 오가는 사람들의 삶과 흔적을 느낄 수 있다.
168 계단은 산복도로로 올라가는 가장 빠른 길이다. 노약자가 고지대를 쉽게 이동할 수 있게 동구 인물사 담장에서 도보 3분 거리인 100미터 떨어진 지점에 모노레일이 설치되어 있다.
김민부 전망대
168 계단 중간쯤에 <기다리는 마음>의 작사가인 김민부 시인을 기린다.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마음의 시 정서를 가장 잘 음미할 수 있는 곳이다. <기다리는 마음>은 아는데 '김민부'는 모르는 사람이 많다. 부산고 2학년 때 첫 시집 《항아리》를 펴내고, 3학년 때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균열>이 당선되어 시조 시인으로 등단한 천재 시인 김민부. 그는 부산 MBC PD로 그 유명한 <자갈치아지매>를 연출한 방송작가이기도 하다. 서울 MBC, 동아방송, TBC 등에서 방송작가로 활동하다가 뜻밖의 사고로 요절한다.
동구 현대 인물사 담장에 게시된 '시인 김민부'(위 왼쪽), 김민부 전망대(위 오른쪽), 전망대에서 본 북항 일대(아래)
부산항 북항. 전망대에서 부산항을 바라본다. 북항대교가 정면에 보인다. 북항 재개발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모노레일 위쪽 승강장 부분에 또 다른 전망대가 있다. 김민부 전망대와 각도가 다르다. 같은 위치를 찍어 비교해 보자.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당산을 지나 산복도로 버스 정류소로 간다. 쉬어 가란다. 정류장 긴 의자에 전기패널 온돌이 설치되어 있다. 바닥이 따뜻하다. 정류소 바로 밑이 이바구 공작소다.
이바구공작소는 해방공간, 한국전쟁, 월남 파병의 역사와 산복도로 이야기를 수집하여 담아내는 생활자료관이다. 부산항의 과거와 미래를 살펴볼 수 있다.
이바구 공작소(왼쪽), 금수사(오른쪽)
금수사. 망양로를 따라 이바구길은 이어진다. 왼쪽으로 충혼탑이 있는 중앙공원 녹지를 휘감아 돈다. 중학교 때 송충이 잡으러 왔던 금수사다. 입이 뻘겋게 되도록 버찌를 따먹던 기억이 난다. 60년대에는 금수사 근처만 숲이 우거지고 나머지는 민둥산이었다. 임진왜란 끝 무렵, 사명대사가 강화사로 왜국으로 건너가면서 배를 기다리며 하루 밤을 묵었던 곳이다. 수도처로 좋은 곳이라 하여 절을 지었다고 한다.
장기려기념관
"장기려 박사께서 둘째 아들과 함께 부산으로 피란 와서 처음으로 거주하던 곳이 초량이에요. 정확하게는 요 아래 목욕탕 자리인데, 협의가 안되어 이곳에 기념관을 마련했어요."
'더나눔센터'는 성산 장기려 박사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이다. 생전에 사용하던 물건과 의료 복지의 기틀을 마련한 그의 행적을 살펴볼 수 있다.
장 박사는 대량 간 절제수술을 성공하여 간암환자를 완치시킨 '간 외과학'의 선구자다. 뿐만 아니라 의료보험의 효시인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하여 평생 가난한 이웃에게 나눔을 실천하였다.
'가난뱅이 종합병원장'. 그는 수입의 일정액을 매달 '남을 돕겠다고 약속한 일'에 썼다. 세상을 하직하는 날까지 복음병원 옥탑방에서 생활했다. 평생 집 한 칸도 없었다. 평소 그는 "정년퇴직한 후에도 복음병원 명예원장으로 그 사택에 살면 족하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장기려기념관(위), 동구 현대 인물사 담장에 게시된 '의사 장기려'(아래 왼쪽), 성산삼훈(아래 오른쪽)
유치환의 우체통
유치환의 우체통이 설치된 전망대에 선다. 1층은 야외 공연장, 2층은 시인의 방 및 갤러리, 3층은 전망대로 구성된 청마를 기리는 장소다. 청마 유치환의 <행복>을 읽는다.
"사랑하는 것은 /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 오늘도 나는 /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 뵈는 /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_ 청마 유치환, <행복>에서
그리운 이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 이곳의 우체통에 담은 편지는 1년 뒤 수취인에게 전달된다.
동구 현대 인물사 담장에 게시된 '시인 유치환'과 산복도로 유치환 우체통
청마는 요 아래에 있는 부산고등학교에 재직하면서 부산고등학교 교가를 작사했다. 경남여고 교장을 2차례 지냈고 동구에서 뜻밖의 사고로 생을 마감하였다.
비겁한 자여, 그대 이름은 방관자
부산고등학교. 1913년 일본인 학교인 부산공립중학교로 설립되었다. 8·15 해방 후 1945년 10월 재개교하여 1950년 부산중학교와 부산고등학교로 분리된다. 2003년 현대화 재개발 사업으로 새 건물이 들어섰다. 교가비가 교정에 서 있는 것이 이채롭다. 유치환 작사, 윤이상 작곡의 품격 있는 교가를 가진 학교다.
부산고등학교 교정
1960년 3.24 의거 기념비
또 하나의 기념비가 서 있다. 1960년 3.24 의거 기념비다. 부산고등학교는 4.19 혁명 당시 부산 지역에서 가장 먼저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했다. "동포여 잠에서 깨라! 비겁한 자여, 그대 이름은 방관자니라"를 외치며 부산 시위의 방아쇠를 당겼다.
육거리 못 미쳐서 맛집 초량 불백 거리가 있다. 옛 청산학원, 초량극장, 초량연탄이 있던 길을 따라 초량역으로 내려간다. 부산도시철도 초량역에서 동구 골목투어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