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산문 <여행의 이유> 독서 후기
‘프로 Why러’인 나는 뭘 하든지 이유가 필요하다.
여행의 계절에, 여행의 이유를 찾는 건 어쩌면 숙명처럼 풀어야 할 숙제다.
몸과 마음이 가벼워진 탓일까.
인터넷을 검색하는 순간부터 이미 나는 여행지에 가 있는 듯 흥분을 주체할 수 없다.
따뜻한 동남아로 갈까, 아니면 좀 더 멀리 유럽으로 가볼까?
그런데 왜 우리는 여행을 떠나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설레는 걸까?
오래전 읽었던 김영하 작가의 산문집 <여행의 이유>가 문득 떠올랐다.
나는 극한의 ISTJ,
여행을 떠나기 전 계획을 촘촘히 짜는 것을 좋아한다.
시간을 10분 단위까지 쪼개야 하고,
목적지까지 이동해야 할 거리는 네이버 지도 검색을 해서 km, 소요시간을 기록한다.
맛집 정보를 검색하는 것도 빼먹지 말아야 한다.
까다로운 동행인들의 식성을 고려하여 육, 해, 공 종류에 따라 서, 너 가지는 마련해 두어야 한다.
그러나 계획대로 되는 여행은 그리 많지도 않을뿐더러 기억이 오래가지도 않는다.
오히려 계획하지 않았던, 기대하지 않았던 것으로부터의 '뜻밖의 발견'은 강렬하게 각인된다.
그래서 행운의 여신이 나의 빈 공간을 찾아들 수 있도록 여백을 남겨두어야 한다.
저자 김영하는 이러한 경험이 놀라운 깨달음으로 다가올것이라 말한다.
"우리의 내면에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강력한 바람이 있다.
여행을 통해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과 세계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
그런 마법적 순간을 경험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22p)"
어쩌면 내가 짠 여행 계획은 어쩌면 '플랜 B'에 불과하다.
오늘은 어떤 계획되지 않은 '뜻밖의 발견'이 나를 가득 채우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까?
비행기에 몸을 싣고, 휴대폰마저 꺼지는 순간,
비로소 저 멀리 땅 아래의 일상 속의 나와 분리된다.
그동안 나를 가두고 괴롭혔던 곳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자유로움을 느끼게 된다.
비록 금세 다시 되돌아가야 할 곳이긴 히지만,
낯선 땅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는 오직 '지금 여기' '이 순간'에 나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낯선 언어와 문자를 해독하고,
공항에서 숙소로 이동하기 위해 미리 예약해 두었던 교통편도 찾아야 하고,
혹시라도 목적지를 벗어날까 불안한 눈초리로 주변을 살펴야 한다.
이때만큼은 과거나 미래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우리의 현재를 위협하는 이 어두운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하는 동안 우리는 일종의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된다.
낯선 곳에서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먹을 것과 잘 곳을 확보하고 안전을 도모해야 한다.
오직 현재만이 중요하고 의미를 가지게 된다. (중략)
여행은 우리를 오직 현재에만 머물게 하고, 일상의 근심과 후회, 미련으로부터 해방시킨다. (110p)"
여행은 그렇게 나를 단순하게 만든다.
지금에 더욱 충실하게 만드는 마법은 여행이 끝날 때까지 지속된다.
비록 한 여름밤의 꿈과 같을지라도 지금의 나를 충만케 하는데 집중해야 한다.
가끔은 내 고통과 슬픔에 함몰되어
이 세상에 나 말고도 수많은 사람들이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잊을 때가 있다.
그러나, 인생이 고통뿐이라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낯선 여행지에서는 내가 가치 있는 존재임을 발견하게 해주는 기회이기도 하다.
삶의 방식이 다를 뿐, 결국 사람 사는 건 거기서 거기라는 것도 깨닫기도 한다.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 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51p)"
"우리는 뭔가를 하거나, 괴로운 일을 묵묵히 견뎌야 한다.
여행자는 그렇지 않다. 떠나면 그만이다.
잠깐 괴로울 뿐,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는다.
그렇다. 어둠이 빛의 부재라면, 여행은 일상의 부재다. (203p)"
오래전 뉴욕 맨해튼 횡단보도에서 빨간 신호등을 아랑곳하지 않고 건너가던 뉴요커들을 보고선,
내가 훨씬 더 도덕적 우월한 존재임을 자각하게 되었던 경험이 떠오른다.
'세상에, 뉴욕에선 횡단보도에서 파란불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라니깐!'
그렇기에 여행은 나의 가치를 발견하는 방법이기도 한 것이다.
사진이나 영상 속에서 보던 그 장면이
막상 눈앞에 닿으면 예상보다 덜 감동적일 때가 있다.
뉴욕의 월스트리트가 그랬고, 베이징의 만리장성이 그랬다.
요르단의 페트라 알카즈네가 그랬고,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가 그랬다.
물론 가보지 못한 세상의 숱한 아름답고 기이한 풍광들이 있겠지만,
감흥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몇몇 장면들이 꿈속에서 그리던 기대를 허망하게 대체해 버린다.
상상은 상상일때가 가장 아름다운 법이다.
그렇기에 역설적이게도,
지금 내가 사는 곳을 외국인 여행자의 생경한 눈빛으로 바라보면
모든 것이 신비로울 것이라는 생각도 가능하다.
"독자와 여행자 모두 내면의 변화를 겪는다. 그게 무엇인지는 당장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일상으로 복귀할 때가 되어서야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내가 살던 동네가 다르게 보이고 낯설게 느껴진다.
주말 홍대 앞의 인파가 새삼 무시무시하게 느껴지고,
서울이 거대도시라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지하철이나 거리에서 다른 사람의 몸을 치고 나가는 게 전과는 달리 불쾌하고,
한강은 평소보다 더 드넓어 보인다.
식당이 밀집한 거리를 지나갈 때면 한국 음식 특유의 향신료 냄새가 코를 찌른다.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각들이 되살아난다. (205p)"
내가 사는 이곳도 사랑스럽고 귀한 곳이었다.
신은 내가 머물고 있는 이곳에 잠시 여행을 다녀오라고 보냈다는 것을 깨닫는다.
천상병 시인은 이 세상의 삶을 '소풍'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나의 일상만큼 귀하고 아름다운 여행지는 없었다.
이제, 내가 다시 여행을 떠나야 하는 이유는 분명해졌다.
여행을 떠나기 전 계획을 짜면서 공허한 마음에 새로운 것을 채워 넣는 재미가 있다.
여행지에 가서는 낯선 사람들과 그 세상이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여행을 다녀와서는 내가 머물고 있는 이곳도 신이 나에게 선물한 여행지임을 깨닫게 하는 재미가 있다.
저자 김영하는 결국 여행을 통해 일상의 의미를 발견하는데 있다고 강조한다.
"우리는 이 안전하고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한다.
거기서 우리 몸은 세상을 다시 느끼기 시작하고, 경험들은 연결되고 통합되며,
우리의 정신은 한껏 고양된다.
그렇게 고양된 정신으로 다시 어지러운 일상으로 복귀한다.
아니, 일상을 여행할 힘을 얻게 된다,라고도 말할 수 있다. (206p)"
그럼, 이유를 따지는 것은 그만하고,
자, 이제 떠나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