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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은 Nov 24. 2023

#19 스물, 그리고 서른하나의 우리

  

 언젠가 유서를 쓴 적이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죽는다는 가정하에 적어보았던 글. 유서를 쓰다 보면 내가 어떤 사람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알게 된다. 달랑 한 장 짜리 유서에는 전전긍긍하며 애썼던 사람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이름이 남는다. 그냥 원래 그랬듯이 내 옆에 있는 사람들, 내 마음 안에 깊숙이 자리를 틀고 앉았던 사람들.    

  

 유서를 쓰면서 내 친구 관계를 정리할 수 있었다. 나는 그리 넓은 교유관계를 맺지는 못했다. 어릴 적에는 성격 탓도 있었지만, 너무 넓은 관계보다는 수는 적어도 깊은 관계가 더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느꼈다. ‘많은 사람을 곁에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겠구나.’라는 것. 살다 보면 내가 가깝다고 생각했던 관계들도 하나둘 무너지기도 하고, 바쁘다는 핑계로 멀어지다 보면 겉잡을 수없이 멀어지기도 했다. 그러다 보면 내 곁에는 빈자리가 늘어났고, 그 자리는 새로운 관계로는 채워질 수 없는 것이었다.     

 

 지금 내 삶에 소중하게 남아있는 친구들은 대부분 대학교 때 만들어진 친구들이다. 과 동아리를 하면서 만났던 친구들과 대학 내 동향 모임에서 만나게 된 친구들. ‘들’이라는 보조사가 거창할 정도로 열 손가락으로도 꼽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보통은 성인이 되고 맺은 관계보다는 그보다 이전의 학창 시절에 맺은 관계가 더 탄탄하게 오래간다는 말이 있지만 나의 경우에는 반대였다. 성인이라는 수식어가 갓 붙은 우리는 여전히 미숙하고 철없는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서로 앞에서 많이도 울고 웃었다. 눈물과 웃음이 얼기설기 섞인 나와 친구들의 관계가 어느덧 10년이 넘어가고 있다.     


  올해는 많은 의미로 뜻깊은 해였지만 한 친구와 더 깊어질 수 있었던 점이 제일 감사한 일인 것 같다. 대학생 때 만난 우리는 이름만 똑같았고 모든 것이 정반대인 사람이었다. 활발한 성격의 그녀는 대학교에서 많은 활동을 했고, 열정이 넘치던 사람이었다. 그녀 주변에는 늘 사람이 있었고 그녀 곁에 있으면 많이 웃을 수 있었다. 반면에 나는 해야 하는 것만 하고 먼저 나서지 않는 소극적인 사람이었다. 그래도 친구와 함께였기에 대학교에서 추억도 많고 쌓았고, 웃기도 많이 웃었다. 하지만 졸업하고는 자주 연락하거나 보지는 못했다. 서로 다른 지역에 있을 때도 있었고, 다른 나라에 있을 때도 있었다. 그렇게 마음속으로는 늘 응원하지만 잦은 교류가 없던 우리가 다시 경주에서 만나게 되었다.      


 막막했던 경주 생활에서 친구가 한 명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서로 일하고 바쁘게 지내느라 자주 보지는 못했지만, 계절이 바뀌면 만나 소풍도 가고 그동안 못했던 이야기도 했다. 그렇게 지내던 우리가 같이 글을 쓰면서 관계가 새롭게 쓰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같은 주제로 글을 쓰고 2주에 한 번 책방에서 만나 서로의 글을 합평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글감에 대한 이야기, 글쓰기의 장점과 고충에 관해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그 안에서 또 사소한 일상도 자주 나눌 수가 있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함께한 10년의 세월 중에 가장 가까웠고, 가장 많이 마음을 나누게 되었다. 깊은 관계를 이루는데 공통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알게 되었고 나는 이렇게나 깊고 긴밀해진 우리 사이가 너무 감사했다.   

   

 그런 친구가 새로운 출발선 앞에 서게 되었다. 그동안 해왔던 일과는 아예 다른 새로운 일을 한다는 것에는 용기가 필요한 법인데 그 친구는 그런 의미에서 아주 용기 있는 사람이다. 늘 배울 점이 많은 그런 사람이지만 남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많이 울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도 자고 일어나면 또 툭툭 털고 일어나 누구보다 열심히, 잘 해낸다는 것을 안다. 첫걸음을 내디딜 때는 한 번에 잘 걷고, 뛸 수는 없다. 넘어지기도 하고 다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조금이라도 덜 넘어지기를, 덜 다치기를 응원할 것이다. 그리고 넘어지더라도 일으켜 주고 그 상처가 잘 아물 수 있게 곁에 있어 주고 싶다. 그리고 또 이렇게 소중한 우리의 관계가 20년, 30년이 지나도  엮여있기를 바란다.


소중한 사람에게, 그 어느 때보다 더 큰 응원을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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