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밥 한 끼
여름이 끝나가는 무렵 슈퍼에 가면 포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유난히 비가 많이 내린 올해 날씨에도 탐스러운 포도 알맹이들은 침을 꼴깍 삼키게 한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까지 나를 키워주신 친할머니도 포도를 아주 좋아하셨다. 엄마 말에 의하면 가을이면 할머니와 내가 경쟁하듯 포도를 먹었다고 하는데, 나의 기억 속에는 같이 오손도손 마주 앉아 먹었다기보다 할머니가 드라마를 보며 포도를 먹었고, 나도 그 옆에 가만히 앉아 포도를 먹는 할머니를 지켜보았다.
그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나는 자라며 티비가 어떻게 사람들을 무감각하게 만드는지 배워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억 깊숙이 자리한 개인적 감정이 더해져 티비에 빠져 있는 수동적 얼굴을 무척 싫어하게 되었다.
격한 감정 이입이 유치해 보였고, 보이는 것이 전부인 마냥 착각하는 꼴이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함께 있는 시간이 무의미하게 달아나는 것이 싫었다.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받는 가장 큰 스트레스도 그렇고, 삭발을 하고 작은 절에서 잠시 지내게 되었을 때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티비지옥으로 벗어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출가를 했다가 환속을 하고 절에서 집으로 돌아와 당분간 모든 의무감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면서 갑자기 많아진 시간을 감당하지 못했다. 책을 읽고, 산책을 하고, 목욕을 하는 것 모두가 시간이 속절없이 흐르는 걸 어떻게든 버티어 보려는 것만 같게 느껴졌다.
오래된 기억 속에 학교에 들어가기 전 시간이 아주 많았을 때 종종 동네 수족관에 가서 열대어며 거북이를 마냥 바라보던 내가 있다. 생각해보니 수족관 아저씨는 참 조용하신 분이셨다. 늘 카운터 벽 뒤로 앉아서 무언가를 읽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오후가 되면 인사도 없이 들어가 할머니가 저녁을 먹으라고 부를 때까지 열대어가 헤엄치는 걸 눈으로 가만히 쫓았다. 아직까지도 기포기에서 났던 뽀글거리는 소리와 해가 저물어가며 유리를 반사해 찬연히 드리워지던 노란 햇살의 잔상이 그 시절의 적막 뒤 평화로움을 떠올려 보게 한다.
나는 기억 속에서조차 외로운 아이였다. 혼자인 시간이 많았지만 무엇보다 서로 마음을 나누는 일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병을 앓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기나긴 고독의 시간 내가 할 수 있는 건 일기를 쓰는 일이었다. 그리고 세상의 행복 말고도 내 안에 아픔과 슬픔을 다독여 줄 수 있는 자신을 위한 밥 한 끼를 차린다.
밥 많이 배부르게, 새콤달콤 식욕을 돋우는 채소 반찬, 마음을 녹여주는 달콤한 과일. 심심하지만 내 몸에는 잘 맞아 소화가 잘된다.
세상을 이해해 갈수록 작은 것에도 크게 고통을 느끼고 또 한편으로 쉽게 감동해 버리는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속에는 우리가 느끼지만 어떻게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하는 완전한 인간적 무엇이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