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기러기에게
안녕!
너희들이 벌써 왔다니 차일피일 미뤘던 내 게으름이 미워진다. 가을에 와서 놀랄까 봐 미리 소식을 전하려고했거든.
작년에 너희가 머물던 논이 흙으로 덮였어. 4천km가 넘는 먼 거리를 2주 넘게 힘들게 날아 왔는데 얼마나 놀랐을까. 변해버린 들녘을 마주했을 때의 그 당황스러움을 덜어주고 싶었는데, 소식이 늦어서 미안해.
아직은 몇 마리만 보이던데, 혹시 선발대만 온 거니?
너희가 쉬던 논들에 올봄에는 모내기하지 않았어. 그리고 얼마 후, 트럭이 흙을 실어와 논에 붓기 시작했고, 굴착기가 평평하게 흙을 고르며 땅을 북돋웠지. 한동안 동네 길에는 덤프트럭이 오갔고 들녘에선 굴착기 소리가 계속 들렸어. 그때부터 가을에 올 너희를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절대농지가 아니었나.’ 하며 씩씩거리기만 했지만 말이야.
너희 기러기(큰기러기)를 우리는 겨울 철새라고 해.
봄에 시베리아 동부나 사할린, 알래스카 등지로 가서 번식하며 여름을 보내고, 가을이 되어 우리나라나 일본, 몽골, 중국 북부에서 겨울을 보내기 위해 내려오잖아. 그 먼 길을 위험을 무릅쓰고 먹을 것과 쉴 곳을 찾아왔을 텐데, 와서 보니 그전과는 다른 환경으로 바뀌어 있으면 얼마나 난감하고 막막할까.
너희 중 몇 마리가 늦은 봄까지 남아있는 걸 봤어. 누군가 아픈가 보다고 생각했지. 너희는 병이 들거나 체력이 약해 낙오하게 되면 가족이 남아 돌봐준다며? 서로의 고통도 함께하는 깊은 가족애, 동료애가 정말 멋지고 부럽다.
실은, 남아있는 애들을 보며 힘들게 그 먼 길을 가지 말고 이곳의 더위에 적응하여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흰뺨검둥오리나 청둥오리도 너희 같은 철새였는데 지금은 거의 텃새가 되었잖아. 그런데 유난히 더웠던 여름을 맞으며 너희가 가길 참 잘했다 싶었지. 올여름은 진짜 더워서 나도 종일 에어컨을 켜고 지냈거든.
어, 지금 우리 집 지붕 위를 날아가는 너희가 보여. 근처에서 날아올랐는지 날아가면서 V자 모양을 만드네. ‘끄륵끄륵 끄으으, 끼럭끼럭 끼이이’ 소리를 내며 대형을 정렬하면서 가고 있어. 작고 찌그러진 V자야. 저녁 먹으러 가는 중이니?
V자 대형으로 날면, 앞에서 만든 상승기류를 통해 뒤의 새들은 공기의 저항을 70%나 줄일 수 있다며? 온몸에 공기의 저항을 받는 선두는 힘들겠다. 선두에 있는 기러기가 대장이니? 대장은 계속 앞에서 날아가야 해? 아니라고? 서로 바꿔가며 난다고? 뒤에 있는 새들은 끼럭끼럭 끄륵끄륵 하며 힘내라고 응원하는 거라고?
아, 그렇구나. 그래서 그 먼 곳에서 낙오하는 애들이 없도록 챙기면서 서두르지 않고 함께 올 수 있는 거구나. 알겠어. 왜 그렇게 시끄럽게 떠들며 지나가는지 궁금했었거든. 단순한 수다가 아니라 서로를 배려하며 기운 내라는 응원 소리였구나. 이젠 시끄럽다고 불평하지 않고 아름다운 소음으로 들을게. 참 좋은 전통이다. 잘 지키도록 해.
있잖아. 나는 너희 기러기뿐만 아니라 새를 관찰하는 걸 좋아해. 그래서 새 탐조도 자주 다녔어. 적금을 들어 필드 스코프와 쌍안경도 샀을 정도지. 새를 좀 더 가까이, 자세히 보고 싶어서. 나태주 시인이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고 했는데 정말 딱 맞는 말이야. 새가 멀리 있으면 잘 보이지 않으니 ‘새가 있네.’하고 말았거든.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새마다 생김새가 다른 게 얼마나 독특하고 예쁜지, 화려한 깃털 색과 모양을 보고선 감탄사가 절로 나왔어. “정말 예쁘지. 어떻게 저런 옷을 입었을까. 와, 저 새는 특이한 깃털을 가지고 있네. 균형을 잡으며 날 수 있을까. 부리 좀 봐” 등등. 먹이를 찾는 모습, 먹는 모습, 자는 모습 등 얼마나 귀여운지 혼자 보기 정말 아까워. 물론 혼자 보지 않아. 탐조 회원이나 우리 가족과 같이 보며 새들에게 찬사와 격려를 보내지. 요즘은 걱정을 더 많이 하고 있지만.
너희가 얼마나 반가운지 소개해도 될까.
등과 머리는 어두운 갈색, 배는 연한 갈색의 깃털을
가지고 있고 꽁지덮깃(엉덩이?)은 하얀색이야. 부리는 검은색인데 끝부분에 등황색의 띠가 있지. 덩치가 큰 편인데 다리는 짧아. 그 짧은 다리에 주황색 부츠를 신고 있어.
너희는 다른 기러기와도 곧잘 같이 있더라. 특히 쇠기러기하고. 쇠기러기는 덩치도 작고 부리 위쪽 이마가 흰색이며 배에 불규칙한 검은 줄무늬가 있어서, 쉴 때나 날 때 너희와 구별하기 좋아.
동네를 지나다 너희가 쉬고 있으면 난 자세히 보고 싶어 천천히 운전하거나 잠시 멈추곤 해. 그럼, 경계 보는 기러기가 긴 목을 꼿꼿이 세우고 잔뜩 긴장하고 나를 바라보지. 그리고 쉬고 있던 다른 녀석들도 하나둘 긴장해. 나는 더 보고 싶지만, 너희의 휴식을 방해하는 거 같아서 이젠 ‘어, 기러기 있네.’ 하며 그냥 지나간다. 그러면서 대강 몇 마리나 있나 얼른 세어 봐. 매년 비슷한 개체수가 보여서 다행이야.
이제 다른 가족들이 속속 도착할 테지? 지금의 논들로는 좁을 텐데 새로운 곳은 찾고 있는 거지? 남양은 한창 발전이라는 명분으로 산을 허물고, 논밭을 메꾸고 있어. 그 자리에 아파트를 짓고, 도로를 내고, 공장을 지으며 개발에 열중하고 있지. 자꾸 너희들이 머무는 자연은 사라지고 인공적인 시설만 들어서고 있어 안타까워.
논밭이나 저수지·해안·습지 등지에 살며 벼·보리 등의 낙곡이나 감자·고구마·연한 풀· 종자 등을 먹는 너희인데, 그런 곳들이 부족해지니 너희가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이 돼. 지금도 멸종위기 야생생물 2급인데. 하긴, 너희만 살기 힘든 건 아니야. 사람도 살기 어려워. 그런데 어떻게든 살아가게 되더라. 너희도 그럴 거야. 요새는 너희와 나누며 함께 살아가려는 사람들도 꽤 있어. 점점 자연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기는 해.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고. 후후. 그런 사람들이 많으면 서로가 좋을 텐데,
우리 동네 기러기들아,
쉽지 않지만 너흰 지혜로운 새니까 어떻게든 이 난관을 잘 이겨낼 거로 생각해. 논이 안 좋아서 더 좋은 논으로 만들려고 복토한다는 말도 있었어. 그 말이 사실이길 바라자. 우리, 아래 들녘의 논이 내년에는 본래의 모습보다 더 좋은 논들로 바뀌어 돌아오길 바라자. 그럼, 너희는 계속 우리 동네 아래 논들에 찾아오겠지. 그리고 난 서로 배려하는 동료애, 끈끈한 가족애, 서로 존중하는 부부애를 가진, 멋진 너희를 계속 볼 수 있을 테고.
내년에는 더 넓고 더 풍족한 들녘을 만날 수 있을 거야. 내년에는 더 넓고 더 풍족한 논들에서 쉴 수 있을 거야. 그러니 부디, 건강 조심하고 서로 다독이며 겨울 잘 나길 바란다.
우리 동네 큰기러기 파이팅!